이 기사는 2023년 2월 9일 13:47 자본시장 나침반 '시그널(Signal)' 에 표출됐습니다.
“컨펌(confirm)은 ‘확인해주다’지 ‘결정해 달라’가 아니다”(법원)
서울고등법원이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과 교보생명 투자자이자 사모펀드(PEF)인 어피니티컨소시엄 간 분쟁에서 어피니티쪽 손을 들어주며 한 말이다.
9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고등법원의 1,2심 판결문에서 법원은 어피너티컨소시엄 측이 고용한 안진회계법인이 독립적으로 판단해 교보생명 가치를 주당 40만 9912원으로 산정했다고 판시했다.
어피니티컨소시엄은 2012년 당시 교보생명 2대주주였던 대우인터내셔널로부터 1주당 24만5000원(총 1조2000억원)에 교보생명 지분 24.01%를 사들였다. 당시 어피니티는 2015년 9월 30일까지 상장하지 못하면 신창재 회장이 일정 가격에 주식을 되사는 풋옵션을 계약에 포함시켰다. 어피니티는 2018년 10월 23일 신 회장에게 풋옵션을 행사하겠다고 알리고 11월 22일 안진회계법인이 산정한 주당 가치가 40만 9912원이라고 통지했다.
신창재 회장은 안진회계법인이 시장 예상보다 두 배 비싼 가격을 제시했고, 이는 어피니티의 압박에 의한 것이었다면서 이들을 형사 고발했다. 이에 검찰은 어피니티와 공동투자자인 IMM프라이빗에쿼티의 임원, 안진회계법인 관계자 3명 등 5명을 한국공인회계사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했다. 그러나 법원은 1심에 이어 2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컨펌해달라’란 표현 해석 엇갈렸던 검찰과 법원
검찰은 어피니티 컨소시엄 관계자가 안진 회계사에게 “향후 컨소시엄에 속한 사모펀드가 진행 중인 기업인수·합병 관련 실사, 자문 등의 용역도 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말한 점을 증거로 제기했다. 교보생명 주식 산정에 대한 용역비는 1억 2670만원에 불과했지만, 앞으로 더 많은 용역을 수주 받기 위해 어피니티에 유리하게 가격을 산정했다는 게 검찰의 논리였다.
특히 검찰은 안진 측이 어피니티 측에 “상위 결과 값에 대해서 컨펌주시면 보고서 작업 진행하려고 합니다”라고 보낸 이메일에 주목했다. 또한 어피니티 컨소시엄이 안진에 "최종 1주당 가격을 아래 형식으로 주시면 내부적으로 논의해 결정하겠다"라고 보낸 이메일도 지적했다. 검찰은 어피니티 컨소시엄이 가치 평가 방법이나 금액을 결정했다는 근거로 제시했다.
그러나 법원의 판단은 정반대였다. ‘컨펌’이라는 단어가 나온 맥락에 주목했다. 법원은 사전에 주고 받은 메일에서 이미 어떤 방식을 사용할지 논의했고, 어피니티 컨소시엄 내부에서 막판까지 어떤 방식을 쓸지 의견이 달랐다는 점을 지적했다. 법원은 "이메일을 보낸 날짜가 풋옵션 가격 산정 마감일 이었기 때문에 이견이 있으면 빨리 말하라는 취지였다”고 증언한 회계사의 진술에 힘을 실었다.
어피니티 측 제안을 안진이 거부…독립적 판단 증거
법원은 어피니티 측이 교보생명 주당 가치를 더 높게 산정할 수 있는 방식을 안진에 제안했을 때 이를 거부한 점을 주요 증거로 인정했다.
안진회계법인과 어피니티는 교보생명 기업 가치를 산정하기 위해 동종업계 기업을 비교했는데 안진이 쓰지 않은 방식으로는 주당 42만 9546원도 산정할 수 있었다. 법원은 어피니티 관계자가 일부 지표를 빼자고 했을 때 안진이 이를 거부한 점도 안진이 전문가로서 독립적으로 판단한 증거로 봤다. 안진 측은 주당 30만 2456~50만 7564원을 교보생명 주당 가치로 도출했고 이를 평균한 뒤, 최근 2년간 수치를 활용하게 한 금융당국 지침을 반영해 주당 40만 9912원을 최종 가격으로 산출했다.
법원은 앞서 1차 국제중재에서 중재법원이 안진이 독립적으로 가치산정업무를 수행했다고 판단한 점도 인용했다. 당시 중재 결과는 주당 40만 원대로 풋옵션을 행사할 의무가 없다는 결론 때문에 교보생명의 판정승으로 알려졌지만, 법원은 그 과정 자체는 문제가 없다고 본 셈이다.
법원, 어피니티·안진 의견교환 문제 없다
법원은 오히려 교보생명이 기업 가치 산정을 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은 점을 꼬집었다. 안진은 비상장사인 교보생명이 내부 재무 수치를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안진은 교보생명의 주주인 어피니티 컨소시엄을 통해 자료를 제공 받아야 했다.
실제 교보생명은 2015년에서 2017년까지 자료만 제공했고 이후 자료는 일부만 주거나 파일이 아닌 실물 보고서로 줬다. 보통 파일로 수치를 받아 엑셀 등 프로그램으로 산출하는 기업가치 산정 절차에는 쓸 수 없는 자료였다.
안진 측은 “(교보생명으로부터) 자료는 (안 오겠지만) 저희끼리 조만간 모여서 얘기하심이 어떨지요”라는 메일을 어피니티 측에 보내기도 했다.
법원은 “기업가치산정은 의뢰자와 평가자간 적극적인 의견 교환을 권장하고 있다”면서 서로 의견을 교환한 횟수가 다소 많다고 해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다만 이번 판결이 신회장이 주당 40만 9912원씩 총 2조 167억 원을 어피티니 컨소시엄에 돌려줘야 한다는 뜻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양측은 2차 국재중재를 앞두고 있고, 그 결과에 따라 민·형사상의 추가 소송을 벌이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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