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원회가 은행의 알뜰폰 진출을 공식 허가하면서 금융권의 통신 시장 진출이 속도를 낼 것으로 전망된다. 탄탄한 자금력과 방대한 고객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금융 업체들의 알뜰폰 시장 진출 확대로 가계 통신비 부담 완화와 서비스 질 개선에 대한 기대감이 크지만 영세 알뜰폰 업체들은 경쟁에서 도태될 위기에 처했다. 기존 알뜰폰 업체들이 반발하는 가운데 이번 기회에 ‘옥석 가리기’를 통해 70여 개의 업체가 난립하고 있는 알뜰폰 시장을 구조 조정하는 계기로 삼을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금융위는 12일 알뜰폰 사업을 은행 부수 업무로 지정하는 안건을 상정해 최종 의결했다. 이로써 2019년 금융 규제 샌드박스 1호로 알뜰폰 시장에 진출한 KB국민은행 ‘리브엠(리브모바일)’은 정식 승인을 받게 됐다. 중소 알뜰폰 업계가 요구한 점유율·가격 제한도 이뤄지지 않아 자유로운 사업 전개가 가능하게 됐다. 이미 핀테크 기업 토스도 ‘토스모바일’로 알뜰폰 시장에 진출해 있는 만큼 다른 은행들도 알뜰폰 사업에 속속 진출할 것이라는 관측이 이어진다. 실제 신한은행·하나은행과 NH농협은행이 알뜰폰 사업자와 연계한 제휴 요금제를 출시하거나 검토하고 있다.
◇금융·통신 시너지 기대…통신시장 ‘메기’ 역할 주목=리브엠은 100억 원대 적자를 기록하고 있지만 공격적인 가격 정책과 서비스로 올 2월 기준 40만 명에 달하는 가입자를 끌어모았다. 통신 3사 자회사 알뜰폰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이용자 수다. KB국민은행은 알뜰폰 사업에서 적자를 보더라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입장이다. 카드·금융상품 결합 판매와 통신 가입자 데이터 수집을 통한 신용평가 모형 개선, 신파일러(금융이력부족자) 대상 대출 확대 등 적자를 상쇄할 수 있는 이점이 많기 때문이다. 통신 업계의 한 관계자는 “금융사 입장에서 알뜰폰은 새 금융 고객 확보를 위한 마케팅 창구”라며 “리브엠의 성공을 지켜본 타 금융사들도 규제라는 진입장벽이 사라진 만큼 대거 알뜰폰 시장에 진출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최근 가계 통신비 부담 완화와 경쟁 촉진을 위한 제4통신사 설립에 매진하고 있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도 금융사의 알뜰폰 진출을 환영하는 분위기다. 경쟁력 높은 사업자가 등장해 알뜰폰 가입자를 늘릴 수 있는 데다 지금껏 서비스 부족으로 인한 알뜰폰의 부정적 이미지 개선을 기대할 수 있어서다. 실제 리브엠은 다른 알뜰폰 대비 저렴한 요금을 앞세워 가입자를 늘리고 있다. 토스모바일은 토스 애플리케이션을 통한 간편한 가입과 24시간 콜센터 운영을 내세운다. 소비자 입장에서도 선택지와 편익이 늘어나기 때문에 금융사의 알뜰폰 시장 진출을 반긴다.
과기정통부는 나아가 금융사가 기간통신업에 뛰어들어 제4통신사로 성장함으로써 정체된 이동통신 시장의 ‘메기’ 역할을 해주기 바라고 있다. 문제는 중소 알뜰폰 업체들의 반발이다. 알뜰폰통신사업자협회는 “은행이 거대 자본력을 이용해 가입자를 빼가는 행위를 막을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호소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KB국민은행은 ‘상생 방안’을 마련하고 가격을 중소 알뜰폰 업체보다 높게 조정할 것이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금융위 관계자는 “관련 소위원회에서 KB국민은행은 중소 사업자에 비해 조금 더 높은 수준에서 가격을 책정함으로써 가격 경쟁 측면에서 중소 사업자보다 우위를 점하지 않겠다고 밝혔다”며 “신규 상생 방안도 준비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귀띔했다.
그럼에도 70여 개에 달하는 중소 알뜰폰 업체 입장에서는 적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금융사가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생존을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됐다. 한 업계 관계자는 “지금껏 상당수 알뜰폰 업체들이 마케팅·서비스에 투자하지 않고 저렴한 망 도매대가에 기대 쉽게 사업을 해온 측면이 있다”면서 “알뜰폰 시장 재편이 이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0원' 요금제에 구독 서비스…알뜰폰 가입자 유치 경쟁 격화=금융·통신의 융합이 본격화하면서 기존 알뜰폰 업체들도 요금 할인은 물론 스마트폰 구독과 같은 차별화된 마케팅을 통해 대응에 나섰다.
알뜰폰 브랜드 ‘핀다이렉트’를 운영하는 카카오 계열사 스테이지파이브는 연내 출시를 목표로 ‘디바이스(기기) 구독’ 서비스를 준비 중이다. 이를 위해 최근 정관상 사업 목적에 ‘전자제품임대업’ 등을 추가했다. 아직 구체화하지 않았지만 이용자가 스마트폰,사물인터넷(IoT) 등의 통신기기를 구입 가격보다 저렴한 구독료만 내면서 쓸 수 있는 서비스가 나올 것으로 보인다. 앞서 지난달 고고모바일이 이와 비슷한 ‘휴대폰 구독’ 서비스를 업계 최초로 내놓았다. 기기 구독료는 ‘갤럭시 Z플립3’ 기준으로 월 7260원에 약정 없이 다른 기종으로 자유롭게 교체할 수 있다. 고고모바일은 지난달 알뜰폰 시장에 진출해 하나은행 제휴 요금제를 내놓은 바 있다.
요금 할인 경쟁도 불붙었다. 알뜰폰 업계 1위 KT엠모바일은 가족·친구가 아닌 가입자끼리도 요금제를 결합하면 월 최대 20GB의 추가 데이터를 받을 수 있는 ‘아무나 결합’ 서비스를 이달 초 출시했다. LG유플러스와 KT 망을 쓰는 다수 업체들은 일정 데이터를 수개월간 무료로 쓰는 ‘0원 요금제’를 비롯해 월 3만 원대에 기존(150GB)의 2배인 300GB를 2년간 제공하는 프로모션도 이달부터 시작했다. 최근 SK텔레콤과 LG유플러스가 5세대(5G) 신규 요금제의 하나로 데이터 제공에 특화된 청년요금제를 내놓은 것도 알뜰폰으로 유입되는 MZ세대를 붙잡으려는 전략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통신 업계에서는 금융사의 시장 진출과 이에 따른 업체 간 서비스·마케팅 경쟁이 알뜰폰 시장 활성화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면서도 고객센터 확충과 같은 내실 다지기 없이 판촉에만 치우칠 경우 자칫 저품질의 통신 서비스를 양산하는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정지연 소비자연맹 사무총장은 “젊은 층의 이용이 늘고 있는 만큼 사후 서비스 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알뜰폰이 통신 시장에서 파괴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라며 “최소한의 소비자 보호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사업자는 퇴출시키는 시스템 등을 검토할 때”라고 말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