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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 & Insight] 이대론 '의대 블랙홀' 더 커져…이공계 쓰나미 막을 특단책 필요

필수의료 확충 취지 공감하지만

첨단바이오·디지털의료 육성하고

이공계 인재유출 막을 대책 병행을

고광본 선임기자(부국장)




“아인슈타인 박사처럼 세계적인 업적을 남기고 싶어요.” “반도체와 전자를 연구해 우리 산업에 도움이 되고 싶어요.” 1997년 말 외환위기가 터지기 전만 해도 대입 학력고사나 수능 전국 수석을 차지한 학생들에게서 심심찮게 들었던 말이다. 실제 전체 수석이나 이과 수석의 경우 서울대 물리학과를 가장 많이 지원했고 전자공학과가 그 뒤를 이었다. 수십년간 이어진 전통이었다. 전기공학과나 화학과, 컴퓨터공학과도 지망했다. 외환위기 전에는 가장 우수한 성적을 받은 학생이 의대를 지원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후 실직이 줄을 잇고 경제 성장세도 주춤해지면서 판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직업 선택의 우선순위가 안정성과 수익성으로 바뀌며 의대 쏠림이 심화했다. 오죽했으면 ‘전국 40개 의대 정원 3058명을 채운 다음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이공계와 KAIST·포스텍을 간다’는 자조 섞인 말이 돌 정도다. 물론 이공계를 지원하는 우수 인재들도 있지만 의대 지망을 위해 SKY 등 우수 이공계 인재 중 반수를 하는 학생들이 부지기수다.

정부가 6일 올 연말 치러지는 2025학년도 입시부터 의대 입학 정원을 2000명이나 늘리기로 하면서 이공계가 다시 한 번 술렁거리고 있다. 가뜩이나 올해 14.7% 규모의 정부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으로 뒤숭숭한 이공계의 위기감이 커진 것이다. 정부 구상대로 의대 입학 정원이 현재 3058명에서 5058명으로 늘어나면 2024학년도 입시 기준으로 SKY의 자연계열 학과 모집 인원(5443명)과 거의 맞먹는다. 늘어나는 의대 정원이 KAIST 등 4개 과학기술특성화대와 포스텍의 신입생 숫자를 합친 규모(2100여 명)와 비슷하다. 의대가 ‘우수 인재의 블랙홀’로 작용해 이공계가 쓰나미에 휘말릴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과학고 출신 이공계 인재 배출도 줄어들 수 있다. 지금도 SKY와 과기특성화대조차 대학원생을 못 채우는 일이 다반사이고 박사후연구원도 태부족인 게 현실이다. 문과 몰락의 가속화는 말할 것도 없다.



입시학원가에서는 의대 정원이 2000명 늘어나면 국어·수학·탐구과목의 평균 점수를 기준으로 SKY 자연계열의 60~70%가 의대 지원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과기특성화대의 우수 인재 이탈 가능성도 높다. 지역 의대의 현지 인재 선발 비중이 40%에서 60%로 늘어나 지방 국립대 등의 인재 유출 우려도 크다. 결국 의대 정시 합격생 중 삼수 이상이 40%가 넘는 상황에서 ‘의대 낭인’이라는 말이 생길 판이다. 반면 학원가는 대학생과 직장인까지 망라해 ‘의대 특수’를 만끽하는 분위기다.

물론 외과·내과·산부인과·소아과·응급의학과 등 필수 의료와 지역 의료의 상황이 매우 어려운 현실에서 의사 수를 늘려야 한다는 정부의 계획은 매우 바람직한 방향이다. 정부는 의사 수가 2035년 1만 5000명가량 부족할 것으로 보고 20년 만에 급격한 의대 정원 확대에 나섰다.

문제는 정부가 의대 쏠림 현상에 대해 ‘단기적으로 심화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완화될 수 있다’는 식으로 대처해서는 낭패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기술 패권 시대에 국가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공계 학부와 대학원, 박사후연구원, 교수의 사기 진작과 생태계 활성화를 위해 특단의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이공계 기피 현상이 팬데믹처럼 퍼질 수도 있다. 정부는 이번에 의대 정원만 늘렸을 뿐 기존 의대에서 의사과학자를 키우거나 KAIST·포스텍·UNIST에 의대 신설을 허용해 의대와 이공계 간 협업을 촉진하는 방안은 내놓지 않아 아쉬움을 남겼다.

정부는 설 연휴 이후 의사단체의 집단 휴진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의대 정원 확대에 대한 국민 공감대를 높이는 데 주력해야 한다. 의사과학자 양성에도 초점을 맞춰야 한다. 무엇보다 이공계 생태계를 활성화하는 게 급선무다. 의대와 이공계 등의 융합을 통해 첨단바이오와 인공지능(AI)·디지털 의료를 키워 국민의 편익을 도모하고 국부를 창출하는 게 시대적 과제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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