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18조 원 규모의 반도체 금융 지원 프로그램을 개시하겠다고 밝히면서 대기업들이 대출 신청 여부를 두고 저울질하고 있다.
26일 기획재정부와 금융위원회, 재계 등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반도체 대출 이용 조건과 규모 등을 놓고 산업은행과 접촉한 것으로 알려졌다. 산은 안팎에서는 이들 기업이 조 원 단위 대출을 쓰지 않겠느냐는 예측도 흘러나왔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실제 대출 의사가 없다며 선을 긋고 있다. 삼성전자는 5월 산은의 반도체 저리 대출 방안이 담긴 정부의 ‘반도체 생태계 종합 지원 방안’이 나온 뒤 관련 내용을 들여다봤지만 현재는 대출 신청 계획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삼성전자 측은 “산은에 반도체 관련 대출을 요청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SK하이닉스의 경우 정부의 반도체 프로그램을 통해 2조 원 안팎의 자금을 지원받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추측이 나왔지만 SK하이닉스 역시 “구체적으로 검토한 바 없다”고 부인했다.
업계에서는 아직 대출을 쓸 수 있는 시간이 있는 만큼 해당 기업들이 시간을 두고 검토에 나서지 않겠느냐고 보고 있다. 금융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프로그램이 다음 달부터 시작인데 지금부터 얘기가 나와봐야 평판 리스크가 생길 수 있다”며 “대출 이용 여부에 시장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등도 두고 볼 것”이라고 전했다.
이날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정부서울청사에서 경제관계장관회의를 열고 다음 달부터 반도체 산업에 18조 원 규모의 금융 지원을 개시하는 내용의 ‘반도체 생태계 종합 지원 추진 방안’을 발표했다. 금융 지원은 크게 산업은행의 17조 원 규모 저리 대출과 1조 1000억 원대 반도체 생태계 펀드 조성으로 나뉜다.
정부는 산은을 통해 다음 달부터 2027년까지 한국에 제조시설을 새로 짓는 국내외 반도체 기업에 낮은 금리로 대출을 공급하기로 했다. 대기업에는 0.8~1%포인트, 중소·중견기업에는 1.2~1.5%포인트의 우대금리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산은이 신용등급이 ‘AA’인 대기업에 5년 고정금리로 자금을 빌려줄 경우 적용되는 이자율은 4.3%다. 하지만 다음 달 당장 돈을 빌린다면 이보다 0.8%포인트 낮은 3.5%에 대출이 가능하다. 내년부터는 1%포인트 저렴한 3.3%의 금리로 자금 조달이 가능하다. 국고채 5년물 금리(약 3.2%)와 비슷한 수준이다.
정부는 이를 위해 내년부터 산은에 총 2조 원 규모의 정부 출자를 추진한다. 현금과 현물을 최대 1조 원씩 출자하는 방식이다. 현물 출자 대상 자산으로는 정부가 보유한 한국도로공사·한국전력 지분 등이 거론된다. 정부 관계자는 “현물 출자에 대해서는 아직 정해진 것이 없다”고 설명했다.
소재·부품·장비(소부장)나 팹리스 등에 투자하기 위해 민관 합동으로 꾸린 반도체 생태계 펀드도 다음 달부터 지분투자에 나선다. 현재는 2025년까지 펀드 규모를 3000억 원 수준으로 조성할 계획인데 2027년까지는 이를 1조 1000억 원 이상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세액공제도 강화한다. 반도체 등 국가전략기술 투자액에 15~25%, 연구개발(R&D) 지출에 30~50%의 세액공제를 제공하는 K칩스법 적용 기한을 3년 연장하는 안을 추진한다. K칩스법은 올해 말 일몰이 예정돼 있다. 첨단 반도체 소부장도 국가전략기술에 추가하는 안도 검토한다. 업계에서는 열압착(TC) 본더 등 고대역폭메모리(HBM) 제작에 활용되는 소부장 등이 포함 대상으로 거론된다.
반도체 관련 예비타당성조사도 신속히 마무리할 방침이다. 용인국가산업단지 부지를 관통하는 국도 45호선을 서편으로 이설하고 구간을 왕복 4차선에서 8차선으로 확장할 수 있도록 예타를 면제하고 국비도 지원한다. 용인산단에 용수를 원활히 공급하기 위한 통합 복선관로 구축도 예타를 받지 않게 할 계획이다. 용인산단 전력 공급에 대해서는 1단계로 3GW 용량의 액화천연가스(LNG)발전소를 건설하고 2단계로는 장거리 송전선로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대응하기로 했다. 세부적인 송전선로 설치 계획은 8월 말에 나올 예정이다.
업계에서는 향후 국회에서 추가적인 반도체 지원책이 마련될지 주목하고 있다. 야당에서도 과감한 반도체 지원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은 K칩스법 일몰을 10년 연장하고 투자·R&D 세액공제율을 현행보다 10%포인트 올리는 방안을 내놓은 바 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