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형 벤처캐피털(CVC)’이 결성하는 펀드에 대한 외부 출자 한도가 기존 40%에서 50%로 높아진다. CVC는 대기업이나 중견기업이 벤처기업 투자를 위해 자회사 형태로 운영하는 VC를 말한다. 이에 따라 대기업의 자금 부담이 줄어들면서 CVC가 벤처·스타트업 성장의 마중물 역할을 현재보다 더 적극적으로 할 수 있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최근 단행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빅컷으로 금리 인하기가 도래함에 따라 정부가 벤처 투자 제도를 개선할 적기를 맞이했다는 평가가 제기된다.
27일 관계부처에 따르면 중소벤처기업부는 다음 달 2일 열리는 경제관계장관회의에 범정부 대책으로 추진 중인 ‘벤처 투자 활성화 방안’을 안건으로 올린다. 중기부·기획재정부는 창업에 도전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올 하반기부터 벤처 투자 종합 대책을 마련해왔다.
이번 대책의 핵심은 CVC 규제 완화로 꼽힌다. 정부는 일반지주회사 CVC가 결성하는 펀드의 외부 자금 출자 한도를 기존의 40%에서 50%로 상향하기로 했다. 예를 들어 1000억 원 규모의 펀드를 만들 때 지주사나 그룹 계열사가 600억 원 이상을 투입해야 했지만 앞으로는 500억 원으로 자금 부담이 줄어든다. 또한 한국인이 해외에 창업한 법인에 대한 해외투자 규제도 완화될 방침이다. 글로벌 벤처 투자 유입 확대와 벤처펀드 출자자 범위 확대 등에 대한 방안도 종합 대책에 담긴다.
정부가 CVC 규제 완화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대기업의 스타트업 투자가 활성화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특히 창업 초기 단계에서 매출을 내기 어려운 딥테크 분야 스타트업이 CVC의 투자를 받으며 해외 진출에 속도를 낼 수 있을 것으로 관측된다. 국내 로봇 스타트업 창업자는 “일반 벤처캐피털(VC)보다는 CVC 투자를 더욱 선호하는 편”이라며 “대기업과의 협력을 통해 안정적으로 제품 수주를 받을 수 있고 해외 동반 진출도 노려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재무적 투자 위주의 일반 VC와 달리 전략적 협력 관계 구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투자 업계에서는 대기업의 스타트업 지원과 인수합병(M&A) 활성화 차원에서 CVC 규제 완화가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중기부에 따르면 국내 전체 벤처 투자액 중 CVC가 차지하는 비중은 2022년 22%에서 지난해 19%로 3%포인트 줄었다. 반면 미국의 경우 빅테크를 중심으로 하는 CVC 생태계가 전체 벤처 투자의 절반 가량을 책임진다. 수년 내로 국내 벤처 투자 시장에서 CVC 비중을 30%까지 확대한다는 것이 정부 목표다.
국내 CVC 생태계는 해외 주요국과 비교하면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 상당하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CVC가 지난해 집행한 벤처 투자액(일반 지주회사 CVC 제외)은 총 1조 9000억 원으로 전체의 19%를 차지했다. CVC 업체 수는 총 98곳으로 전체의 27%를 차지했다. 반면 미국과 일본에서는 CVC 비중이 절반에 육박한다. 벤처 투자 규모 기준 미국은 49.5%, 일본은 45.0%가 CVC로부터 나온다. 또한 일본의 CVC 수는 700곳을 넘어섰다. CB인사이츠에 따르면 전 세계 상위 10곳(투자 건수 기준)의 CVC 중 일본 기업이 5곳에 달했다.
규제 완화를 통해 선진국형 CVC 생태계가 조성되면 스타트업 인수합병(M&A) 시장도 활성화될 수 있다. 실제로 스타트업얼라이언스에 따르면 CVC로부터 투자 유치 경험이 있는 국내 스타트업의 M&A는 169건(65.8%)으로 CVC 투자가 없는 스타트업의 88건(34.2%)보다 두 배 가까이 높았다. 업계에서는 기업공개(IPO) 방식으로는 엑시트에 8년 이상의 기간이 걸리는 만큼 M&A 활성화를 위한 CVC 지원이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벤처캐피탈협회 등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스타트업 회수 중 M&A가 차지한 비율이 미국은 94.6%에 달했지만 한국은 58.1%에 그쳤다.
국내 벤처 투자 업계는 최근 단행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빅컷(0.50%포인트 금리 인하)과 함께 정책 시너지가 극대화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내년 모태펀드 출자 예산도 올해보다 460억 원 늘어난 5000억 원으로 편성됐다. 유정희 벤처기업협회 혁신정책본부장은 “올 상반기 국내 벤처 투자 시장이 다소 살아났지만 이는 워낙 좋지 않았던 지난해의 기저 효과에 따른 부분이 크다”며 “한국은행이 글로벌 기조에 따라 금리를 내리고 시중 유동성이 늘어나면 당연히 국내 벤처 시장 역시 회복세를 이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더불어민주당이 재벌 특혜라는 이유로 정부가 CVC 규제 완화 방안을 담아 추진할 공정거래법 개정안에 반대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그동안 야당은 대기업이 외부 자금을 과도하게 끌어오면 금융사 역할까지 할 수 있다는 입장을 내보였다. 지난해 정부안을 반영해 윤창현 전 국민의힘 의원이 발의한 공정거래법 개정안도 결국에는 폐기된 바 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