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일부 마니아층을 중심으로 유통되던 미국 수제 퍼터 브랜드 TP밀스가 본격적으로 한국 시장에 진출한다. 퍼터를 전문 취급하던 이종성 대표, 그리고 골프 마케팅과 영업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백영길 대표가 손을 맞잡고 올해 1월 TP밀스 코리아를 설립했다.
2011년부터 TP밀스 퍼터를 조금씩 수입해 국내 골퍼들에게 소개해왔던 이 대표가 지난해 말부터 백 대표와 함께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다 아예 TP밀스 코리아를 설립하기로 의기투합한 것이다. 이 대표가 미국 본사와의 제품 개발, 커뮤니케이션 등 해외 파트를 맡고 백 대표가 국내 파트를 총괄한다.
여러 수제 퍼터 중에서 TP밀스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이 대표는 “저희만의 몇 가지 기준이 있었다. 장인이 직접 만들고, 역사가 길면서 약간 잊힌 브랜드를 원했는데 그 중 TP밀스가 가장 낫다는 판단이 들었다”고 했다.
약간 ‘잊힌 브랜드’라니 이건 무슨 의미를 담고 있을까. 백 대표가 설명했다. “저희가 막대한 자본을 가진 회사는 아니잖아요. 현재 정점을 찍고 있는 브랜드의 경우엔 단순히 수입해 판매할 수는 있어도 저희가 움직일 수 있는 폭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어요. 그와 달리 살짝 잊힌 브랜드라면 얘기가 달라지죠. ‘우리와 협업해 침체된 분위기를 바꾸고 더욱 키우면 어떨까’라고 제안할 수 있는 거죠. 역사를 가진 브랜드는 쉽게 주저앉지 않아요. 잠시 정체돼 있을 뿐 언젠가 다시 일어설 저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죠. 그게 바로 TP밀스였어요.”
▲아이젠하워, 포드, 닉슨이 애용한 수제 퍼터
TP밀스는 창립자인 트루엣 P 밀스(Truett P Mills)의 이름에서 따온 브랜드다. 밀스는 군에서 항공기 엔지니어로 근무하다 전역 후 우편배달 일을 했다. 열렬한 골퍼였던 밀스는 우편배달을 마친 뒤 자신의 차고에서 취미로 퍼터를 만들기 시작하다 1963년 TP밀스를 창립했다. 지역 골퍼들과 유명인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그의 퍼터는 아널드 파머, 리 트레비노 등 골프계 위대한 선수들 손에 들어가면서 수많은 대회에서 영광의 순간을 함께했다.
역대 미국 대통령 중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제럴드 포드, 리처드 닉슨, 로널드 레이건, 조지 W 부시 등이 애용해 한때 ‘대통령의 퍼터’라고도 불렸다. 벤 크렌쇼는 TP밀스에 대해 “퍼터가 아니라 작품”이라고 했을 만큼 예술성도 뛰어나다. 현재는 아들인 데이비드 밀스가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TP밀스의 가장 큰 장점은 혁신과 기술을 브랜드의 최고 가치로 여기는 철학이다. 1960년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우드와 아이언, 퍼터에 이르기까지 한 종류의 샤프트로 길이만 조정해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TP밀스가 퍼터 전용 샤프트를 적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정확한 무게중심과 스위트 스폿 지점을 표시하거나 로프트와 라이각 조절뿐만 아니라 다양한 플랜지 디자인 적용 등이 TP밀스가 주도한 혁신들이다. 장인정신으로 본인이 직접 제작했다는 의미에서 퍼터 페이스에 이름을 새겨 넣은 것도 TP밀스가 최초다.
이 대표는 “TP밀스에는 지금까지도 가장 우수한 제품을 만들고자 했던 창업자의 정신이 바탕에 깔려 있다”며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수제 퍼터라는 자부심도 대단하다”고 했다. 이어 “60년 이상 작업을 거치면서 축적된 이상적인 밸런스 포지션에 대한 수치를 바탕으로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핸드메이드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골프백, 모자, 헤드 커버 등 액세서리로 영역 확대
역사와 전통이 있더라도 과거의 영광만으로 브랜드를 다시 띄운다는 건 쉽지 않은 일. 그러나 약 20년 동안 골프계에서 마케팅과 영업을 전문으로 해온 백 대표는 “그게 바로 제가 가장 잘하는 일”이라며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사이즈가 커지려면 대형 유통 채널과의 협업이 중요하다는 판단 아래 국내 최대 규모인 골프존마켓에 곧바로 입점하는 등 판매처 확대에 시동을 걸었다. 제품 홍보를 위해 탁월한 예능 감각을 지닌 프로골퍼 공태현과 이미 계약을 마쳤고 다른 선수들과의 후원 계약도 물색 중이다.
TP밀스 미국 본사도 적극 나서도 있다. 제품 디자인이나 개발 때 한국 측 요청 사항을 적극 반영하고 있는 분위기다. 미국과 한국 양측이 가장 기대하고 있는 분야는 새롭게 시작하는 액세서리다. 퍼터뿐만 아니라 골프백, 모자, 헤드 커버, 네임 태그, 티 세트 등 다양한 상품을 출시할 예정인데, 이건 미국 본사가 아닌 TP밀스 코리아가 맡기로 했다.
백 대표는 “우리가 TP밀스 브랜드를 활용한 다양한 상품을 만들어 해외에 수출하는 형태가 될 것”이라며 “미국 본사에서는 본인들이 못했던 부분을 한국에서 해준다고 하니 기대가 이만저만 큰 게 아니다”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퍼터 유통하다 제작까지 도전…골드파이브도 론칭
이 대표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수제 퍼터 전문가다. 1997년 골프계에 발을 들인 그는 2011년부터 퍼터 유통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2017년에는 롯데 에비뉴엘 잠실점에 국내 최초의 명품 퍼터 편집숍 ‘퍼터갤러리’를 냈다. TP밀스, 베티나르디, 피레티, 야마다, 바이런모건, 타이슨램 등 웬만한 전 세계 명품 퍼터를 모두 취급한다.
이 대표는 수제 퍼터에 대해 “골프 컬렉터의 종착점”이라고 했다. “500만 원짜리 드라이버가 있다고 하면 골퍼들은 구매를 망설이는 게 보통이에요. 하지만 500만 원짜리 퍼터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구매 저항이 작아요. 왜냐하면 퍼터는 골프클럽 중에서 디자인이 가장 독특하고 화려하거든요. 희소가치가 크고 예술 가치가 충분한 제품들도 많고요.”
이 대표가 퍼터에 매진한 이유는 전략적인 측면도 있다. 그는 “메이저 브랜드들은 드라이버나 아이언에 중점을 두고 경쟁도 심하다. 이에 비해 퍼터는 경쟁이 조금 덜하고 자신만의 색깔만 갖고 있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봤다. 다른 클럽에 비해 부피가 작아 큰 창고가 필요 없다는 점도 퍼터에 집중하게 된 계기”라며 웃었다.
이 대표는 퍼터갤러리를 운영하면서 ‘골드파이브’라는 자체 브랜드도 가지고 있다. 현재 경기 안산에 자체 수제 퍼터 생산 시설을 보유하고 있다. 미국과 일본의 여러 브랜드 공장을 다니면서 “나도 제작에 도전해 보고 싶다”는 포부가 생겼다고 했다. 밀링 등 퍼터 제작 전문가를 고용하더라도 우선 자신이 관련 지식을 쌓아야겠다는 생각에 2년 동안 직업훈련 학원을 다니며 설계와 가공 등에 대해 익혔다.
“그렇게 2년 정도 준비한 뒤 그동안 모은 돈을 몽땅 쏟아 2020년에 안산 공장에 설비를 갖추기 시작했어요. 그 뒤 또다시 2년 동안 제품 개발에 몰두했고요. 퍼터 헤드 하나 가공에 들어가는 쇠가 보통 600g인데 2년 동안 7~8톤을 깎았어요. 그랬더니 괜찮은 제품이 나오더군요. 지금은 전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퍼터를 만든다고 자부해요.”
기자가 안산 공장을 방문했을 때도 내부에는 쇠를 깎는 CNC(컴퓨터수치제어) 밀링 머신이 쉼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 대표는 “미국에서 사용하는 고가의 장비를 그대로 들여왔다”며 “X, Y, Z의 3축으로 움직이며 쇠를 정밀하게 가공한다”고 했다. 밀링 머신 옆의 커다란 통에는 헤드를 깎고 남은 쇠들이 나무 대팻밥처럼 동그랗게 말린 모양으로 수북이 쌓여 있었다.
TP밀스 미국 본사도 이 대표의 퍼터 제작과 안목을 높이 사고 있다. 그동안 제작 관련 노하우도 아낌없이 전수해 줬고, 이제는 서로 제품 개발에 관한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관계가 됐다.
▲“퍼터에도 커스텀 오더 시장 도래할 것”
이 대표는 지난해에는 패스트 피팅 키트를 개발해 선보였다. 헤드 디자인, 네크 스타일, 로프트, 라이각, 무게가 각 3가지 있는데, 간단한 테스트를 통해 총 243가지 퍼터 옵션 중 최적의 제품을 빠르게 찾아준다. 기자도 패스트 피팅 키트로 약 5분간 테스트한 결과 조준할 때 타깃보다 항상 왼쪽을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백 대표는 “그런 오류를 보완해 줄 수 있는 적절한 라이각의 퍼터를 사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TP밀스 코리아는 패스트 피팅 키트를 활용해 퍼터 시장에도 커스텀 오더 바람을 불러일으킬 계획이다. 백 대표는 이렇게 전망했다. “드라이버의 경우 6~7년 전만 하더라도 커스텀 오더가 낯설었습니다. 샤프트를 바꿔 끼우고, 호젤 위치를 바꾸는 건 투어밴이나 퍼포먼스 센터에서나 할 수 있는 거라고 여겼죠. 하지만 지금은 빠르게 개인화가 되고 있어요. 퍼터에도 반드시 그런 시장이 올 거라고 확신합니다. 간단한 피팅 과정만 거치면 골퍼에게 가장 적합한 퍼터를 추천해 주거나 제작해 줄 수 있어요. 저희는 이미 그런 기반을 갖춘 만큼 그 시장을 주도할 겁니다.”
▲9개 점으로 이뤄진 십자가
TP밀스의 로고는 9개의 점으로 이뤄진 십자가 모양의 ‘크로스드 도트(Crossed Dots)’다. 모든 퍼터 페이스에는 이 문양이 찍혀 있는데, 그저 장식이나 멋으로 새긴 것이 아니라 스위트 스폿의 위치를 표시한 것이다. 완벽한 밸런스와 더불어 스위트 스폿을 표시함으로써 정확한 퍼팅을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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