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2월 인텔의 새 최고경영자(CEO)로 선임된 립부 탄이 첫 공개 석상에서 “잃어버린 인재들을 다시 확보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강조했다. 3월 말 열린 비전 콘퍼런스에서 “우리는 많은 인재들을 잃었다”며 한 말이다. 이날은 탄 CEO가 처음으로 대중에게 자신의 구상을 밝히는 자리였다. 그는 행사에 참석한 투자자들 앞에서 “우리는 혁신에서 뒤처지고 변화에 적응하는 데 너무 느렸다”면서 인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반도체 왕국’으로 불렸던 인텔은 현실에 안주하다가 시대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위기에 처했다.
우수 인재 확보는 기업 생존뿐 아니라 국가 경쟁력을 좌우한다. 지금은 치열한 인재 유치 전쟁 시대다. 인공지능(AI), 자율주행 자동차, 로봇 등 첨단 분야의 경쟁이 격화하면서 주요국들이 인재 육성과 해외 두뇌 유치에 적극 나서고 있다. 세계적으로 첨단기술 인력의 중요성은 갈수록 커지고 있는데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생산인구 감소로 수요와 공급 간 불균형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사정이 낫다는 미국의 국가과학위원회도 지난해 보고서를 통해 ‘인재가 곧 보물’이라며 인재 확보의 시급성을 강조했다. 미 국가과학위원회는 STEM(과학·기술·공학·수학) 분야 핵심 인력 유치를 위해 취업 비자를 STEM 인재에 우선 배정하는 정책까지 제안했다. 중국 역시 해외 석학 1000명을 자국으로 유치한다는 계획에 이어 ‘고급 외국인 전문가 유치 계획’을 통해 AI 인재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세계를 놀라게 한 중국의 생성형 AI 딥시크도 결국 사람에서 비롯됐다.
우리나라 상황은 어떤가. ‘두뇌 유출(Brain drain)’은 심화되고 ‘인재 유치(Brain gain)’는 지지부진한 게 현주소다. 2015년 오영호 당시 한국공학한림원장은 “선진국은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고급 인력 유치 정책을 펼치고 있다”며 “한국도 해외에서 창의적 인재를 영입할 수 있는 ‘브레인 게인’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하지만 오 원장의 호소 후 10년이 흘렀는데도 해외 두뇌 유치는커녕 국내 인재마저 외국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2013년부터 2022년까지 10년 동안 약 34만 명의 이공계 인재들이 한국을 떠났다. 매년 3만 명이 넘는 우수 인력이 탈(脫)한국 비행기에 오른 것이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에 따르면 한국의 두뇌유출지수는 2021년 24위(5.28)에서 2023년 36위(4.66)로 추락했다. 해당 지수가 0에 가까울수록 인재가 외국으로 더 많이 나간다는 뜻이다. 최근에는 국가 석학들까지 정년 후 국내 연구처를 찾지 못해 중국행을 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대로 가면 ‘인재 공동화 현상’이 심화할 수밖에 없다. 핵심 인재 부재는 당장 산업 위기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기술력 격차에 따른 국가 경쟁력 약화를 초래하게 된다.
6·3 대선에 출마한 주요 정당 후보들도 AI에 방점을 둔 인재양성 공약을 내놓았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AI 투자 100조 원 시대’를 제시하며 AI 시대를 주도할 미래 인재양성 교육 강화를 약속했다. 지역별 거점 대학에 AI 단과대학을 설립해 석박사급 전문 인재를 육성한다는 것이다.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는 AI 인재 20만 명 양성을 공약했다. AI 대학원과 소프트웨어 중심 대학의 정원을 늘려 AI 청년 인재를 키우겠다는 구상이다. 하지만 글로벌 기술 패권 전쟁에서 살아남으려면 국내 인재육성만으로는 부족하다.
해외 인재들을 영입하고 그들의 정착을 유도할 수 있는 매력적인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좋은 연구·일자리 환경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민·비자 정책만 확대한다고 우수 인력을 영입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설사 한국에 오더라도 정주 여건 등 생활 환경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본국으로 돌아가거나 다른 나라로 떠나버릴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누가 당선되더라도 새 대통령은 국내 인재육성을 넘어 해외 최고 두뇌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종합 대책을 조속히 마련해 실행해야 한다. 해외로 나간 우리 인재들이 다시 돌아오도록 국가 차원의 프로젝트도 추진해야 한다. 인재 확보는 글로벌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 생존 조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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