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절이 여러 개 달린 하얀 로봇 팔이 유연하게 움직이며 종이 위로 붓을 놀린다. 붓 끝에 물감을 찍어 세밀하게 선을 그어간다. 28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 영빈관에서 열린 ‘서울포럼 2025’의 특별 포럼 ‘픽셀 앤 페인트(PIXEL & PAINT)’에서는 오혜진 미국 카네기멜런대 로보틱스학과 교수가 개발한 인공지능(AI) 화가 ‘프리다(FRIDA)’가 등장해 작품을 그려가는 장면이 연출됐다. 이날 프리다가 선택한 그림의 장르는 초상화다. 프리다는 한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이날 축사와 기조 대담 등을 위해 연단에 올랐던 김상훈 한국예술경영학회 회장과 용호성 문화체육관광부 제1차관, 미국 국립인문재단(NEH) 선임 고문을 지낸 사진작가 빈센트 리카델 등의 얼굴을 실시간으로 완성했다. 꼭 닮은 초상화를 본 청중석에서는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프리다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오 교수는 왜 로봇공학자가 예술을 하는지, 왜 예술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나눴다. 오 교수는 “예술이라는 장르가 로봇을 연구하기에 너무 좋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로봇 연구에서 중요한 것은 실제 현실과 로봇에 명령이 내려지는 가상현실(시뮬레이션)의 간극을 줄여가는 것”이라며 “프리다는 생성형 AI처럼 이미지를 온라인에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페인팅을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예술의 핵심은 표현이고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공유한다면 누구나 예술가라고 생각한다”며 “로봇과 사람이 소통해 더 많은 예술을 할 수 있다면 디지털과 실제 세계가 진짜 연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어진 패널 토론에서는 ‘기술을 이용한 예술 장르의 확장’을 주제로 AI 예술의 미래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신혜린 고려대 교수가 좌장을 맡아 토론을 이끌고 ‘서울포럼 2025’에 AI 기술 기반의 대형 조각 ‘히페리온의 속도’를 설치해 주목받은 노진아 작가(경희대 교수)와 싱가포르 대체불가토큰(NFT) 아트 전문 기관 코뮤지엄의 설립자 차우 웨이 양이 참여했다.
패널들은 AI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AI가 예술가를 대체하리라는 두려움과 기술이 예술을 더 진화시킬 것이라는 기대감이 공존하고 있다고 짚었다. 노 작가는 “입시 미술을 하는 학생들의 경우 10여 년간 사물을 똑같이 따라 그리기 위해 시간을 쏟는데 AI의 등장과 함께 지난 노력이 단숨에 쓸모없어진 셈”이라며 “생산성 등 경제 논리에 빠져들 경우 AI가 내 자리를 빼앗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인간이 하기 나름”이라는 결론에 대체로 동의했다. 웨이 양은 “언제나 새로운 기술의 등장은 우리에게 새로운 것을 개척하게 했고 그건 보통 과거보다 더 나은 방식으로 유도되고는 했다”면서 “사진 기술이 나오며 미술 시장이 흔들렸지만 작가 고유의 시선을 중시한 인상파가 등장하며 시장은 오히려 더욱 성장했던 것이 좋은 사례”라고 말했다.
패널들은 특히 AI 시대에 예술의 중요성,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예술의 의미는 더 커질 것으로 내다봤다. 오 교수는 “예술이 단순히 보기 좋고 예쁜 것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우리가 경험하는 사회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소통하는 것 역시 중요한 예술의 하나인데, 이것이 없어질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물론 AI가 만든 예술이 인기를 끌 수는 있겠지만 ‘AI 아트’처럼 새로운 카테고리가 생기는 것이지 예술의 모든 영역을 다 차지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노 작가 역시 “AI가 아무리 인간의 예술과 표현을 학습해도 인간만의 새로운 시각으로 만들어낸 것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AI 예술을 둘러싼 가장 논쟁적인 주제 중 하나인 소유권과 저작권 등에 대한 논의도 이어졌다. 웨이 양은 “대부분 예술이 기존의 많은 작품에서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고 있기에 소유권 논의는 복잡한 문제”라면서도 “기술 개발이 예술의 출처를 지금보다 더 정확하게 추적하게 하고 그 결과 더 많은 사람들이 권한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NFT 기술을 활용해 예술품을 공동 소유하는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오 교수 역시 “현재는 모든 것들이 너무 빨라 규제와 규칙도 없이 기술만 먼저 달려가는 상황”이라며 “출처 등을 해결해 진짜 기여자들에게 보상을 돌려주는 문화가 자리 잡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