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이 해시드오픈리서치 대표로 있을 때다. 총량규제를 통한 가계부채 관리가 적절한지에 대한 질문에 그는 “가계부채가 늘어난 근본적 원인을 봐야 한다”고 답했다. 김 실장은 가계부채 급증 뒤에는 나랏빚이 크게 늘지 않은 점이 있다고 봤다. 정부가 국가부채를 적절히 사용해 혁신 기술을 지원하고 복지 체계와 소득 안전망을 구축했다면 가계가 빚을 내 근근이 삶을 꾸려나가는 일은 덜했을 것이라는 취지다. 그는 “(정책 입안자들이) 경제학 공부를 안 한다”는 말도 했다.
영국의 사회학자 콜린 크라우치는 가계부채 증가 현상을 ‘민간 주도 케인스주의(privatized Keynesianism)’라고 부른다. 케인지언들이 정부가 빚을 내 가계의 구매력을 유지해주는 쪽이라면 민간 주도 케인스주의에서는 가계가 이 역할을 떠맡는다. 뒤집어 보면 가계와 정부 가운데 누군가는 적정 수준의 빚을 져야 유효수요를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도 비슷한 사례가 존재한다. 외환위기 이후 김대중 정부가 내수 부양을 위해 신용카드 발급을 장려했던 일, 은행이 기업대출로 망하자 부동산담보대출을 비롯한 가계대출의 문턱을 대폭 낮춰준 것 등이다.
신용카드를 통한 경기 부양은 수백만 명의 신용불량자를 낳으면서 일단락됐다. 가계대출은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내용이 간단치 않다. 한국 사회에서 가계대출은 기원이 입체적이고 복합적이다. 부동산 가격과 경기를 떠받치기 위한 도구일 뿐 아니라 자산 증식과 노후 대비의 핵심 수단이기 때문이다. 정부의 부족한 복지를 아파트가 대신해준 측면이 있다. 책 ‘한국 복지자본주의의 역사’를 쓴 김도균 교수는 이 같은 상황을 ‘자산기반복지’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실제로 노무현 정부 이후 급격히 커지기 시작한 강남과 강북, 서울과 지방의 주택 가격 격차는 새로운 상류층을 만들어냈다. 감당하기 어려운 빚을 지더라도 어느 지역의 어떤 아파트를 매입했느냐에 따라 한 가정의 소득과 자산·계급이 달라졌다. 이 과정에서 가계대출은 한 단계 도약을 위한 사다리가 됐다. 당국이 부동산 가격을 잡겠다며 가계대출을 옥죄면 “현금 부자만 돈 벌게 하겠다는 것이냐”는 불만이 쏟아지는 배경이다.
이재명 정부는 그래서인지 재정의 역할을 강조한다. 턱밑까지 차오른 가계부채와 끝없이 추락하는 잠재성장률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부족한 사회 안전망 구축에도 정부가 제 몫을 할 필요가 있다는 논리다. 마침 글로벌 관세전쟁에 올해 한국의 성장률은 0%대가 예상된다.
다만 재정에는 한계가 있다. 기축통화국인 미국도 예외는 아니다.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지난달 나랏빚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미국의 신용등급을 한 단계 끌어내렸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오락가락 관세정책에 30년 만기 국채금리는 한때 연 5%를 돌파했다. 영국의 리즈 트러스 총리는 2022년 설익은 감세 정책을 추진했다가 국채금리가 폭등해 취임 44일 만에 물러났다.
지속 불가능한 가계부채와 경기 침체,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을 고려하면 재정의 역할을 늘려나가야 한다는 방향성에 동의한다. 관건은 그 정도다. 과도한 가계부채 의존이 지금의 기괴한 구조를 만들었듯 지나친 정부 의존은 또 다른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부채 로드맵이다. 향후 10년을 넘어 30년·50년의 장기 밑그림이 있어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은 올 4월 “재정이 어려운 건 사실이지만 증세나 감세 여부는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증세 없는 재정 확대라면 한국 경제가 얼마나 감당할 수 있는지 보여줘야 한다. 진보 정부의 과소추계나 보수 정권의 과다추정이 아닌 제대로 된 숫자와 데이터가 필요하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올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일반 정부 부채비율은 54.5%로 미국(122.5%), 독일(65.4%)보다 낮고 호주(50.9%), 뉴질랜드(55.3%)와 엇비슷하다. 이 대통령의 실용주의가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가계든, 정부든 부채 전망부터 서두르는 것이 첫 번째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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