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에게 인간이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는 ‘호모 소스트라다니에(연민하는 인간)’라고 답했을 겁니다.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타인에 대한 사랑과 공감을 강조한 그의 작품들은 지금 이 시대에 꼭 읽어야 할 필독서입니다.”
러시아 문학 전문가 김정아 번역가는 도스토옙스키의 4대 장편을 단독으로 완역하고 7일 출간 간담회를 통해 그간의 소회와 도스토옙스키의 문학 세계에 대해 밝혔다.
10년에 걸친 이른바 ‘마라톤 번역’은 2014년 김 번역가가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편역하며 시작됐다. 당시 박영률 지식을만드는지식(지만지) 대표는 김 번역가가 도스토옙스키 문학에 일생을 바칠 사람임을 직감하고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건넸다.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4대 장편을 단독으로 번역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도스토옙스키를 국내 독자에게 제대로 알리고 싶었던 김 번역가는 단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출간 마감 기한을 두지 말아 달라.” 출판사가 수락하자 김 번역가는 그날부터 번역 작업에 돌입했다. 이후 2~3년 간격으로 한 권씩 출간됐으며 이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끝으로 대장정의 마침표를 찍었다.
김 번역가는 “10년 동안 번역 작업을 통해 도스토옙스키와 영혼의 탯줄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그가 세 살배기 아들을 간질 발작으로 하루아침에 잃었을 때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같이 느꼈다”고 말했다. 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는 도스토옙스키의 고통과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 연민 등 그의 문학이 집대성돼 있다”며 “한 권을 읽는 다면 이 책을 권한다”고 덧붙였다.
김 번역가가 도스토옙스키를 처음 접한 것은 18세 때 읽은 ‘죄와 벌’이었다. 강한 충격과 감동을 받은 그는 서울대 노어노문학과에 진학해 학사와 석사 과정을 마친 뒤 미국 일리노이주립대에서 슬라브 문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김 번역가는 스스로를 ‘도 선생’ 전도사라 소개한다. 도스토옙스키는 극빈의 삶 속에서 생계를 위해 글을 써야 했던 작가였다. 그는 4년간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수용소 생활을 하며 짐승 같은 조건 속에서 온갖 군상들을 경험했지만 끝내 인간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았다. 이런 이유에서 김 번역가는 “요즘 같은 시대야말로 도스토옙스키를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도스토옙스키는 내 인생의 나침반 같은 존재”라며 “사랑하는 이가 원하는 사람이 되고 싶듯 나도 도스토옙스키가 좋아할 만한 사람이 되고 싶어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김 번역가는 명품 브랜드 십여 개를 한국에 도입한 패션 기업 스페이스 눌의 사장이자 세 자녀의 엄마이기도 하다. 바쁜 와중에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드문 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 단독 완역이라는 대업을 끝냈수 있었던데는 문학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 “오후 8시에 잠들어 오전 1시~3시에 일어나 매일 3시간 이상 번역에 매진했습니다. 처음엔 영혼의 스파크를, 나중에 영혼의 합선을 느낄 정도로 몰두했어요.”
번역 수준에 대한 자신감도 드러냈다. 김 번역가는 “마감에 쫓기지 않고 한 문장 한 문장 정성 들여 작업한 번역은 기존 번역과 분명한 차이가 있다”며 “감히 말하건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성실한 번역”이라고 말했다. 작가의 삶의 궤적과 사회·경제적 배경까지 충분히 이해한 뒤에야 가능한 번역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출판사는 ‘100년을 가는 번역’을 목표로 각 작품마다 고급 가죽 장정의 한정판을 제작하고 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24K 금박 장식이 더해진 300부 한정판으로 출간됐다. 앞서 각 100~150부 한정판으로 제작된 ‘죄와 벌’ ‘백치’ ‘악령’은 출간 한 두 달만에 완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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