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사업 준비를 하고 왔습니다.”
이재용 삼성전자(005930) 회장이 15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17일간의 미국 출장 후 전한 이 발언은 한동안 삼성전자 위기에 대한 우려를 끝내고 미래 사업에 대한 이 회장의 자신감을 표현한 것으로 읽힌다. 최근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난 뒤 이어진 이 회장의 장기 해외 출장을 통해 삼성의 경영 시계도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
과거 사례를 보면 이 회장이 공식적으로 내뱉은 발언은 당시 삼성전자가 마주친 현실을 그대로 표현해왔다. 이 회장은 지난해 6월 글로벌 빅테크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들과 회동한 뒤 귀국하는 자리에서 “열심히 해야죠”라며 삼성전자를 둘러싼 경영 환경이 녹록지 않다는 점을 알렸고 같은 해 5월 “봄이 왔다”고 표현한 2분기에 삼성전자는 영업이익 10조 4400억 원의 호실적을 기록했다. 하지만 발언이 바뀐 3분기에는 영업이익이 9조 1800억 원으로 줄기 시작했고 올해 2분기에는 4조 6800억 원까지 축소됐다.
그런데 이 회장이 연말까지 넉 달이 남은 시점에 내년 사업에 대한 준비를 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말을 극도로 아끼는 이 회장의 성격을 고려하면 ‘준비를 하고 왔다’는 발언의 속내는 내년 사업 구상의 틀을 마련했다고 읽힌다. 자신감 넘치는 얼굴도 이런 해석에 힘을 싣고 있다. 이 때문에 업계에서는 최근 테슬라·애플과 대규모 공급계약을 연달아 체결한 삼성전자가 파운드리 부문에서 추가 성과가 있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이 회장이 이번 출장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CEO 등 미국 주요 테크 기업 경영자들을 만났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이 회장은 2018년 경영 일선에 복귀한 직후 유럽과 캐나다·중국·일본·인도·베트남 등을 잇달아 방문하면서 주요 인사들과 회동을 했고 이는 2019년 4월 삼성전자의 ‘2030 시스템 반도체 비전’으로 이어졌다. 삼성전자는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 분야 연구개발 및 생산시설 확충에 133조 원을 투자하고 전문인력 1만 5000명을 채용한다”고 발표했다. 이 회장의 비전은 지난달 22조 7000억 원 규모의 테슬라의 차세대 AI칩 AI6, 연간 2억 대가 넘게 팔리는 애플의 아이폰에 들어갈 이미지 센서 위탁 생산 계약을 체결하면서 빛을 발했다.
이 때문에 이번 장기 출장 이후 삼성전자의 경영 시계도 빠르게 움직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우선 삼성전자가 14일 최근 실적에 가장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서 SK하이닉스(000660)에 반격을 예고한 만큼 이 분야에 대한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삼성전자의 HBM 반격 선언이 이 회장이 지난해 5월 HBM 제조에 필요한 반도체 극자외선(EUV) 공정의 핵심 장비·부품 업체인 네덜란드 ASML과 독일 자이스 경영진과 회동한 후 시작된 것인 만큼 이번 출장 역시 변곡점이 될 수 있다.
이 회장의 해외 장기 출장을 계기로 삼성전자가 휴머노이드 로봇, 모빌리티 등 피지컬 인공지능(AI)과 스마트홈 시대를 대비해 대규모 인수합병(M&A)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삼성전자는 올해 독일 플랙트그룹(15억 유로, 약 2조 4000억 원)을 인수하며 영토 확장을 재개하고 있다.
24일부터 시작되는 한미 정상회담의 방미사절단에 이 회장이 동행하는 만큼 미국 내 투자는 물론 출장 기간 구체화한 한미 공급망 협력 강화 방안도 공개할 것으로 보인다. 또 미국의 조선업 부흥 프로젝트 ‘마스가(MASGA)’에서 한 발 떨어져 있는 삼성중공업에 대한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게 미국 정부와의 추가 협력 방안도 추진할 것으로 관측된다. 아울러 이번 장기 출장에서 미래 사업 비전을 구상한 이 회장이 미래전략실 부활 등 조직 개편을 서두를 가능성도 점쳐진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사법 리스크가 해소된 후 경영 행보가 빨라진 만큼 삼성 특유의 속도전을 펼칠 가능성이 커 보인다”며 “당장 한미 정상회담에서 발표될 대미 투자가 이 회장의 삼성전자가 앞으로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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