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을 외국에 의존하지 않고 자국 내에서 개발하고 운영하는 ‘소버린(주권) AI’ 확보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한국 정부는 ‘자체 파운데이션 AI 모델 구축 사업’에 참여할 기업 5곳을 선정하며 소버린 AI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한국만의 움직임이 아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올해 6월 “AI 인프라 구축은 디지털 주권을 위한 싸움”이라고 말했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지난해 2월 “모든 나라는 자신만의 AI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글로벌 시장 조사 기관 가트너는 소버린 AI가 ‘가트너 하이프 사이클’ 상에 정점 근처에 있는 것으로 봤다. 소버린 AI에 대한 기대치가 최고조에 있다는 의미다.
반면 기술 우위 상태인 미국과 중국은 자국 AI 영향력을 강화하려고 힘을 쏟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최근 ‘AI 액션 플랜(Action Plan)’을 공개했다. AI 모델 등 소프트웨어부터 반도체와 서버 같은 하드웨어까지 AI 기술 전반을 동맹국에 수출하겠다는 전략이다. 동맹국을 중심으로 AI 주도권을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중국은 ‘글로벌 AI 협력 기구’를 내세웠다. 세계 AI 확산 역할을 담당하겠다는 입장이다.
전략자산 ‘AI’ 외국에 의존…국가경쟁력 흔들릴 우려
세계 각국이 미국과 중국의 AI를 활용하는 대신 소버린 AI를 앞세우는 주요 이유는 전략 자산으로 부상한 AI에 대한 통제권을 지키기 위해서다. AI는 산업 전반에 투입돼 생산성을 높이는 동시에 군사 체계에도 활용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러한 핵심 기술을 해외에 의존한다면 장기적으로 국가 경쟁력 약화라는 구조적 위험에 직면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광형 한국과학기술원(KAIST) 총장은 “소버린 AI를 두고 논란이 있지만, 과연 교육과 국방 분야 AI를 다른 나라에서 할 수 있겠느냐”며 “기존 대규모 언어 모델(LLM)과 싸울 수는 없더라도 교육, 건강, 역사, 국방, 제조, 제약 분야에서만은 AI 기초 모델이 필요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국제적인 연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보 통제권 약해져 안보 위협 가능성
정보 유출 가능성도 있다. 해외 기업의 모델을 쓰면 학습 데이터나 서비스 이용 과정에서 민감한 정보가 해외로 빠져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방위산업, 에너지, 통신 등 주요 데이터까지 유출돼 국가 안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데이터가 해외 서버에 저장되면 해당국의 법률·규제에 종속되기 때문에 한국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된다. 하정우 대통령실 AI미래기획수석은 2023년 네이버클라우드 재직 시절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데이터 주권을 송두리째 흔들 의제인 플러그인 생태계와 각 국가언어 중심의 경쟁력 있는 자체 초거대 AI가 없다면 기술 종속국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실제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8년 서명한 ‘클라우드 액트’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테러·사이버 범죄 위험 등 안보상 이유가 있다고 판단하면 미국 빅테크가 해외에 설치한 서버에 저장된 정보까지 볼 수 있다. 중국 정부도 자국 기업에 유사한 요청을 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중국 국가정보법 제7조에 따르면 ‘모든 조직과 국민은 모두 법에 따라 국가정보업무를 지지·협조·호응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부 유출 가능성도…"핵개발 준하는 전략 영역"
국부 유출을 우려하는 분석도 제기된다. 해외 AI에 의존하면 사용료가 해외 기업으로 흘러간다. 모델 업그레이드, 유지 보수 등 부대 비용이 더해져 부담이 더욱 커질 수 있다. AI가 사회 핵심 인프라로 자리 잡을수록 국가 경제가 타국에 종속될 위험이 커진다는 우려다.
성낙호 네이버클라우드 하이퍼클로바 기술총괄은 “AI는 핵개발에 준하는 전략 영역으로 갈 것”이라며 “GDP의 7~20%가 AI 트래픽에 소모될 수 있다는 전망도 있는 만큼 내재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 총괄은 “지금이 미국과 중국이 규제를 완화하고 있어서 소버린 AI를 만들 수 있는 ‘골든타임’”이라며 “데이터와 반도체, 전력까지 만들 수 있는 나라에서 기회를 포기해선 안 된다”고 전했다.
오픈소스 모델도 외국 기업 선의에 의존해야
오픈소스 AI 모델에 전적으로 기대는 것도 위험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초기에는 무료로 공개되더라도 기업의 전략 변화나 규제 대응 등을 이유로 비공개 전환이나 유료화가 이뤄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오픈AI는 2019년 'GPT-2' 이후 6년간 AI 모델을 오픈소스로 공개하지 않았다. 유지·보수와 성능 개선도 특정 기업이나 개발자 커뮤니티 의지에 좌우될 수 있어 장기간 활용하기에 불확실성이 있다. 아울러 오픈소스 AI 모델을 배포하는 기업은 대다수 미국과 중국 기업인 만큼, 해당국의 정책 변화에 따라 기술 표준이나 라이선스 조건이 바뀌면 국가 AI 전략이 흔들릴 수 있다.
문화적 종속 우려도 나와
외국산 AI는 문화 종속을 심화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각국의 고유한 언어와 문화적 맥락을 반영하지 못해 글로벌 표준을 따르는 경향이 강해서다. 이 때문에 자국의 정체성과 문화적 주권을 지키려면 소버린 AI가 필수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경제적 잠재력을 누리면서도 자국 문화를 보호하려면 자체 AI 인프라 구축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이해진 네이버 이사회 의장은 지난해 5월 ‘AI 서울 정상회의’에서 “다양한 시각들이 보여지고 각 지역의 문화적, 환경적 맥락을 이해하는 다양한 AI 모델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재명 정부, 양성 약속…규제 완화·적극 지원 필요
한국도 강력한 AI 산업 육성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정부의 AI 정책 구상과 실행을 이끌 초대 대통령실 AI미래기획수석으로 하정우 전 네이버클라우드 AI혁신센터장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에 배경훈 전 LG AI연구원장을 임명했다.
세계적 수준의 독자적인 AI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을 위해 컴퓨팅 자원, 데이터셋, 인력 등을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정부는 선발된 정예팀에 지난 1차 추가경정예산으로 확보한 GPU 1만 장 사용을 지원한다. 정부 구매분이 국내에 도입되기 전에는 민간 보유 GPU를 빌려 쓰도록 하는데 팀당 GPU 500장으로 시작해 1000장 이상으로 지원 규모를 확대한다. 데이터의 경우 정예 팀들이 저작물 데이터를 공동 구매하며 각 팀의 데이터 구축·가공 비용을 연간 30억∼50억 원가량 지원한다.
이재명 대통령의 15일 국민임명식에 김성훈 업스테이지 대표, 김유원 네이버클라우드 대표, 유영상 SK텔레콤 대표, 이연수 NC AI 대표, 임우형 LG경영개발원 AI연구원장 등 AI 파운데이션 모델 사업자가 초청받았다. 이 대표는 ‘국민 대표’를 대표해 이 대통령에게 임명장을 전달하기도 했다.
다만 정부가 한국 AI 산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규제를 풀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데이터 관련 불필요한 규제 환경을 정비하고 우수한 AI 인재를 확보하기 위한 강력한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울러 AI 인프라 조성을 위해 불필요한 규제를 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온라인플랫폼규제법’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온플법이 시행되면 AI 개발에 전력 투구 중인 네이버·카카오가 이 법의 규제 대상에 포함되며 이들 기업의 혁신이 위축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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