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무차별 고율 관세로 세계무역기구(WTO) 체제가 사실상 붕괴하고 있는 가운데 글로벌 경제 석학들이 지속 성장을 위해 기업의 역동성 회복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WTO가 더 이상 글로벌 공정 무역의 보증이 되지 못하는 시대에 개별 기업이 혁신을 도모해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국가 생존도 담보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 같은 분석은 경제학계의 ‘올림픽’으로 불리는 세계경제학자대회(ESWC)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미국발 관세 리스크로 세계경제가 거대한 변곡점을 맞는 상황에서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에 주는 시사점이 크다는 평가다.
18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ESWC 첫날 국내외 경제 석학들은 불확실성을 극복하기 위한 최고 전략은 민간기업 성장이라고 입을 모았다. 또 기업 성장을 이끌어내려면 단순한 보조금보다는 혁신의 기반이 되는 연구개발(R&D) 등의 지원이 우선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윤수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와 우진희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날 “한국의 기업 진입률은 창업 보조금 지원 등으로 중국의 2배, 일본의 6배를 넘지만 초창기 기업의 성장률은 2010년 이후 급격히 감소했다”며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지만 동시에 대규모 일자리를 파괴하는 구조적 한계가 존재한다”고 밝혔다.
특히 기업 동학 모형을 활용한 정책 시뮬레이션 결과 △진입보조금 △영업보조금은 단기적으로 기업 활동을 확대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생산성 저하와 자원 배분 왜곡을 초래할 위험이 컸다. 수출 보조는 수출 비중 확대에는 효과가 있었으나 경제 전체 성장에 대한 기여는 제한적이었다.
반면 R&D 지원은 기업의 혁신 성공 확률을 높여 생산성과 기업가치를 동시에 개선했다. 특히 저성장 국면에서 산출량 증가 효과가 영업 보조보다 컸고, 단위 기업 생산성과 수출 비중 개선 효과도 가장 뚜렷했다.
이 교수는 “정책은 단순히 기업 수를 늘리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며 “생산성 중심의 질적 성장을 유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R&D 지원을 강화해 혁신 활동을 촉진하고 성장 잠재력이 높은 기업을 선별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며 “생산성이 낮은 기업의 자연스러운 퇴출을 허용하는 동시에 구조조정 과정에서 노동자를 보호하고 더 나은 일자리로 이동할 수 있는 안전망을 마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해외 석학들도 기업 성장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스티븐 이플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 교수는 “지난 25년간 산업 활동이 무형 자산 중심으로 상위 기업에 집중되는 현상이 빠르게 진행됐다”며 중위 기업도 글로벌 규범과 시장 상황에 맞춰 생존 전략을 짤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토드 렌스먼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경제학과 교수도 “R&D 지원을 집중하면 다수 기업의 전문성 축적 속도가 빨라 경제성장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진단했다.
기업 성장 지원의 중요성은 다른 연구에서도 확인됐다. 이날 이승훈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팀은 코로나19 직전 정부 지원을 받은 중소기업의 경제 충격 대응 성과를 분석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기술 지원과 내수 시장 지원을 받은 기업은 코로나19 기간 동안 생존율과 고용 유지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성과를 보였지만 창업 지원과 인력 지원은 일부 단기 효과에 그쳤다.
이 교수는 “무차별적으로 지원책을 제공하기보다 지원 유형의 조합을 전략적으로 설계하는 것이 더 큰 효과를 낸다”며 “또 지원 기관이 일원화되지 않으면 중소기업벤처부·국토교통부·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여러 기관의 지원 효과가 서로 상쇄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ESWC는 22일까지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진행된다. 지난해 노벨경제학상 공동 수상자인 제임스 로빈슨 미국 시카고대 교수부터 차기 노벨경제학상 후보로 꾸준히 언급되는 기요타키 노부히로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 신현송 국제결제은행(BIS) 수석이코노미스트 등 62개국 2500여 명의 경제학자가 참여할 예정이다.
ESWC는 세계계량경제학회가 주최하며 1965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시작된 후 5년에 한 번씩 세계 주요국에서 개최된다. 한국에서 열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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