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골프에서 그립이 없는 골프클럽은 골프채처럼 느껴지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옛날 옛적 골프채엔 그립이 없었다. 그냥 장갑 낀 손으로 노출된 나무 샤프트를 요령껏 잡고 쳤다. 장갑은 손을 보호하기 위한 용도로, 또 미끄러지지 않고 마찰이 생기도록 하는 용도로 쓰였다. 그립이 없는 대신 손가락이 놓이는 부분에 홈을 낸 퍼터도 있었다.
가죽 덧댔더니 신세계 열려
현 세대 골퍼들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스코틀랜드 양치기들은 골프 놀이를 하다가 장갑으로 잡는 부분에 뭔가 덧대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장갑이 워낙 비싼 시절이기도 했다.
인류 최초의 골프 그립은 거기서 탄생했다. 나무 채엔 가죽이 적당하다 싶어 한 번 덧대 봤는데 여간 유용하고 느낌 좋은 게 아니었다. 가죽 그립은 그때부터 선택 아닌 필수가 됐다. 마찰력이 좋아 비싼 장갑을 양손에 다 끼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한 손에만 장갑을 끼는 습관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소나 돼지의 가죽은 너무 두꺼운 데다 작은 면적에 미세하게 덧대기가 쉽지 않아 양가죽이 선호됐다.
가죽 그립 초기엔 무엇보다 접착이 중요했다. 피치, 파인타르, 왁스가 접착제로 널리 쓰였다. 피치는 석유나 석탄에서 얻는 검고 끈적한 물질. 지붕이나 배의 갑판 등에 방수재로 쓰인다. 파인타르는 소나무 추출물로 만드는 끈적끈적한 물질로 야구 경기에서 흔히 사용된다. 배트가 손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타자들이 장갑에 바른다. 문제는 이런 접착제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층이 쌓이고 더러워지기 마련이고 그러면 효과를 잃는다는 거였다. 그립이 떨어지지 않도록 작은 압정들로 고정하는 작업도 필요했다.
가죽 그립은 1925년 엘버 램킨을 통해 한 단계 도약한다. 가죽 회사에서 일하던 램킨이 시카고 교외의 자택 차고에서 프리미엄 가죽 그립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스티브 잡스가 캘리포니아의 차고에서 애플을 창업한 게 1976년인데 골프 그립 역사에 ‘차고 신화’는 그보다 50여 년 앞서 시작됐다.
램킨은 최초의 오리지널 골프 그립 제조업체다. 골프 그립에도 대량생산 시대가 열린 것이다.
가죽에서 고무 시대로
오늘날 우리 손에 착 붙는 익숙한 고무 그립은 1949년에 탄생했다. 클리블랜드의 기업가이자 발명가 토머스 L 패윅이 기존의 가죽 그립에 의문을 가졌고 대안으로 고무를 떠올렸다. 고무를 쓰면 더 견고하고 내구성 높은 그립을 만들 수 있다고 확신했다. 미국 최초의 4도어 투어링 카를 개발한 인물이 바로 패윅이다.
지역의 고무 회사와 계약해 그립 제조에 팔을 걷어붙인 패윅은 이후 아예 ‘패윅 플렉시 그립 컴퍼니’를 세우기에 이른다.
패윅의 고무 그립은 클럽 제조 과정에서부터 샤프트에 끼워져서 나오도록 체계가 갖춰졌다. 초기 상품명이 ‘골프 프라이드’였다. 전 세계 골프 그립 시장점유율 1위 업체인 바로 그 골프 프라이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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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좋고 내구성 높고 가벼운 데다 충격 흡수와 미끄럼 방지 기능도 뛰어난 고무 그립은 시장을 빠르게 장악해 나갔다.
그립 교체? 번거롭지 않아요
그립 교체가 지금처럼 일반화한 건 1953년 슬립온 그립이 개발되면서다. 슬립온은 신발끈이나 버클 없이 바로 신을 수 있는 신발. 그립도 그렇게 간편해졌다.
슬립온 그립은 모양이 갖춰져 있어 양말을 발에 쏙 넣는 것처럼 샤프트에 직접 끼울 수 있는 그립을 말한다. 오늘날 시중에서 볼 수 있는 그립은 모두 슬립온 형태다.
슬립온 그립은 클럽 제작의 소요 시간을 줄여주니 그만큼 경제성이 확보된다. 그립 교체가 골프숍의 주요 서비스가 된 것도 슬립온 시대부터다. 큰 비용 들이지 않고 빠르게 장비를 업데이트하는 방법으로 그립 교체가 각광 받기 시작한 것 역시 이때다.
클럽 제조사들은 자사 제품의 그립을 슬립온 그립으로 전면 전환하기에 이르렀고 1958년 토미 볼트가 US 오픈에서 4타 차로 우승하면서 슬립온은 그립의 표준으로 자리 잡게 됐다. 볼트의 US 오픈 제패는 슬립온 그립의 첫 메이저 우승으로 기록됐다.
고무가 좋아, 실이 좋아? 아니면 엘라스토머?
요즘의 그립은 뭘로 만들까. 고무가 일반적이지만 고무가 다는 아니다.
가장 무난한 소재는 물론 고무다. 밀착감이 좋다. 다만 마모가 상대적으로 빠르다. 제때 교체해줘야 제 기능을 기대할 수 있다.
마모가 느린 건 실(cord) 그립이다. 고무 안에 실을 넣어서 만들었다. 잘 닳지 않는 대신 딱딱한 느낌이다. 손에 땀이 많은 골퍼라면 실 그립을 쓰면 좋다. 잘 미끄러지지 않아 비 오는 날 라운드에도 안전하다.
초미립자 소재인 엘라스토머로 만든 그립도 흔히 볼 수 있다. 접지력이 고무보다 낫고 충격 흡수도 뛰어나다. 촉감이 좋고 수분과 습기, 땀이 내부로 침투하지 못한다. 그립이 딱딱해지는 경화 속도가 일반 그립의 5분의 1이라 오래 써도 처음의 부드러운 감촉이 유지된다.
다만 부드러운 만큼 내구성은 다소 떨어지는 편이다. 수명으로 따지면 실 그립이 1등이라고 보면 된다.
가죽 특유의 부드러운 느낌을 선호하는 골퍼는 전통적인 가죽 그립을 쓰기도 한다. 관리가 어렵다는 건 감수해야 한다. 폴리우레탄 소재의 그립이 있는가 하면 두 가지 이상의 소재를 하나의 그립에 담은 하이브리드 형태도 있다. 위 부분은 실 그립, 아래 부분은 고무 그립인 제품이 그 예다. 고무 소재로 속 그립을 만들고 엘라스토머 소재로 겉 그립을 씌운 제품도 있다.
클럽 페이스 못지않게 그립을 잘 닦아주는 것도 중요하다. 투어 선수가 아닌 이상 5~10회 라운드에 한 번씩 세척하면 더 오래 쓸 수 있다. 일반적인 고무 그립의 경우 따뜻한 비눗물로 부드럽게 솔질하는 방식이면 충분하다.
[서울경제 골프먼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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