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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종 위기에 처한 바나나

바나나에는 바나나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라고 주앙 페르난도 아길라가 말한다. 수염이 더부룩한 이 식물학자와 필자는 세계에서 가장 특이한 바나나 재배지를 돌며 연이어 선 높은 나무들을 따라 가다가 중미의 한낮 열기를 피하려고 넓은 잎새의 그늘 아래로 들어가곤 한다. 미국의 쇼핑몰 크기만한 면적에서 46세의 아길라는 300종이 넘는 바나나들을 재배중이다. 대부분의 상업용 작물 재배 시설들에서는 미국인들이 아침에 씨리얼에 넣어 먹는 종류의 바나나 한 종만 재배한다. 과일중 바나나 소비 최다 - 아길라의 재배지에 있는 과일들은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굵직하고 길이가 30cm나 되는 게 있는 반면 얇삭하고 손가락만한 것들도 있다. 자연산 그대로 먹으면 달콤한 것도 있도, 감자처럼 찌거나 구워서, 혹은 튀겨서 과자처럼 먹는 것도 있다. 하지만 아길라가 한 말은 북미인들의 점심 도시락과 아침 식사용에 관한 것이다.

미국과 캐나다, 유럽 사람들에게 바나나는 다 똑같다: 노랗고 달콤하며, 한결같은 크기에 껍질은 탄탄하고 씨가 없다. 우리가 먹는 카벤디시라는 바나나는 아길라가 이곳에서 재배하는 종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카벤디시가 바로 바나나입니다”라고 혼두라스 농업 조사 재단(FHIA)의 바나나 품종개발 책임자가 말한다.

세계 최대 바나나 생산업자인 치키타의 슬로건대로 카벤디시는 “단연코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음식”이다. 바나나는 영양이 풍부하고 편리한 데다 저렴하고 사시사철 살 수 있다. 미국인들은 다른 과일들보다 바나나를 훨씬 많이 소비해 1인당 연평균 26.2파운드를 먹는다. 이에 비해 사과는 16.7파운드로 한참 뒤처진 2위에 불과하다.

매년 전세게적으로 소비되는 1000억 개의 카벤디시 바나나들은 유전학적 관점에서도 완벽해 모두가 서로 똑같은 것들이다. 원산지가 혼두라스나 타일랜드, 자마이카나 카나리반도 어느 곳이든 각 카벤디시는 20세기 초 동남아시아에서 발견되어 50년 전부터 상업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했던 것과 똑같은 품종이다.

인간이 1만5천년간 재배
이런 동질성이 바나나의 모순이기도 하다. 인간이 1만5,000년 동안 재배해 온 바나나는 너무 완벽해져 종의 건강에 중요한 다양성이 결여되어 있다. 한 바나나가 취약한 질병은 다른 바나나에게도 치명적이다. 어떤 재배지에서 퍼진 세균이나 박테리아성 질병이 전세계로 확산되어 수많은 바나나에게 피해를 입혀 공급이 급격히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 현실성 없는 시나리오일까? 이미 이런 바나나 사태가 한 번 있었음을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1960년대 초반까지 미국에서는 씨리얼과 아이스크림에 현재 미국인들이 즐겨 먹는 것보다 더 크고 훨씬 달콤한 종류인 그로스 미쉘이 주로 사용됐다. 카벤디시와 마찬가지로 “빅 마이크”라는 그로스 미쉘은 미국과 유럽에서 판매되는 바나나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하지만 1900년대 초반부터 파나마병이라는 곰팡이균이 빅 마이크를 감염시키기 시작했다. 주로 바나나 잎에 피해를 주는 이 질병은 느릅나무 입고병과 같은 류에 속한다.

수리남에서 처음 시작된 이 질병은 카리브해로 확산되었다가 1920년대에 결국 혼두라스까지 퍼졌다. 당시 혼두라스는 세계 최대의 바나나 생산지였지만 현재는 에콰도르와 코스타리카에 이어 3위를 차지하고 있다.

재배업자들은 서둘러 작물은 미개간지로 옮겨 심으면서 바나나 공급을 유지해 나갔지만 수백만 에이커의 열대우림이훼손되어 금전적, 환경적인 대가를 톡톡히 치루게 되었다. 1960년대가 되자 주요 수입업자들은 거의 파산지경에 이르렀고, 바나나의 미래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 기간동안의 바나나 공급 부족 현상이 팝문화에도 영향을 미쳐 1923년도 히트작 뮤지컬 “그래! 바나나가 없어”는 작곡가인 프랭크 실버와 어빙 콘이 자신들이 제일 좋아하는 과일인 바나나를 사러 이웃 야채상을 돌아다니다가 번번히 재고가 없다는 말을 듣고는 만들게 된 작품이라고 한다.

파나마병, 바나나 재배지 초토화
미국의 바나나 업체 중역들은 그로스 미쉘에 닥친 위기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고 카네기 멜론 대학의 역사학 교수이자 곧 출간될 바나나에 관한 저서의 필자이기도 한 존 솔루리가 말한다. “이들 중 대다수가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렸습니다.”

수십억 달러를 인프라에 투자해 다양한 수요를 수용할 수 있게 되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카벤디시가 결국 빅 마이크를 대체하게 되었다. 이 바나나의 장점은 파나마병에 강하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1992년에 카벤디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새로운 곰팡이균이 아시아에서 발견되었다. 그 이후 파나마병 레이스 4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오스트레일리아와 대만의 바나나 재배지를 초토화시킨 뒤 동남아시아의 여러 지역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아직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는 타격을 입지 않았지만 대다수 전문가들은 이곳들도 피해를 입을 거라고 예측한다. “국가간 여행이 활발한 현재 이 질병은 반드시 카벤디시종을 감염시킬 겁니다”라고 플로리다 대학 식물 병리학자로 수마트라에서 이 곰팡이균의 표본을 처음 채취한 랜디 플로에츠가 말한다. 바나나를 구하려는 노력이 전세계적으로 진행중인 가운데 앞으로 닥쳐올 위기를 어떻게 규명할 것인가에 관해 상반된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뉘고 있다.

아길라와 같은 기존의 바나나 재배업자들을 주축으로 한 편에서는 실험적인 종을 재배해 일반 소비자들이 차이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카벤디시와 모양이나 맛이 유사한 대체 품종을 만들어내려고 하고 있다. 반면 로니 스웨넨 같은 생명공학자들을 주축으로 한 다른 편에서는 대규모 바바나 유전자 분석 작업을 끝마친 후 이 식물의 염색체를 조작, 다른 품종의 DNA와 교배시키며 파나마병이나 다른 질병도 견뎌낼 수 있을 보다 강한 카벤디시종을 만들어내려 하고 있다.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바나나들이 파나마균에 감염될 시기에 관해서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플로에츠는 섣부른 에측을 피하고 있지만 말레이시아 경작지들이 최고의 호황을 누리다 채 5년도 안 지나 “완전히 황폐화”되었다고 지적한다. 현재 파나마병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방법도 없고, 카벤디시 대체 품종도 아직 선보이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과학자들과 유전학자들은 서로 경쟁을 하고 있지만 이들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다.

미 바나나 시장 40배 증가
혼두라스는 여러 측면에서 미국 수퍼마켓용 바나나의 주요 원산지이다. 지금은 치키타와 돌로 알려져 있는 미국 회사 두 곳 유나이티드 프룻과 스탠다드 프룻이 세계 최초의 상업용 바나나 재배지들을 이 중미 국가에 만들었다. 기술적 인프라를 갖추는 게 첫 과제였다. 바나나 재배업체들은 원래 철도 회사로 시작했기 때문에 우호적인 지방 정부들이 철로 1마일당 수천 에이커의 주변 열대우림들에 대한 사용권을 주었다.

식민지 시대 이후 미국에서도 가끔씩 바나나를 살 수는 있었지만 남북전쟁 이후 철로와 증기선을 통한 동력 운송수단이 등장하면서 열대과일의 수입이 원할해졌다. 1896년도 파퓰러사이언스지의 “바나나가 자라는 곳”이라는 한 기사에는 미국의 바나나 시장이 이전 4반세기에 비해 40배 증가했는데, 주로 향상된 “바나나 운송 및 저장 수단” 덕분이라고 밝혔다.

1900년대 초가 되자 바나나는 사과를 제치고 미국민들의 최고 애호 식품이 되었다. 인기가 너무 높아진 나머지 당시 청소부들이 수거하기 전에 길에 버려진 바나나 껍질에 미끄러져 넘어지는 위험한 일이 잦았다. 다행히 보이스카웃이 나서 1914년 지침서에서는 “길거리에서 바나나 껍질을 줍는 것도 훌륭한 행위”라고 밝혔다. 바나나 쓰레기 문제 덕분에 1900년대 초 쓰레기 분리수거가 시작됐다고 바나나: 미국 역사의 저자인 버지니아 스콧 젠킨스가 말했다.

바나나는 늘 새로운 농업 기술 배양소였다. 바나나는 시간에 민감한 상품으로 덜 익은 상태로 수확해 거의 익어갈 즈음 시장에 출시되야 하기 때문에 수확과 배송 시간을 정확히 관리하는 시스템이 개발되었다. 바나나 생산 컨설턴트로 혼두라스 북부 연안 산 페드로 술라 근처의 치키타 생산 단지내에서 자란 레오넬 카스틸로는 “항구쪽 수평선으로 배가 나타나는 게 보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옛날식 시간 관리법이었다고 설명한다.

숙성실서 과일익는 속도조절
배가 보이면 인부들이 미친 듯이 쉬지 않고 바나나를 따서 배로 실어날랐다. 치키타의 엔지니어들은 이런 구식 방법을 극복하기 위해 이 지역에서 최초의 라디오 방송망을 설치했다. 바나나가 인기를 얻자 숙성실이 개발되어 이곳의 통제된 환경하에서 수확한 과일의 익는 속도를 늦추거나 당길 수 있었다. 냉동 증기선과 초기 바코드 기술을 통해 각 바나나의 경작지, 수확기, 원산지, 선적 컨테이너를 추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나나 재배 기술이 발전한 것은 언제나 신품종 연구 덕분이었다. FHIA는 현재 치키타의 예전 혼두라스 본부 건물을 쓰고 있는데, 이곳은 1920년대 이후 기존 바나나 재배의 세계적 중심지였었다. 이 건물을 보면 과거 열대 오지에 파견됐던 회사 중역들의 생활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대학 캠퍼스처럼 펼쳐진 건물군들 사이에 한 때 수영장과 승마장들이 있었다.

치키타는 1970년대에 대부분의 열대 연구소를 폐쇄했다. 1986년 지역 경제 발전을 위해 FHIA가 설립됐다. 정부와 사기업의 후원금으로 진행된 노력의 일환으로 첫 선을 보인 품종이 FHIA-01으로 알려진 “골드핑거” 바나나이다.

골드핑거는 원래 유나이티드 프룻사 과학자들이 채집한 350가지 이상의 바나나 표본들끼리 수많은 교배를 통해 개발되었다. 이 바나나는 조리하거나 그냥 먹을 수도 있는 다기능성 과일이다. 이것은 약간 시큼해 사과 맛이 나는데 신품종 바나나로서는 드물게 상당한 소비자들의 호응을 얻었다.

골드핑거를 만든 필립 로우는 기존의 바나나 교배 방식을 주창하는 대표적 인물이다. 로우는 2002년에 사망했고, 그의 프로그램을 아길라가 인계받았다. 로우처럼 아길라도 기존의 교배법이 유전공학과 달리 카벤디시 대체 품종 개발에 최적의 방법이라고 믿고 있다. 골드핑거는 이런 믿음을 입증해 주었다. 운송에도 특별한 문제가 없었고, 특정 시장, 특히 호주에서는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좀 더 단 맛이 난 카벤디시와 달라 미국에서는 자리잡지 못했다.

화학 약품살포로 시가토카 억제
아길라는 예전 치키타 본부들 둘레의 재배지를 재빨리 돌아다니며 표본 과일을 씹어 먹는 중간중간에 말보로를 연이어 피워댄다. 그는 드넓은 재배지에서 제대로 된 품종을 찾아내려면 바삐 움직여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농사가 느린 과정이라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점도 알고 있다. 둘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려면 이 일을 일반 과학 연구 이상의 것으로 여겨야 한다고 그가 말한다. 바나나를 구하는 경쟁은 개인적인 것이다. “바나나는 제게 자식과도 같습니다”라고 그가 말한다. 아길라의 실험용 품종들은 각각 꼬리표가 달려 줄지어 배열된다. 이곳에서는 신종 바나나를 시험하기 위해 살균제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건강하고 저항력이 강한 것과 병든 것간의 차이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강한 품종에는 널찍한 초록 잎들이 달려 있다. 파나마병이나 이 병과는 달리 중미에서만 발견되는 블랙 시가토카에 걸리면 잎이 말라 쪼그라들어 바나나가 햇빛에 그대로 노출되면서 광합성이 줄어들어 식물에서 당분 생산을 못해 과일 생산량이 급격히 줄어든다. 시가토카가 큰 문제이긴 하지만 파나마병과 달리 이 병은 화학 약품 살포로 억제할 수 있다.

바나나는 땅밑의 뿌리로부터 자라나기 때문에 땅위로 솟아나온 부분이 나무둥치보다는 줄기처럼 보인다. 길다란 잎이 작은 꽃들에 덮인 채 줄기로부터 나온다. 암꽃들은 꽃봉우리 아래에서 과일 안으로 자라는 반면 전구 모양의 빨간 수꽃은 줄기 맨끝에서 자라 무게 때문에 땅쪽으로 수그러진다. 과일들은 가게에서 사는 꾸러미 모양을 지칭하는 “핸드(손)” 형태의 나선형으로 자란다. 바나나 낱개는 “핑거(손가락)”라고 부른다. 각 바나나 꾸러미에는 최대 열두 개까지의 바나나가 달리고, 바나나 나무 한 그루에서 수확되는 총량을 “번치(다발)”라고 한다.

재배된 바나나 자가생식 못해
바나나가 대부분의 다른 농작물들과 다른 점은 카벤디시를 비롯해 거의 모든 변종들에 씨가 없다는 점이다. 바나나의 둥글고 검은 중앙부는 한 때 이 과일의 생식핵이었던 부위의 흔적이다. 재배된 바나나는 절대로 자가생식을 하지 못한다. 그보다는 새 줄기가 현재의 뿌리에서 수년 동안 간간히 자라난다. 수꽃으로부터 꽃가루가 다른 식물의 암꽃으로 가도록 하는 게 아길라 팀처럼 전통적인 바나나 품종 개량자가 신품종을 개발하는 방법이다. 매일 동이 틀 무렵 수경 재배팀이 고물 3단 자전거를 타고 FHIA의 먼지 자욱한 재배지를 돈다. 이들은 각 나무를 돌며 수꽃에서 분말형 꽃가루를 채집해 암꽃에 옮기면서 반응을 꼼꼼히 기록한다. 아길라는 이 재배지를 “대형 스프레드 쉬트”라고 부른다. 이런 작업의 목적은 씨앗을 얻어 이를 이용해 아길라의 실험적인 변종들을 길러내, 그중 어느 하나가 맛있고 시장에 잘 맞는 카벤디시 대체종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각 씨앗에서 번식력 높은 잡종이 나올 확률은 얼마나 될까? “대략 1/10,000 정도일 겁니다”라고 아길라가 말한다. 수정된 식물에서 4개월 정도 후에 열매가 열리면 이것을 수확해 처리실로 보내 씨앗을 추출한다. 인부들이 수천 개의 바나나들을 분쇄기로 밀어넣는다. 바나나 300개당 씨앗 1개 정도가 발견된다. 이 씨앗들은 실내에 있는 “배아 구조 장치”로 보내진다. 이 적은 수의 씨앗들 중에서도 1/3만이 발아한다. 이 식물들은 시험관에서 자라기 시작해 보호용 온실들을 거쳐 마지막으로 재배지에 파종된다. 과실은 수정 후 2년이 지나 처음 수확된다. “그때서야 구체적인 결과를 얻게 되는 겁니다”라고 아길라가 말한다. 자연산 바나나와 FHIA 잡종간의 차이는 상당하다. 아길라는 1959년에 촬영된 사진들을 보여준다. 필 로위의 초기 이종교배 실험으로 수확된 바나나는 아주 작았다. 이 초기 바나나의 후손들은 최신 품종인 FHIA-26을 비롯해 모두 큼직하고 단단하다.



너무 빨리 익는 ‘엄피코’
소비자들에게 호감을 얻으려면 외관도 중요하다. 치키타에서는 색깔 차트를 인쇄해 수퍼마켓에 걸어 놓고 고객들이 가장 노란 바나나를 고를 수 있도록 안내했다. 하지만 맛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아길라의 안내로 재배지로 나가서 특이한 바나나들이 가지런히 늘어선 곳을 지나게 되었다.

그는 “엄피코”라고 표시된 식물들 옆에 멈춰서는 줄기에서 바나나를 따 껍질을 벗기고 간단히 맛을 본 다음 한 조각을 건넸다. 맛은 훌륭해 기존 바나나에 비해 좀 더 부드러웠지만 엄피코는 너무 빨리 익기 때문에 제시간에 미국 상점에 결코 도착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몇 줄 더 내려가 낮게 드리운 바나나 잎 그늘로 들어섰다. 높이도 중요하다. 그로스 미쉘은 너무 높아서 바람에 잘 쓰러졌다. 카벤디시는 높이가 상당히 낮아서 악천후에도 잘 견디지만 1998년에는 혼두라스의 모든 바나나 나무들이 허리케인 미치에 의해 쓸려나갔다. 아길라는 다른 바나나를 따서 맛을 본다.

우리가 먹은 것들 중 카벤디시나 카벤디시 개량종 바나나는 없었고, 이미 익숙해진 바나나와 같은 맛이 나는 것도 없었다. 수입업자들은 현재 가장 인기있는 바나나가 빅 마이크를 대체했을 때 소비자들이 거부감을 느낄까 봐 두려워했듯이 부드럽지도 달콤하지도 않은 과일이 카벤디시처럼 시장을 다시 훼손시킬까 봐 우려하고 있다. “비슷한 바나나를 만들 수는 있지만 똑같은 건 만들 수 없습니다”라고 아길라가 말한다.

1천200개가 넘는 바나나 변종
카리비아해의 후덥지근한 바나나 경작지에서 멀리 떨어져 벨기에 브뤼셀 동쪽으로 20분 거리에 있는 야구장 크기의 온실에서는 미래의 바나나를 만들어내려는 전혀 다른 방식의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 로니 스웨넨은 루벤 캐톨릭 대학교 열대 작물 개량 연구소 소장이다. 그는 세계 최대 규모의 바나나 품종들을 관장한다. 1,200개가 넘는 변종들이 줄지어 선 실험관들에 보존되어 있고, 작은 묘목들이 유리로 덮여 있는데, 각 묘목은 새로운 바나나 변종을 가공해 내는 데 사용될 유전물질을 포함하고 있다.

지난 10년간 스웨넨과 그의 동료들은 상업용 바나나 변종에 위협이 되는 블랙 시가토카와 일종의 병원균인 선충, 파나마 병의 다른 변종들 같은 주요 질병들에 대한 저항력을 형성하기 위해 바나나 유전자들을 해독하고 조작해왔다.

바나나가 없어도 도회지에서의 아침 식탁에는 큰 문제가 없겠지만 이 질병들이 퍼질 경우 개발도상국, 특히 동아프리카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다. 빅토리아호 주변의 우간다와 케냐, 탄자니아와 브룬디, 르완다 같은 인구 밀접 국가들에서는 바나나가 주요 영양식으로 일부 식단에서는 탄수화물 섭취원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우간다에서 음식에 해당하는 말 “마투커”는 스와힐리어로 “바나나”라는 뜻이다. 동아프리카에서 먹는 바나나는 서구에서 소비되는 사막형 과일이 아니다. 이들은 용도가 훨씬 다양해 캄팔라에서 판매되는 바나나로 만든 맥주도 있다. 하지만 카벤디시처럼 아프리카 바나나도 위기에 처해 있다. 우간다의 국립 바나나 연구 프로그램에서는 한 때 수명이 50년이었던 식물들이 이제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현저히 낮아 번식 기능이 사라져버려 5년 내로 교체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바나나는 이 지역의 다른 작물들에게도 중요하다. 이들은 열대우림의 덮개 역할을 해 콩이나 고구마 같은 줄기 식물들이 응달에서 자라도록 해준다. 바나나가 없으면 2,000만 명이 “대규모 불안”에 직면하게 될 거라고 스웨넨이 말한다.

질병에 취약한 바나나
바나나가 질병에 유독 취약한 이유는 이 식물의 기원과 관게가 있다. 바나나만큼 오래 전부터 인간이 재배해 온 작물은 없다. 최초의 바나나 재배는 동남아시아에서 시작되었지만 이 지역에서 발견된 수백 종의 변종들 중에서 10~15종만이 아프리카로 퍼져나갔다고 스웨넨이 말한다. 바나나는 생계형 농업에 가장 알맞은 작물이다. 일단 한 가족이 건강한 바나나 나무를 길러내면 이후에는 새로 씨앗을 뿌리거나 구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대신 농부들은 기존 나무에서 “흡근”이라는 새싹을 떼내어 되심었다. 바나나는 돌연변이를 잘 하기 때문에 처음에 아프리카까지 온 소수의 아시아 바나나 변종들 중에서 200종 이상의 변종이 새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런 변종들은 여전히 유전적으로 유사해 동일하게 감염되기 쉬웠다. 라틴아메리카에서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아프리카로부터 그곳으로 건너간 품종은 소수에 불과해 변종이 더 적습니다.”

스웨넨은 이미 무에서 추출한 유전물질을 이용해 달콤한 바나나를 만들어냈고, 블랙 시가토카에 대한 내성 저항력을 형성해냈다. 이 실험실에서는 아프리카용 고수확 바나나와 베타 카로틴 함유량이 높은 바나나도 개발중이다. 스웨넨은 생명공학만이 카벤디시를 살려낼 유일한 방법이라고 강조한다. 이 바나나는 씨가 없기 때문에 기존의 잡종교배법으로는 개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FHIA가 맨땅에서 신품종을 재배하려는 방법은 너무 느리다고 그가 주장한다.

혼두라스의 과학자들처럼 전통적인 바나나 품종개량학자들은 자신들의 방법이 스웨넨과 그의 동료들이 실험실에서 진행하는 DNA 조작법보다 몇십 년 더 느리다는 점을 알고 있다. 하지만 유전자 가공 식품들에 대한 거부감이 전세계 소비자들 사이에 팽배해 있다는 점도 알고 있다.

유전자 변형 개입 불가피
미국의 바나나 수입업체 치키타에 해당하는 영국 바나나 수입업체인 피페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영국 고객들의 82퍼센트가 유전자 변형 작물의 가장 큰 장점인 살충제나 유해한 화학약품이 묻어 있지 않아 아무리 안전하다고 하더라도 유전자 변형된 식품은 절대로 사먹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대중들의 유전자조작 식품에 대한 거부감은 유럽에도 퍼져 있어, 이런 과일이나 채소류의 수입이 금지되어 있다. 치키타에선 이 이야기에 별다른 언급을 하려 하지 않았지만 이 회사 중역들은 소비재에 생명공학 기술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거듭 거부해왔다.

“전 자연이 완벽하다거나 저희가 프랑켄쉬타인을 만들고 있다는 식의 순진한 생각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라고 스웨넨이 말한다. 사람들은 “겁을 먹었고,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바나나가 유전자 변형 식품이 되어 결국 전세계 소비자들의 구매 대상이 되고, 재배 과정에 과학의 개입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사람들이 인정해야 하는 게 바로 바나나가 처한 위협의 본질이라고 그는 믿고 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저항력이 강한 바나나가 필요한 겁니다”라고 그가 말한다.

환경·노동운동계 초점의 대상
혼두라스에서 사방으로 뻗어 있는 옛 공장들에는 아직도 작은 치키타 사무실들이 있지만 이 지역에서 이 회사의 존재는 빛이 바래가는 로고에서 느낄 수 있는데, 청과물 가게의 과일에서 볼 수 있는 폭발하는 모양의 스티커가 이제 쓰러져가는 컨트리 클럽 한 켠에 칠해져 있다. 치키타와 돌은 아직도 이곳에서 수천 에이커의 재배지를 갖고 있지만 과거 한 때처럼 막강한 토지 소유주들이 직접 관리하지 않고 지주들이 다른 곳에 사는 경우가 더 많다. 이 클럽에서 저녁을 먹는데 레오넬 카스틸로가 우리가 앉아있는 식사실이 “한 때 정부가 수립됐다가 해체된 장소”라고 알려준다. 이 논란의 현장으로부터 “바나나 공화국”이라는 조어를 언론에서 만들어내자 주요 바나나 회사들은 언론에 비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치키타측은 자사 웹사이트에 있는 “우리의 복잡한 역사”라는 연대기 페이지에서 과거를 시인하고 내세울만한 업적들과 모호한 사건들에 대해 수록하고 있다. 1954년 과테말라 대통령 자코보 아르벤즈 구즈만 정권 전복 가담 사실이나 1961년 회사의 증기선단을 이용해 실패로 끝난 쿠바 피그스만 침공을 지원한 일, 독점금지법 소송, 1975년 뇌물제공 스캔들이 공개된 후 유나이티드 프룻 회장 엘리 블랙이 뉴욕 팬암 빌딩 42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사건이 실려 있다. 바나나 회사들은 아직도 환경계와 노동운동계의 초점이 되고 있다. 치키타와 돌은 최근 사업 활동을 열대우림 연맹 같은 단체로부터 확인을 받도록 조처했다.

바나나 재배지의 근로자들이 혼두라스의 작가 라몽 아마야 아마도르가 푸른 감옥이라는 우화적인 소설을 썼던 1950년대에 비해 더 나은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일부 비평가들은 바나나 업계가 아직 멀었다고 말한다. 가장 큰 문제는 “인체와 환경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살충제를 계속 사용하는 점이라고 영국 운동단체인 바나나링크의 코디네이터인 알리스테어 스미스가 말한다. 그의 단체에서는 근로자들의 장기적인 건강 위험 사례를 줄줄이 꼽고 있다.

점차 강력해지는 살충제
살충제 문제는 바나나 연구원들에게도 중요하다. 살충제들은 대개 두꺼운 바나나 껍질을 뚫고 침투하지 못하기 때문에 소비자들에게는 적어도 직접적인 위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점차 강력해지는 질병들을 퇴치하기 위해 더 많은 화학 약품을 뿌려야 하기 때문에 인력과 비용이 높아지고 있다. “1970년대에는 연간 10~12회만 약을 뿌리면 블랙 시가토카를 억제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FHIA 소장이자 농업경제학자인 아돌포 마르티네즈가 말한다. 그러던 것이 거의 매주 약을 살포할 정도가 되면서 매회 살포 때마다 에이커당 최고 1,000달러까지 비용이 상승했다. “환경상으로도 수지상으로도 더 이상 감내하기 힘들 때가 올 겁니다”라고 마르티네즈가 말한다. 살충제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바나나 회사들의 입장은 살충제로 질병을 막겠다는 것이었다. 치키타의 환경 문제 책임자인 데이빗 맥로린은 2003년 보스톤 글로브지에 FHIA에서와 같은 프로그램들 때문에 “비용만 많이 들고 결과는 보잘것 없습니다. 이제 살균제 연구에 집중할 겁니다”라고 밝혔다.

카벤디시의 문제가 커질 조짐을 보이자 이런 입장에 변화가 생겼다. 2004년 주주들과의 컨퍼런스에서 치키타 회장 페르난도 아기레는 이렇게 말했다. “FHIA가 치키타에 여러 가지 크기와 맛을 지닌 몇 가지 변종 바나나들을 연구할 연구개발 부서를 제공할 겁니다. 이곳에서는 질병에 대한 저항력 강화 방안도 연구할 겁니다.”

카벤디시에게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어떤 과학자들은 5년, 다른 과학자들은 10년이라고 말한다. 이보다 훨씬 더 길거라는 희망을 내비치는 과학자들도 있다. 아길라는 나름대로 최악의 시나리오를 갖고 있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대체 품종을 개발해내기 전에 파나마병이 퍼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바나나 대신 사과를 먹을 겁니다”라며 그가 높이 솟은 바나나 나무 그늘 아래서 전율하며 속삭인다.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새로운 바나나는 어떤 것일까?
보통 미국인들은 연간 150개의 카벤디시 바나나를 먹는다. 교배를 통해 수많은 변종들이 개발됐지만 아직까지 현재 가장 인기있는 바나나와 유사한 것은 없었다.

[A] 레이디핑거 카벤디시보다 더 달고 단단한 7.5cm짜리 레이디핑거는 맛에 대한 의견차가 있다고 아길라가 말한다. 문제는 주요 시장에서 살아남기에 수확량이 너무 작다는 점이다.

[B] 프라타아나 처음 베어물면 단맛이 나다가 곧 신맛이 난다. 이 10cm짜리 과일은 벨기에 초콜렛과 허쉬 키스 초콜렛간의 맛 차이처럼 카벤디시와 미묘한 맛 차이가 난다. 아길라는 브라질에서 인기가 많은 이 과일이 더 나은 대체 품종이 개발되기 전에 재난이 닥칠 경우 카벤디시의 좋은 대체품이 될 수도 있다.

[C] FHIA-17 이 변종은 극히 최근 품종이어서 아직 이름도 없는데 그로스 미쉘로부터 개량해낸 것이다. 현재의 수퍼마켓 바나나보다 다소 크고 약한 맛이 난다고 아길라가 설명한다. "그로스 미쉘이 스트레이트 위스키 맛이라면 이것은 약간 물을 탄 맛이 납니다."

[D] FHIA-26 아길라의 잡종들 중 최근 품종인 이 과일은 카벤디시의 절반 크기이지만 약간 더 두텁다. 강하고 달콤한 맛이 나며 부드럽고 크림과 유사한 질감이 난다. 하지만 곧 결점이 드러났다. 껍질이 너무 얇아서 멀리 수송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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