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제 파퓰러사이언스] TV가 범인을 잡는다. 정확하게는 범죄사건을 다루는 TV 프로그램이 범인을 잡는 것.
지난 5월 3일 첫 방송된 KBS 2TV의 ‘특명 공개수배’는 범인 검거율이 40%를 넘으며, 같은 형식의 프로그램인 MBC의 경찰청 사람들, KBS의 사건 25시, iTV의 경찰 24시 등도 시청자들의 수많은 제보를 이끌어 내며 범인검거와 범죄예방에 일조했다.
[사례.1] A영상광고센터라는 유령회사를 설립, 고수익을 보장한다고 속여 808명으로부터 270억원의 돈을 가로챈 울산의 김 모(43)씨.
그는 지난 2005년 8월~2006년 11월까지 주부 등을 상대로 “회사에 투자하면 매월 14%의 배당금을 지급하고 1년 뒤에는 투자금 전액을 돌려주겠다”고 속였다.
이 같은 사실을 파악한 경찰은 김 씨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이미 종적을 감춘 지 오래. 경찰은 김 씨를 검거하기 위해 김 씨 주변 인물들에게 KBS 2TV의 ‘특명 공개수배’를 통해 방송을 하겠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처음에는 경찰 내부에서도 반신반의했지만 소문을 전해들은 김 씨는 지난 8월 28일 스스로 울산경찰청 광역수사대에 찾아와 자수했다.
김 씨는 자수 당시 “방송에 나가면 더 이상 숨을 곳이 없게 될 것으로 판단했다”고 말했다. TV 프로그램이 용의자의 자수를 이끌어낸 셈이다.
[사례.2] 지난 8월 16일 KBS 2TV 특명 공개수배에서 공개 수배된 용의자 안 모(28)씨.
그는 진주에서 평소 알고 지내던 보험설계사를 납치하고 금품을 빼앗은 혐의로 공개 수배됐다. 프로그램은 8월 16일에 이어 23일에도 그를 공개 수배했다.
2주에 걸쳐 연속으로 공개 수배한 끝에 안 모 씨는 지난 9월 1일 오후 10시 35분께 진주 경찰서 형사들에 의해 붙잡혔다.
경찰에 따르면 안 모 씨는 지난 7월 7일 진주에서 평소 알고 지내던 20대 여성을 목 졸라 살해하고 7월 28일에는 광주에서 만난 40대 여성을 흉기로 살해했다.
또 지난 8월 13일에는 서울에서 택시를 탄 뒤 부산으로 가는 도중 택시기사를 흉기로 찔러 살해한 것으로 드러났다.
조사 결과 안 씨는 주부 등 3명을 살해하고 1,300여만원 어치의 금품을 빼앗은 흉악범이었다. 중요한 것은 특명 공개수배를 통해 그의 얼굴이 전국으로 공개된 후 시청자들의 결정적인 제보를 바탕으로 그가 검거됐다는 점이다. 특명 공개수배는 이를 통해 범인 잡는 방송으로 한층 진가를 높이게 됐다.
[사례.3] 지난 7월 26일 전파를 탔던 특명 공개수배의 ‘6억원대 카드사기 절도사건’ 편. 방송이 나간 뒤 8월 16일 이 사건의 범인 중 한 명인 이 모 씨가 경기도 양평경찰서에 자수를 해왔다.
얼굴이 전국적으로 알려진 상황에서 더 이상 숨어 지내는 게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던 것.
이어 또 다른 공범인 박 모 씨도 8월 23일 오전 서울에서 검거됐다. 특명 공개수배를 통해 용의자들이 공개됨으로써 경찰은 이 씨의 자수 일주일 만에 또 다른 용의자를 검거하는 성과를 올렸다.
[특명 공개수배 이름값 톡톡]
‘TV가 범인을 잡는다?’ 언뜻 잘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이다.
매주 목요일 오후 8시 50분에 전파를 타는 KBS 2TV의 특명 공개수배(연출 정재학)를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다면 이 같은 사실에 동의하게 된다.
실제 사건의 용의자를 공개해 시민들의 제보로 범인을 잡는 형식의 특명 공개수배는 지금껏 14명의 범인을 잡는 성과를 거뒀다.
그 결과 특명 공개수배는 시청자들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이를 통해 범죄예방은 물론 높은 시청률로 KBS의 주력 프로그램으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 5월 3일 첫 방송된 특명 공개수배는 지금까지 22회가 방송되면서 이름값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9월에는 범인 검거율이 40%를 넘기기도 하면서 특명 공개수배에 나가면 해당 범인이 잡힌다는 말이 돌 정도다.
특명 공개수배는 살인, 강도, 강간, 절도 등 사실 관계가 명확한 5대 강력범죄의 범인을 검거하기 위해 기획됐다. 매회 2~3건의 범죄 용의자를 방송을 통해 수배하고 있다.
프로그램은 생방송으로 진행된다. 방송을 통해 우선 범죄사건을 공개하고 전화, 인터넷 등 다양한 형태를 통해 용의자에 대한 시청자들의 제보를 받는 형식이다.
시청자들의 제보는 경찰청을 비롯해 담당 수사팀과 실시간으로 공유된다.
하지만 방송에 나가기만 한다고 해서 범인을 쉽게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닐 터. 특명 공개수배가 검거율 40%라는 높은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은 앞서 언급했듯 특명 공개수배는 범죄사실에 근거한 철저한 사건분석에 중점을 둔다.
이와 함께 전화, 인터넷, 모바일 제보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시청자들의 참여를 극대화시킨다.
특히 오랜 시간이 지난 범죄사건의 경우 용의자의 습성과 지난 기간 등을 고려, 현재는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지까지 예측해 방송을 한다. 그만큼 치밀하고 계획적인 방송이다.
특명 공개수배의 연출을 총괄하고 있는 정재학 CP는 “용의자의 인상착의와 언행습관 등 세밀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고 시청자들이 용의자에 대해 각인할 수 있도록 해당 내용을 반복해 방송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시청자들이 용의자를 기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하찮은 정보라도 용의자에 관한 모든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검거율을 높이는 데 일조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정 CP는 방송 이후 스스로 범행을 자수해 오는 용의자의 경우 방송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엄청나다는 진술을 한다며 용의자들은 방송을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이 알려지는 상황에 대해 엄청난 심리적인 압박을 받게 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전국에서, 그리고 누구에게나 무차별적으로 나가는 방송의 특성이 범인들에게 심리적 압박을 주고 있는 셈이다.
[과학수사 기법에 바탕]
특명 공개수배 프로그램은 우리나라의 과학수사 기법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모든 범죄는 흔적을 남기기 마련. 우리나라 경찰도 범죄현장에 남아 있는 희미한 장갑자국 하나, 범인이 먹다 버린 포도 씨 하나만으로도 범인을 잡을 수 있는 첨단 과학수사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범죄현장에 남아있는 단서와 특징을 토대로 범인의 성격이나 심리, 직업, 그리고 가정환경 등을 추론해 내는 최첨단 기법인 크리미널 프로파일링(Criminal Profiling)도 가능한 상황이다.
이 같은 첨단 기법은 높은 신뢰도를 보인다. 그만큼 방송에서도 믿고 해당 용의자와 범인을 공개 수배할 수 있는 것이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이창진 아나운서는 “특명 공개수배 방송 때마다 많은 분들이 제보를 해주셔서 매우 감사드리고 이러한 큰 반응이 개인적으로는 놀랍다”며 “범죄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제작진들이 정말 밤을 꼬박 세워가면서 방송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아나운서는 이어 “죄를 저지른 용의자들은 꼭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며 “범인을 검거함으로써 유사범죄를 계획하는 사람들도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범죄관련 프로그램]
범죄사건 형식을 다룬 프로그램은 MBC의 ‘경찰청 사람들’이 원조 격이다.
지금도 우리 귀에 익숙한 배경음악과 함께 시작되는 경찰청 사람들은 각종 범죄사건의 재연을 통해 범인들의 범죄방법과 이에 대처하는 방법을 시청자들에게 알려줬다.
한 때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재연 배우들만 200여명에 이르기도 했다. 일부 재연 배우들의 경우 시민들에게 진짜 범인으로 오해 받는 촌극이 펼쳐지기도 했다.
경찰청 사람들은 시청률 면에서도 높은 성과를 보이며 안방극장의 대표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계속되는 방송에 따른 소재 고갈, 범죄사건 재연에 따른 모방범죄 우려 등으로 지난 1999년 폐지됐다.
KBS의 ‘사건 25시’도 빼놓을 수 없다. 사건 25시 역시 범죄사건을 소개하고 해당 용의자를 공개 수배하는 형식의 프로그램으로 특명 공개수배의 원조 격이다.
사건 25시는 시청자들의 수많은 제보를 이끌어내며 범인검거와 범죄예방에 일조했다.
iTV(구 경인방송)의 경찰 24시도 범죄 프로그램이라면 항상 손에 꼽힌다.
실제 경찰들의 생활모습과 범인검거 모습 등을 보여줬던 경찰 24시는 그 실제성 등으로 방송 당시 시청자들의 좋은 반응을 얻었다.
/김영필 서울경제 기자 susopa@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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