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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戰史] 베트남전의 분수령, 테트 대공세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벌어진 현대전 중에서 베트남 전쟁만큼 세계인의 뇌리에 깊숙이 각인된 전쟁도 드물 것이다.

그 베트남 전쟁이 초강대국 미국의 패배라는 미증유의 결말로 끝난 주요한 계기가 바로 1968년 1월 30일 벌어진 북베트남군의 테트 대공세다.

테트는 베트남어로 구정(舊正)을 의미하는데, 테트 대공세에서 발생한 막대한 피해를 계기로 미국은 베트남전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궁리를 하게 된다.

19세기 말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베트남은 프랑스의 압제에서 벗어나 독립하기 위해 장장 70여 년간에 걸친 독립투쟁을 벌인다.

그 중 가장 두각을 나타낸 그룹이 바로 호치민(본명 구엔 신 쿵, 1890~1969)이 이끄는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단체인 베트남 독립동맹. 베트남 독립동맹은 훗날 북베트남 정권의 전신이 된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부터 프랑스를 상대로 치열한 무장 독립운동을 전개, 1954년에는 디엔비엔푸 공방전을 피날레로 프랑스군을 사실상 격퇴시키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궁지에 몰린 프랑스군과 베트남 독립동맹 간의 불필요한 살생을 막는다는 명분을 내건 같은 해의 제네바 협정에 의해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북쪽은 베트남 독립동맹의 베트남 민주공화국(이하 북베트남), 남쪽은 고딘디엠 대통령이 이끄는 베트남 공화국(이하 남베트남)으로 분단된다.

당연한 얘기지만 남베트남은 스스로의 힘으로 프랑스를 격퇴한 북베트남에 비해 정통성과 대중적 지지기반이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미 1950년대 후반부터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에서 자생한 공산 게릴라 집단인 베트남 민족해방전선(통칭 베트콩)과 연합해 베트남 전토의 적화통일을 목표로 남베트남 내에서 활발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반면 미국은 동남아시아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1960년부터 남베트남에 대한 군사 원조를 실시했고, 이 와중에 1964년 8월 2일과 4일 통킹 만 해상에서 미국과 북베트남 해군 간의 무력 충돌인 ‘통킹 만 사건’이 발발하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전면 개입, 지상군 전투병력 파병은 물론 북베트남 영토에 대한 공중폭격까지 실시하게 된다.

하지만 북베트남도 소련과 중국의 전폭적 지원 하에 미국과의 전면전을 결의하고, 호치민 루트를 통해 막대한 병력과 물자를 남베트남으로 유입, 베트콩의 게릴라전을 적극 지원하는 방식으로 대미 전쟁에 나선다.

호치민 루트란 인접국인 라오스와 캄보디아 영토를 경유해 남북베트남을 잇는 비밀 보급로를 말한다.

미국은 북한 영토로 밀고 들어갔다가 중국군의 전격적 참전을 불러 자칫하면 제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될 뻔했던 한국 전쟁의 경험에 이골이 난 상태다.

따라서 이번에는 지상군의 활동 범위를 남베트남 영토 내부로만 제한시켰다. 즉 남베트남의 베트콩 세력만을 격멸하고 전쟁을 베트남화(남베트남에 충분한 자주국방 능력을 부여)한다는 제한적인 전쟁 목표를 갖고 있었던 것.

남베트남의 베트콩 세력을 완전히 일소하지도 못한 채, 그렇다고 북베트남이 북위 17도선을 넘어 남베트남을 전면 침공하지도 못한 채 어영부영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어느덧 1968년이 밝아오고 있었다.

구정 휴전을 깬 대공세

하지만 이미 1967년 가을부터 지루한 전황에 지친 북베트남이 뭔가 크게 한 판 벌일 것이라는 징후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실제 북베트남군은 남베트남 전토에서 게릴라전 공세를 동시에 일으켜 남베트남을 일거에 ‘해방’하기 위한 대공세를 준비 중이었다.

연합군 정보기관의 분석에 따르면 1968년 1월 현재 남베트남 영토 안에는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을 합쳐 모두 9개 사단 총 32만3,000명 규모의 공산군이 암약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됐다. 이들 병력이 사용할 보급품 또한 8만1,000톤이나 됐다.

1968년 1월 21일. 북베트남군 2개 사단이 북위 17도선 이남으로 진격해 케산 기지를 완전포위, 미 해병대를 향해 치열한 중포사격을 가한 것을 신호로 공세는 시작됐다.

곧이어 북베트남은 1월 28일부터 시작된 구정 휴전에도 아랑곳없이 1월 30일 오전 0시 30분을 기해 남베트남 64개 주요 도시에서 일제히 게릴라 전투를 개시, 남베트남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원래 구정 연휴 기간에는 북베트남군과 남베트남군 사이에 휴전을 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이 중에는 당연히 남베트남 수도인 사이공도 포함돼 있었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사이공의 주요 전략목표, 즉 남베트남군의 참모본부, 해군본부, 국영 라디오 방송국, 대통령궁, 주월 미국 대사관 등을 공세 개시 48시간 내에 점거하는 것을 목표로 총 35개 대대를 동원해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정보 부족과 북베트남군 및 베트콩 간의 협조 부족 등으로 사이공에서의 작전은 난항을 겪었다. 이들의 주요 전락목표 중 잠시나마 공산군의 손에 함락된 곳은 라디오 방송국 뿐이었으며, 그나마도 6시간 만에 진압됐다.

사이공 도심에서의 전투는 압도적인 연합군의 반격에 공산군이 밀리면서 새벽 무렵에 진정됐다. 하지만 여전히 도시 외곽에서는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결국 2월 4일 사이공은 자유발포지대로 선포돼 민간인들이 소개됐다. 자유발포지대는 연합군이 베트콩 용의자에게 선제공격을 하는 것이 허용된 지대로 사실상의 ‘적지’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3월 7일 남베트남군과 베트콩 간의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고서야 사이공 전투는 종결 단계에 접어들었다.

베트남의 과거 수도인 후에의 경우에도 사이공을 능가하는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1월 31일 오전 3시 40분부터 개시된 후에 전투에서 공산군은 8,000명의 병력을 동원해 후에 시가지를 유린하고, 시내의 남베트남 육군 제1사단 사령부를 공격했다.

방어하던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중과부적으로 밀려 퇴각하고, 2월 1일 후에 신시가지가 공산군에게 함락됐다. 공산군은 후에를 함락한 후 시가지 내에서 남베트남 민간인 2,800여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연합군은 후에 탈환을 시도했다. 하지만 후에는 오랫동안 베트남의 수도였던 터라 역사적인 유적이 많아 처음에는 지원포, 폭격이 허용되지 않아 작전에 난항을 겪었다.

1주일이 지나도 후에의 공산군을 몰아내지 못한 연합군은 결국 2월 12일 후에에 대한 전면 지원사격을 허용했다.

2월 24일 후에는 결국 연합군에 의해 탈환됐지만 도시의 귀중한 문화 유적들은 이미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테트 대공세 여파로 공산군의 입지는 더욱 탄탄해 졌으며, 연합군의 막대한 인명손실은 반전 여론을 고조시키게 된다.

이어지는 공산군의 맹공

공산군의 남베트남에 대한 게릴라 공격도 놀라웠지만 더욱 충격적인 것은 북베트남이 베트콩이 아닌 정규군 병력을 주력으로 접경지대인 케산의 미 해병대 기지를 공격한 것이었다.



북베트남은 케산의 미군을 괴멸시켜 이곳을 제2의 디엔비엔푸로 만들면 지난 대(對) 프랑스전과 마찬가지로 미군의 철수를 얻어낼 수 있다는 계산 하에 불과 2㎢ 정도의 케산 기지에 매일 1,000발 이상의 포탄을 퍼부었다.

이곳을 양보할 수 없던 미국 역시 케산을 공격하는 북베트남군에 압도적인 화력으로 반격하는 한편 2월 1일에는 필요할 경우 전술핵 병기까지 사용할 것을 군부에 비밀리에 지시했다.

북베트남은 이에 아랑곳없이 2월 5일 보병 1개 대대를 동원해 케산 기지 외곽 861A 고지를 공격, 미군 7명을 죽이고 고지를 점거하는 과감한 태도를 보였지만 미군의 반격에 직면해 곧 철수하게 된다.

2월 7일에는 인근 랑베이의 미군 특수부대 전진기지가 PT-76 전차를 동원한 북베트남군에게 함락됐다.

그러자 미국은 북베트남에 대해 핵무기를 사용하겠다고 협박, 결국 3월 초부터 북베트남군은 후퇴를 시작했다. 그리고 4월 8일 미군은 케산 기지의 북베트남군 포위망을 뚫는데 성공했다.

미군 3,370명, 북베트남군 8,000명이 사상당한 이후였다. 이후 케산 기지는 6월 미군에 의해 자진 철거되고 병력은 철수하게 된다.

테트 대공세의 규모에 충격을 받은 미국은 1968년 3월 31일 북베트남에 대한 공중폭격을 일시 중단하는 대신 파리 평화회담에 응해 전쟁을 처리할 것을 북베트남에 권고했다.

남베트남 전토에서 벌어진 게릴라전에 완전히 지친 미군이 양민 347명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후 베트콩 128명을 사살했다고 허위 보고, 미군의 도덕성을 크게 실추시킨 밀라이 양민학살사건이 벌어진 것도 바로 이 무렵(1968년 3월 16일)이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테트 대공세는 그치지 않았다.

그 해 4월 북베트남군은 다음 달에 열릴 파리 평화회담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5만명의 병력을 호치민 루트를 통해 남베트남에 파견했다.

이 병력은 테트 대공세의 손실을 보충하고, 5월 4일부터 시작된 테트 대공세의 제2 단계 작전에 투입됐다.

이 작전에 의해 수도 사이공을 포함해 119개의 도시와 마을이 공산 게릴라의 습격을 당했다. 각지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졌고, 특히 동하의 미군 보급기지를 놓고 벌인 전투는 5월 30일까지 계속됐다.

공산군은 5월 30일까지 공세를 벌이다 잠시 멈추고는 8월 16일 테트 대공세의 제3 단계이자 마지막 공세를 다시 전개한다.

남베트남 제1, 2, 3군단을 공격하고 타이난, 안록, 록닌 등 국경지대 마을의 연합군을 물리치기 위한 이 공세는 9월 23일까지 계속됐다. 사이공은 이번에도 공세의 표적이 됐지만 북베트남의 이번 공세는 최종 결전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미약해져 있었다.

사실 1월 30일 테트 대공세 개시 이래 9월 23일까지 공산군 전사자 총수는 적게 잡아도 8만5,000명이었고, 많게 잡으면 10만명 이상이었다.

부상자 수는 아예 발표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전투에서 부상자 수는 통상 전사자 수의 3배 가량 되는 것을 감안하면 테트 대공세를 위해 남베트남에 투입했던 병력들은 이제 괴멸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는 공산군에게도 감당하기 힘든 손실이었다.

테트 대공세의 여파

3차례에 걸친 대공세에도 불구하고 북베트남은 원래의 작전 목표였던 남베트남 전토의 공산화에 실패하고 말았다. 북베트남은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의 작전능력을 실제 이하로 오판해 무리한 대공세를 벌였고, 그 결과 엄청난 인명 손실로 전력이 약화됐다.

특히 게릴라전의 주력을 맡아 맹활약했던 베트콩의 전력 약화는 북베트남군보다도 더욱 극심한 수준이었다.

따라서 북베트남은 테트 대공세 이후 베트콩의 전력 강화를 위해 북베트남군 간부를 베트콩에 대거 파견했고, 이로 인해 남베트남 내의 자생적 공산주의자들의 모임이었던 베트콩은 점점 북베트남의 지령을 받아 움직이는 괴뢰 조직으로 변모하게 됐다.

미국은 1968년 11월부터 북폭을 중단하는 등 무력으로 북베트남을 꺽겠다는 의지를 사실상 포기하며, 전쟁 종결을 고려하게 된다.

하지만 공산군이 얻은 것도 있었다. 전국을 뒤흔든 게릴라전의 여파로 남베트남 정부의 치안력이 덜 미치는 시골 지역에서는 베트콩을 비롯한 공산 세력의 입지가 더욱 확고해진 것이다.

특히 이 전투에서 발생한 연합군의 막대한 피해로 미국 내의 반전 여론과 염전주의가 더욱 힘을 얻게 됐다.

실제 연합군은 테트 대공세에서 전사 6,000여명, 부상 2만여명, 실종 1,000여명 등 총 2만8,000명 이상의 인명피해를 냈다. 비록 공산군보다는 적다고 하지만 이 정도면 제2차 세계대전의 최대 격전지 중 하나인 이오지마 전투와 맞먹는 수준이다.

4년이나 되는 전쟁 기간과 3만명에 달하는 전사자를 내고도 아시아의 가난한 공산국가 하나 어쩌지 못한 것에 대한 미국의 여론은 더 이상 이 전쟁을 호의적인 시각으로 볼 수 없게 했다. 더구나 공산군이 미국 대사관에 난입해 총까지 쏘아대는 모습은 가뜩이나 좋지 않은 여론을 더욱 악화시켰다.

미국은 민주국가다. 상대방인 북베트남처럼 공산당이 일당독재를 하는 국가가 아닌지라 국민의 민심을 잃으면 정치가들의 정치 생명도 끝이 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은 1968년 11월부터 북폭을 중단하는 등 무력으로 북베트남을 꺾겠다는 의지를 사실상 포기한다.

그리고 북베트남과의 평화교섭, 남베트남군에 대한 투자, 단계적인 주월 미군 감축 등을 통해 어떻게 하면 이 전쟁을 볼썽사납지 않게 끝낼 수 있을까를 궁리하기 시작한다.

1972년부터 다시 재개된 북폭으로 북베트남이 사실상 석기시대로 후퇴한 것을 볼 때 이 카드를 4년 동안이나 쓰지 않은 것이 얼마나 큰 미국 측의 양보였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대신 미국은 호치민 루트를 공격함으로서 남베트남으로의 공산군 병력과 물자 유입을 차단하려 했지만 이 역시 제대로 먹혀 주지 않았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연합국들도 이 테트 대공세 이후 전쟁이 ‘한 물 갔음’을 눈치 채고 슬슬 발을 빼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이 전쟁의 또 다른 당사자인 남베트남은 어찌 되었을까. 무능, 부패, 부조리가 판치고 대통령부터 말단 공무원까지 호국 의지는 온데간데없이 자기 배만 불릴 생각만 하던 남베트남이 이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필 확률만큼이나 낮았다.

결국 1973년 미군 철수 이후 남베트남은 1975년 3월부터 시작된 북베트남의 총공세로 불과 2달 만에 무너져 지도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대통령 구엔 반 티우는 북베트남군이 사이공으로 진격해 오자 사임하고, 공군 수송기에 금은보화를 잔뜩 실은 채 태국으로 망명해 버렸다. 베트남 전쟁의 패망 원인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글_이동훈 칼럼니스트 enite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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