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검색
팝업창 닫기
이메일보내기

베트남 전쟁 최초의 미군 에이스 랜디 커닝햄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은 F-4 팬텀 등 최신예 전투기를 투입하고도 2.3:1이라는 한심한 격추교환비율을 기록한다. 북베트남 전투기 5대를 격추할 때 2대 정도의 전투기 손실을 입었다는 것. 특히 북베트남의 전투기들은 MIG-17, MIG-21 등 한 세대 이상 뒤쳐진 기종이었음에도 미국은 근접전투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미 해군 F-4 팬텀 조종사인 랜디 커닝햄 대위는 1972년 5월 10일 하루 동안 3대의 MIG기를 격추, 베트남 전쟁 최초의 미군 에이스 파일럿이 된다.

1964년 8월. 북베트남 앞바다인 통킹만 공해상에서 미국과 북베트남의 해군이 무력충돌을 벌이고, 이를 계기로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본격 개입하게 된다.그리고 이 전쟁에 처음으로 개입한 미국의 군사력은 현재까지도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항공전력, 즉 공군과 해군의 항공대였다.

통킹만 사건 직후인 1964년 8월 5일. 미 해군 항공모함 항공대의 전폭기들이 ‘피어스 애로우’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출격, 북베트남의 해군 어뢰정 기지와 석유저장시설에 폭격을 단행한다. 이를 시작으로 미국은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 위력이 입증된 가공할 항공력을 이용, 본격적인 북폭(北暴)에 나선다.

하지만 북베트남의 대응도 만만치 않았다. 소련과 중국이라는 든든한 스폰서의 후원을 받고 있던 그들은 이들 국가에서 대량의 대공화기와 MIG 전투기를 도입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북베트남 상공의 거의 전 고도, 전 영역을 커버할 수 있는 방공망을 구축한다.

항상 화력의 양(量)으로 상대방을 압도, 도저히 뚫을 수 없는 탄막의 커튼을 친다는 소련식 포병교리에 따라 구축된 북베트남 상공의 방공망 앞에서 미군 전투기들은 차례차례 격추당한다. 당장 피어스 애로우 작전에서부터 미군 전투기가 격추되기 시작한다. 더구나 항공 전투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전투기 대 전투기의 싸움에서조차 미국은 형편없는 열세를 보이게 된다.

한심한 격추교환비율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과 중국이 핵무장을 실시하고 항공우주 기술이 유례없는 발전을 보이자 미국은 핵무기와 그것을 실어 나를 수 있는 미사일이 모든 전투의 승패를 좌우할 것으로 판단했다. 이에 따라 그동안 강조돼왔던 근접전투 훈련 대신 미사일의 높은 화력과 우수한 명중률, 그리고 긴 사정거리를 이용하는 전투 훈련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하지만 베트남에서의 공중전은 이 같은 교리를 순식간에 휴지로 만들어 버렸다. 북베트남의 MIG기들은 미군 전투기가 접근하면 밀림 속에 건설된 비행장에서 재빨리 이륙, 지상관제사의 지시에 의해 신속히 유리한 전투 위치로 이동했다. 그리고 초(超) 근접거리에서 공대공 미사일이나 기관포 세례를 먹이고는 쏜살같이 사라지는 히트 앤드 런 전술을 구사했다.

이렇게 날쌔게 움직이는 적에게 느긋하게 미사일을 조준해 쏠 여유는 없었다. 게다가 시대는 거의 반세기 전인 1960년대. 지금보다 훨씬 뒤쳐졌던 당시 항공기술의 한계와 베트남의 기후 탓에 미사일의 명중률은 예상을 훨씬 밑도는 수준이었다.
고온다습한 기후는 미사일에 탑재된 정밀한 전자기기에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실제 미국 전투기 미사일의 명중률은 적외선 유도식인 AIM-9이 50%, 레이더 유도식인 AIM-7이 35%에 불과했다.

베트남의 MIG기들은 초근접 거리에서 공대공 미사일과 기관포를 쏘고는 쏜살같이 사라지는 ‘히트 앤드 런’ 전술을 구사했다.

이 같은 상황으로 인해 당시 F-4 팬텀 등 미군의 최신예 전투기들은 한 세대 이상 뒤쳐진 MIG-17, MIG-21 등 북베트남 전투기들을 상대하면서도 2.3:1이라는 한심한 격추교환비율을 기록하게 된다. 북베트남 전투기 5대를 격추할 때 2대 이상의 손실을 입었다는 것.

이는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 세운 10:1이라는 격추교환비율과 비교할 때 너무나도 형편없는 결과였다. 당연히 미국은 이때까지 단 한 명의 에이스 파일럿도 배출하지 못하게 된다. 특히 1968년 가을부터 시작된 테트 대공세 여파로 미국이 북폭 카드를 철회하고, 1970년 지상군 철수가 이어지면서 더 이상 공중전도 없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1971년 말부터 북베트남의 남베트남 침략의도가 노골화되자 미국은 북폭을 재개한다. 1972년 3월 30일 북베트남이 DMZ를 넘어 남베트남으로 지상군을 진격시킨 이른바 부활절 대공세를 펼치고, 이에 따라 남베트남이 코너에 몰리자 미국은 ‘라인백커’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북폭을 전면 재개한다. 특히 북베트남이 소련과 중국에서 군수물자를 유입해오던 하이퐁 항까지 기뢰로 봉쇄하는 초강수를 썼다.

전투 방식 전환한 미군

라인백커 작전에 참가한 미군 파일럿 중에는 월남전 최초의 미군 에이스가 되는 해군 대위 랜디 커닝햄도 끼어 있었다. 공교롭게도 진주만 공습 다음날인 1941년 12월 8일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난 그는 1967년 미 해군에 입대, 해군 항공대의 전투 조종사가 된다. 그는 베트남 전쟁 초기 미국 전투기들의 졸전을 거울삼아 만들어진 해군 전투기병기학교, 일명 ‘탑건’의 수료생이기도 하다.

당시 이 학교에서는 A-4, F-8 등 기동성이 우수한 전투기를 소련제 전투기의 대역으로 삼아 전통적인 근접전투를 가르쳤다. 커닝햄도 이 학교에서 200회 이상의 모의 공중전 수업을 받았다.

통계에 의하면 10회 이상 공중전을 벌이고도 살아남은 전투조종사의 생존율은 비약적으로 높아진다. 이미 그는 여기에서 에이스가 될 충분한 기반을 닦았던 셈이다.
그는 1969~1970년에 걸쳐 항공모함 아메리카호에 탑승해 베트남에 처음 파병됐지만 당시는 북폭이 소강상태여서 적기를 격추해 볼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1971년 10월 항공모함 콘스텔레이션호 소속 제96 전투비행대대의 F-4 팬텀 조종사로 재차 베트남에 가게 됐을 때부터 상황이 달라진다.

그는 1972년 1월 19일 북베트남 공군의 MIG-21 전투기를 격추함으로서 첫 격추 기록을 세우고, 라인백커 작전이 시작된 이후인 5월 8일에는 MIG-17을 격추한다.
이틀 후인 5월 10일에는 하이동 조차장을 공격하는 폭격대에 참가한다. 하이동 조차장은 무수한 대공화기와 MIG 전투기로 삼엄한 방공망이 쳐져 있는 곳. 예상대로 북베트남군의 대응은 치열했다. 대공 포화에 맞은 미군 전투기들이 불덩어리로 변해 떨어졌고, 북베트남군의 MIG 전투기들 역시 벌떼처럼 날아올라 미군 전투기들과 맞섰다.

커닝햄의 귀에 MIG 전투기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미군 A-7 공격기의 구원요청이 들려왔고, 커닝햄은 이들을 구하기 위해 날아갔다. MIG-17 전투기는 커닝햄의 꽁무니에 따라붙어 사격을 가했지만 그가 MIG기 쪽으로 급선회를 하자 MIG기는 따라오지 못하고 커닝햄을 앞질러갔다. 그는 꽁무니를 드러낸 적기를 향해 AIM-9 미사일을 발사, 그날의 첫 격추이자 통산 3번째 격추를 기록한다.



곧이어 그는 미군 F-4 팬텀 3대가 원형진을 이룬 MIG-17 전투기 8대와 뒤엉켜 선회 공중전에 말려든 장면을 목격했다. MIG기에 비해 덩치가 크고 무거운 팬텀은 당연히 저공, 저속 때의 기동성이 좋지 않다. 선회 공중전 중인 MIG기들이 속도와 고도를 계속 낮춰 가면 팬텀의 운명은 보나마나 한 것이었다.

커닝햄은 아군기에게 선회 공중전을 중단하고 이탈할 것을 지시한 후 시속 550노트(약 1,018km)를 유지한 채 대열에 끼어들어 아군기의 꽁무니에 따라붙던 MIG-17에 AIM-9 미사일을 발사, 4번째 격추를 기록했다. 나머지 MIG기들은 앞을 다투어 커닝햄을 쫓아왔지만 그는 팬텀의 월등한 속도를 이용, MIG기들을 쉽게 따돌렸다. 팬텀이 마하 2까지 최대속도를 낼 수 있었던데 반해 MIG-17은 초음속 성능이 아예 없었던 것이다.

이미 폭격은 끝났고 게다가 사방에 MIG기 천지인지라 커닝햄은 전투를 중지하고 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항공모함으로 돌아가던 중 MIG-17이 혼자서 커닝햄에게 정면공격을 감행한다.

베테랑 조종사와의 대결

커닝햄은 팬텀의 우수한 상승력을 이용해 이 적기를 떨쳐버리려고 했다. 대부분의 북베트남 공군 조종사들은 기량 미숙과 기체의 성능 한계로 복잡한 상승 및 하강 조작이 필요한 3차원 선회 공중전을 능숙하게 구사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커닝햄은 이것으로 적기를 따돌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적기는 커닝햄과 불과 90m의 거리를 두고 계속 추적해오고 있었다.

이 때 단신으로 커닝햄과 맞섰던 MIG-17의 조종사는 ‘툰 대령’이라는 별칭으로 알려진, 자그마치 13대의 격추 기록을 보유한 베테랑 전투조종사였다. 팬텀보다 한 세대 이상 구식인 MIG-17로 3차원 선회 공중전을 시도한 것을 보면 그의 실력이 보통 이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나서 북베트남 공군 에이스를 다룬 자료 어디에도 이 조종사에 대한 기록은 발굴되지 않아 그의 정체에 대한 의구심을 더해주고 있다.
다만 베트남 전쟁 중 소련·중국·북한 등 여러 공산국가에서 조종사를 파견해 북베트남 공군을 지원했다는 점, 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가 이 전쟁에서 전사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툰 대령의 정체는 아마도 이 전쟁에 참전했던 제3국인 조종사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어쨌든 충분한 훈련을 받지 못해 기량이 미숙했던 대부분의 북베트남 조종사와는 달리 이 조종사의 전투 능력은 가히 ‘왕 중 왕’이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고, 커닝햄은 이 골치 아픈 적을 상대로 계속 근접전투에 매달렸다.

커닝햄이 탔던 팬텀에는 기관포가 없어 바로 코앞을 스쳐가는 적기를 공격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미사일 발사의 최소 사정거리 밖으로 거리를 두자니 적기가 너무나도 끈질기게 따라붙어 빈틈이 없었다.

커닝햄은 결국 최후의 수단으로 엔진 추력을 공회전 상태까지 줄이고 브레이크를 걸어 순식간에 150노트(시속 278km)까지 감속, MIG기를 자기 앞으로 추월시켰다. 이 상태에서 적기의 후방을 노려 미사일을 발사해보려는 계산이었지만 자칫 적기가 반전해서 공격한다면 오히려 격추당할 위험도 있었다.

그런데 적기는 반전하기는커녕 오히려 급강하해 전선을 이탈하려 했다. 후일 미군의 정보 분석에 의하면 이 MIG기는 연료가 부족해 지상관제관으로부터 귀환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여하튼 커닝햄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AIM-9 미사일을 발사, 격추시켰다.

커닝햄을 절대절명의 위기로 몰고 갔던 적기의 조종사는 끝내 탈출하지 못했다. 이로서 커닝햄은 5대째의 적기를 격추. 베트남 전쟁 최초의 미군 에이스가 되는 영예를 안게 됐다.

아이러니한 에이스의 말로

툰 대령과의 전투가 끝나고 항공모함으로 돌아가던 커닝햄은 북베트남의 지대공 미사일을 맞고 격추당하지만 후방석 조종사 윌리엄 드리스콜 중위와 함께 무사히 탈출에 성공, 미국의 영웅이 된다.

미군은 베트남 전쟁이 끝날 때까지 북베트남에 총 200만톤의 폭탄을 퍼부었는데, 이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전선에서 사용한 양과 같다. 이로 인해 사망 5만명, 부상 14만명, 그리고 9억 달러의 재산피해를 입힌다.

랜디 커닝햄은 베트남 최고의 전투기 조종사였던 일명 ‘툰 대령’의 MIG-17기를 격추한 후 에이스 조종사의 명예를 안았다.

이 전쟁에서 커닝햄의 뒤를 이어 3명의 미군 에이스 파일럿이 더 배출된다. 그리고 북베트남이 ‘나라의 독립을 빼놓고는 모든 것을 잃었다’고 할 정도로 미군의 항공력은 파괴적인 힘을 발휘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은 1975년 4월 남베트남 수도 사이공이 북베트남군에 함락됨으로서 공산군의 승리로 종결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커닝햄 대위의 운명 역시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걸어야 했던 운명과 비슷했다. 그는 1987년까지 해군에 머물면서 탑건 교관 등 군의 요직을 거쳤고, 중령으로 제대한 후 1991년에는 공화당 의원이 돼 정치인으로 성공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정치판이라는 이 새로운 전쟁터에서 그는 끝내 ‘격추’당하고 말았다.

2005년 11월. 그는 방위산업체 MZM사에서 240만 달러의 뇌물을 받고, 재산 축소 신고와 함께 탈세를 한 혐의로 의원직을 상실하게 된다. 이듬해 3월에는 징역 8년 4개월과 추징금 180만 달러라는 중형을 선고받고 현재 투산 교도소에 수감 중이다.
이미 일흔을 바라보는 노인이 된 커닝햄에게 이 형기는 엄청나게 긴 것이며, 석방된다고 해도 다시 의원직에 복귀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듯하다.

막강한 국력을 믿고 베트남이라는 수렁에 발을 디뎠다가 끝내 패전한 미국처럼 그 전쟁의 영웅도 권력만 믿고 비리를 저질렀다가 패가망신을 당하고 만 것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조직과 개인의 우매함을 답습하지 않기 위해서라면 비약일까.

글_이동훈 칼럼니스트 enitel@hanmail.net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

서울경제를 팔로우하세요!

서울경제신문

텔레그램 뉴스채널

서울경제 1q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