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검색
팝업창 닫기
이메일보내기

정확한 의학적 판단이 웰다잉의 전제

대법원은 지난 5월 21일 존엄사(尊嚴死)를 인정한다고 선고했다.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이미 사망과정에 진입해 사망이 임박해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 환자의 자기 결정권에 의해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판결한 것.

이 같은 판결은 품위 있는 죽음을 의미하는 웰다잉(Well-Dying)의 한 범주로 볼 수 있다. 사실 연명치료는 삶의 연장이 아니라 오히려 환자의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고통을 야기하기 때문에 비인간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의학적 측면에서의 웰다잉 역시 정확한 판단을 통해 고통 없이 편안하게 죽을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자료제공: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과학과 기술


인간의 죽음은 본디 의학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의학은 오로지 살아있는 생명을 보호하는 일에만 관심을 가지고 노력해 왔으며, 죽음에 대해서는 필요한 경 우 이를 확인하는 일을 해왔을 뿐이다. 즉 죽음이 가까웠다고 판단되면 의사는 그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려주는 일이 전부였던 셈이다.

전통적으로 인간의 죽음은 주로 집안의 일이었다는 점에서도 이 같은 관측은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다. 그만큼 사람이 죽는 일은 의학의 영역이라고 할 수 없는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인식됐던 것이다.

더구나 유기체로서 인체의 종말을 의미하는 죽음은 모든 세포가 소멸되는 상태로 봐야 한다. 이 때문에 어느 한 시점을 정해서 죽음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 죽음 인식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소생술·연명술로 도전받는 심폐사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심장과 호흡의 정지 상태를 죽음으로 판단해 온 심폐사(心肺死)도 절대적이라고 할 수 없다. 따지고 보면 의사나 일반인 모두 확인할 수 있는 그 같은 상태를 죽음으로 정하는 게 편리해서 그렇게 했을 뿐이라는 분석도 설득력 있게 들린다.

‘심장은 멎었다가도 다시 소생한다는 사실에 유념하라’는 기록이 기원전 1세기경에도 있었다든지 심장과 호흡이 멎은 것을 확인하고도 당장 매장이나 화장을 하지 않은 오랜 장례전통 역시 이 같은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장과 호흡이 멎는 것을 의학적 사망으로 판단해 온 것은 오랜 경험이 바탕이 됐다. 이것만 정확히 판단하면 죽은 사람이 회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

이 같은 심폐사설이 도전을 받기 시작한 것은 심장을 소생시키고 호흡을 연장하는 소생술과 연명술이 발달하면서부터다. 정지된 심장을 다시 뛰게 하고 멎었던 호흡을 인위적으로 되살리는 의료기술이 생기면서 인간의 죽음을 판단하는 새로운 기준이 필요하게 됐다는 것.

의학적 측면에서 본 웰다잉(Well- Dying)의 본질은 신체적, 정신적 고통 없이 죽는 것을 말한다. 물론 몇 살에 죽느냐 하는 것도 문제이기는 하다. 아주 어린 나이에 죽는 것을 웰다잉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웰다잉은 최소한 평균 수명은 사는 경우를 전제로 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가 고통 없이 편안한 죽음인가 하는 게 주요 논의 대상이다.

소생술이나 연명술이 과연 죽어가는 환자에게 어떤 도움을 주느냐 하는 문제는 이 같은 논의의 핵심이다. 소생술이나 연명술을 통해 죽을 사람이 살아나는 경우도 있지만 오히려 편안하게 죽어가는 환자에게 고통만 주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고통 없이 편안하게 죽는 것이 웰다잉

소생술과 연명술의 발달은 우선 전통적인 죽음의 정의였던 심폐사설을 부정한다. 심장이나 폐의 기능이 소실되는 과정에 소생술과 연명술이 개입함으로써 죽음의 과정을 멈추게 하거나 어느 정도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지금은 심장과 폐의 기능이 완전히 멈춘 상태는 물론 뇌의 기능이 완전 소실된 상태를 죽음으로 보고 있다. 이것이 곧 뇌사설이다.

뇌사를 죽음으로 판단하는 의학적 근거는 이렇다. 일단 뇌의 모든 기능이 소실되면 이어서 심장박동과 호흡이 정지되기 때문에 결국 심폐사로 이행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자연 상태에서는 심폐사와 뇌사 사이에 별다른 시간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기존에는 뇌사 상태라는 것이 명확히 인식되지 않았을 뿐더러 이것을 죽음의 정의로 삼을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다시 말해 뇌사에 대해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

하지만 심장 마사지 같은 소생술이나 인공호흡기 부착 같은 연명술이 발달하면서 많은 경우 죽어가는 사람을 다시 되살리는 일이 가능해졌다. 심지어 뇌의 기능이 정지된 후에도 이 같은 소생술이나 연명술을 사용할 경우 10일 정도까지는 심장이 뛰거나 호흡을 할 수 있게 됐다.

이 같은 뇌사와 심폐사의 시간차를 이용하면 아직 죽지 않은 장기를 떼어내 다른 사람에게 이식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렇듯 소생술이나 연명술은 죽어가는 환자를 살리기도 하고 뇌사자로부터 장기를 떼어내 다른 환자의 생명을 살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죽어가는 환자의 웰다잉을 저해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종교적이나 철학적 측면에서 보면 이 같은 이타적 죽음이 더 없이 ‘잘 죽는 일’이겠지만 고통 없이 죽게 도와줘야 하는 의학적 측면에서 보면 웰다잉과는 한참 거리가 먼 것이다.

인공적 생명 연장 조치는 환자에 무익

뇌사를 죽은 것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은 뇌사 상태에 빠진 환자의 생명을 인공적으로 연장하는 것이 오히려 환자에게 무익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인공적 생명 연장은 환자의 웰다잉을 저해하는 일이기 때문에 이런 일을 막기 위해서라도 뇌사 상태를 인정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본 것. 이것은 가톨릭교회가 뇌사를 사망으로 보는 것에 동의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뇌사 상태를 죽음의 개념으로 받아들인 것은 심폐사만큼 오래되지 않았다. 하지만 의학사에서 보면 결코 최근의 일은 아니다. 지난 1800년 프랑스의 해부 학자이자 외과 의사인 비샤는 인간의 생명을 동물적 생명과 유기체적 생명으로 나누었다. 동물적 생명은 뇌 활동이 중심이 되는 것인 반면 유기체적 생명은 심장과 폐가 중심이 되는 것이다.

이때 그는 전자, 즉 뇌가 손상되면 죽음이 시작되며 이것이 후자에도 영향을 미쳐 필경은 유기체적 생명도 죽게 된다는 이른바 순환-호흡-뇌기능 정지라는 생명의 고리현상을 밝혔다.

하지만 의학계에서 본격적으로 뇌사를 죽음의 판단 기준으로 하자는 의견이 나온 것은 1968년 때의 일이다. 하버드 대학교 의학부의 뇌사특별위원회가 뇌의 영구적 기능 상실, 즉 회복 불가능한 혼수상태의 기준을 발표한 후부터다.

그 이후 이 같은 기준은 국제뇌파학회, 미국 대통령위원회의 죽음 판정 가이드라인, 스웨덴 보건사회성의 죽음 판정에 관한 위원회 보고, 그리고 일본뇌파학회 뇌사위원회의 뇌사판정의 공식적인 기준이 됐다.

또한 영국 보건성 연구반의 이식 장기 채취 실시 규칙, 그리고 대한의학협회 뇌사연구 특별위원회의 뇌사판정 역시 이것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의 뇌사 문제는 지난 1970년대 초반부터 논의돼 왔다. 그동안 대한의사협회 뇌사특별위원회와 각 학회 등에서 관련 세미나와 심포지엄을 개최하면서 의학적, 법적, 그리고 윤리적 문제들을 토의해 온 것.

1980년대 말에는 대한의사협회가 꽤 까다로운 뇌사판정 기준을 제정하기도 했다. 즉 원인 질환이 확정돼 있고, 치료될 가능성이 없는 기질적인 뇌병변이 있어야 하는 등 몇 가지 선행조건을 만족시켜야 했던 것이다.



또한 외부 자극에 전혀 반응이 없는 혼수상태로 자발적인 호흡이 완전히 소실되고, 양쪽 눈의 동공이 확대된 상태로 고정돼 있어야 하며, 뇌간반사가 완전히 소실돼야 하는 것을 뇌사판정의 기준으로 정했다.

이론적으로는 이 같은 조건만 확실하게 확인되면 뇌사판정에 별 문제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뇌사를 사망 시점으로 보는 의학적 판단에는 장기 이식에 대한 유혹도 포함돼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뇌사와 심폐사 사이에서는 아직 혈액이 흐르는 장기를 적출해 이식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뇌사판정에 실용적 의도가 배제될 수 없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이 같은 점을 감안하면 뇌사판정이 죽어가는 환자 개인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병원서 임종 맞는 죽음의 의료화 현상

웰다잉의 문제와 관련해 검토해야 할 또 다른 문제는 소생술이나 연명술이 죽어가는 환자 모두에게 필요한지 여부다.

요즘 병원의 중환자실에 가보면 많은 환자들이 인공호흡기를 포함해 수액이나 영양제, 그리고 약물주입을 위한 많은 튜브를 부착한 채 누워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환자 스스로 호흡이 어렵고 음식을 섭취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배설도 할 수 없기 때문이 다. 이 같은 인공호흡기나 튜브는 모두 중환자실 환자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있어 꼭 필요한 것들이다.

특히 스스로 호흡을 할 수 없는 환자들에게 인공호흡기는 없어서는 안 되는 의료 기기. 만일 이들 환자에게서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면 당장 또는 얼마 지나지 않아 호흡이 멈추게 되고, 호흡이 멈추면 결국 심장도 멈추게 돼 사망에 이르기 때문이다.

중환자실에서 환자들에게 인공호흡기를 부착하는 것은 상태가 호전돼 더 이상 인공 호흡기가 필요하지 않을 때까지 호흡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큰 수술을 받고 나서 전신 상태 회복을 위해 잠시 중환자실에 머무는 환자의 경우가 좋은 예다.

다시 말해 중환자실은 죽어가는 환자가 머무는 곳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이유로 잠시 호흡 등이 불편한 환자들이 집중적인 치료를 받고 병세를 회복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요즘은 인공호흡기와 수액 등에 의존해 생명만을 유지해 가는 환자들이 중환자실의 병상을 차지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병원에서는 중환자실의 환자 관리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마디로 요즘은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환자들이 늘고 있으며, 이 중에는 인공호흡기 등이 갖추어진 중환자실에서 사망하는 환자가 적지 않다는 얘기다. 이 경우 임종환자를 치료해야 하는 의사의 어려움은 차치하고라도 환자 가족들이 겪는 정신적, 경제적 고통은 말할 수 없이 크다.

이 같은 현상이 빚어지고 있는 것은 의료기술과 의료기기의 발달, 그리고 병원에서 임종을 맞는 ‘죽음의 의료화’ 현상이 보편화됐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100년 전에는 병원에서 사망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1950년대 들어 50%, 그리고 최근에는 80% 의 사람들이 병원에서 사망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3분의 1은 사망 전 평균 10일 정도를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으며, 이중 절반이 인공호흡기를 부착한 채 사망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아직 미국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한 조사에 의하면 지난 2004년 이미 병원에서 사망하는 비율이 48%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추세라면 우리나라에서도 멀지 않아 대부분의 환자가 집이 아닌 병원에서 사망을 맞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경우 죽음을 앞둔 환자에 대한 인위적 생명 연장과 이로 인한 법적, 윤리적, 그리고 사회경제적 문제는 더욱 커질 것이다.

연명치료·뇌사판정에 대한 올바른 이해

환자가 고통 없이 편안하게 죽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의학적 대처는 연명치료와 뇌사 판정에 대한 올바른 이해 및 실천에서 비롯된다.

일반적으로 죽음을 앞둔 환자들에 대한 대처는 다음 3가지로 요약된다. 인공호흡기 같은 인위적 생명연장 의료기기에 의존해 환자가 사망할 때까지 치료를 계속하는 경우, 그리고 임종이 가까웠다는 의사의 판단에 따라 가족이 환자를 데려가 집에서 사망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아직은 인위적 생명연장 의료기기의 도움을 받아 치료를 해야 하는 환자를 가족이 병원 치료를 포기하고 집으로 데려감으로써 사망 시기를 앞당기게 되는 경우도 있다.

첫 번째 경우는 어쩌면 환자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무의미한 치료를 계속함으로써 환자의 인간적인 존엄성과 평화롭게 죽을 수 있는 권리를 빼앗는 일이 될 수 있다. 두 번째 경우는 임종이 가까웠다는 의사의 판단이 얼마나 정확한 것이냐 하는 과학적, 윤리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경우, 즉 의사의 지시에 반하는 퇴원의 경우는 회복될지도 모르는 환자를 적극적으로 치료하지 않은 것에 대한 법적, 윤리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의학은 회복 불가능한 환자에 대한 무의미한 치료중단을 포함, 임종환자들에 대한 보다 윤리적이고 과학적인 치료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또한 의학은 죽음의 시기를 판단하는 일에 오류가 없도록 해야 한다. 장기 이식 등의 유혹으로 인해 의식이 없는 환자의 죽음을 앞당기거나 연명술을 이용해 불필요하게 죽음을 연장하는 것은 죽어가는 환자의 잘 죽을 수 있는 권리, 즉 웰다잉을 방해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죽어가는 환자의 웰다잉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죽음에 대한 정확한 의학적 판단이 중요하다. 지금까지 모든 의학적 죽음은 전통적인 심폐사, 즉 심장과 호흡이 멎는 경우로 판단돼 왔기 때문에 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대부분의 죽음은 심폐사로 판단되고 있다.

하지만 최근 인위적으로 심장을 다시 뛰게 하고 멈추었던 호흡을 되돌리는 일이 가능해지고 있다. 이로 인해 뇌사 상태를 새로운 의학적 사망 판단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 역시 늘어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뇌사 상태를 의학적 사망 판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법적, 윤리적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굳이 뇌사 판정이 새로운 의학적 사망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장기 이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뇌사자에 대한 불필요한 소생이나 연명을 금지시킴으로써 고통 없이 위엄 있게 죽음을 맞도록 도와주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글_맹광호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

뇌사 인정 주장은 환자의 생명을 인공적으로 연장하는
것이 오히려 환자에게 무익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

서울경제를 팔로우하세요!

서울경제신문

텔레그램 뉴스채널

서울경제 1q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