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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탄생’…왜곡과 대박





최초의 스펙터클 대작. 연극을 동영상으로 옮긴 데 불과한 초기 영화의 수준을 끌어올린 영화. 영화사의 분수령. 1915년 2월15일 개봉된 3시간 13분짜리(중간 휴식 포함) 무성영화 ‘국가의 탄생(The Birth of a Nation)’에 대한 찬사다. 촬영과 편집에서도 ‘국가의 탄생’은 기념비적 영화로 평가된다. 원근과 이동 촬영, 교차 편집, 음악 삽입 등의 기술이 처음으로 선보였다. 감독 겸 제작자 데이비드 위크 그리피스는 이 작품으로 ‘현대 영화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었다. 찰리 채플린은 ‘그리피스야말로 우리 모두의 스승’이라고 말했다.

찬사의 이면에는 혹평이 상존한다. 백인 우월주의에 사로잡힌 왜곡과 허위 탓이다. 백인들의 비밀결사인 KKK 단을 마치 정의의 십자군처럼 그렸다. 반면 흑인들은 백인 여성을 겁탈해 흑인 인구를 늘려 종국에는 흑인 독재국가를 세우려는 악마로 묘사했다. 1부 남북전쟁, 2부 남부재건으로 구분된 영화에서는 두 종류의 흑인이 등장한다. 백인 주인의 보호 아래 백인에게 봉사하고 목숨까지 바치는 ‘착한 흑인’과 감히 투표권을 행사하고 백인과 맞서려는 나쁜 악마로서 흑인. 그리피스는 나쁜 흑인들이 백인 여성들을 성적으로 지배하려 든다는 설정을 영화의 주요 소재로 삼았다.

애초의 제목은 ‘클랜스맨(The Clansman).’ 인종차별주의자인 토머스 딕슨 주니어 목사가 1905년 내놓은 소설 ‘클랜스맨(가문의 사람)’을 영화로 제작하며 제목도 그대로 썼다. 딕슨 목사의 원작이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소설의 부제(副題)가 대신 말해준다. ‘KKK 단의 역사적 로망(A Historical Romance of the Ku Klux Klan).’ 흑인들에 대한 사적 린치(체벌) 와 폭력을 자행한 KKK 단을 미화한 이 소설은 그리피스 감독의 마음에 쏙 들었다. 남부 동맹군 대령의 아들이던 그리피스 감독은 원작료 1만 달러를 주기로 딕슨 목사와 계약을 맺었다.

당초 그리피스가 책정했던 제작비는 약 4만 달러. 하지만 예산이 점점 늘어나 7만 달러에 이르렀다. 딕슨 목사와 대학 동기인 우드로 윌슨 대통령을 초청해 시사회를 개최하는 등 사전 홍보비용까지 포함한 총 제작비는 11만2,000 달러. 3만 달러에 머물던 평균 제작비보다 훨씬 많았다. 예산이 늘어난 이유는 그리피스가 정확하고 정교한 장면을 원했기 때문. 전투 장면을 찍을 때는 웨스트포인트(미 육군사관학교) 전문가들의 자문까지 받았다.

예산 초과에 직면한 그리피스는 원작자 딕슨 목사에게 수정 제안을 내놓았다. 딕슨 목사는 저작료 1만 달러 대신 총수입의 25%를 받는 조건을 마지못해 수락했으나 곧 돈방석에 앉았다. 영화가 흥행 대박을 터트린 덕분이다. 평균 관람료가 5~10센트였던 시절에 2달러(요즘 가치 204달러·미숙련공 임금 상승 기준)를 받았어도 연일 매진을 기록하며 그리피스와 딕슨 목사를 부호로 만들었다. 개봉 3년 안에 국가의 탄생이 벌어들인 수익은 최소한 1,300만 달러 이상으로 평가된다. 5,000만 달러가 넘는다는 추정도 있다. 사람들의 영화에 대한 관심이 커지자 그리피스는 제목을 바꿨다. ‘국가의 탄생’으로.

반발도 컸다. 창립 10년째를 맞는 ‘전미 유색인종 지위향상협회(NAACP) 등은 이 영화가 노골적인 인종차별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며 상영금지를 요청했다. 5개 주 19개 도시가 상영을 금지했어도 미국 백인들은 이 영화를 보려고 줄을 섰다. 그리피스는 남부의 북부에 대한 적대감정을 흥행에 교묘하게 써먹었다. 링컨 대통령을 살해한 존 윌크스 부스가 저격에 성공한 뒤 2층에서 뛰어내리며 도주하는 포스터까지 붙였다. 남부 백인들의 반(反) 링컨 감정을 자극해 영화관으로 끌어오기 위해서다.





백인들이 열광한 대목은 ‘악마인 흑인을 처단하는 KKK 기병대’의 활약상. 과연 남북전쟁 직후 흑인들은 백인을 위협했을까. 영화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흑인 병사들이 투표장을 장악해 백인의 투표를 막아 주 의회 의석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고는 이상한 법을 만들어낸다. 백인이 흑인을 만나면 머리를 조아려야 하고 백인의 재산권 행사도 제한된다.’ 현실은 영화와 정반대였다. 남부는 연방헌법까지 위반해가며 흑인들의 투표권을 강제로 빼앗았다. 남부에서는 1960년대 중반까지 백인 전용 버스 좌석이 따로 있었다. 영화처럼 흑인의 겁탈을 피해 도망치다 절벽 아래로 떨어져 사망하는 백인 처녀보다 백인에게 유린 당하는 흑인 여성이 훨씬 많았다.

영화는 사회적 해악도 끼쳤다. 그리피스가 ‘미풍양속과 인간의 고귀함을 수호하는 성스러운 십자군’이라고 지칭한 KKK 단이 소멸 직전에서 극적으로 되살아났다. 국가의 탄생 개봉 7개월 후에 부활한 KKK 단은 피라미드식 조직 관리(신입회원의 가입비 10달러 가운데 4달러를 모집 권유자에게 떼어주는 방식)로 1920년 중반까지 회원수를 800만명으로 불렸다. KKK 단은 1970년대까지 이 영화를 신입회원 교육용 교재로 활용했다.

예술을 통해 사실을 왜곡한 벌을 받았기 때문일까. 그리피스와 딕슨 목사의 말년은 유복하지 않았다. ‘국가의 탄생’이 거둔 흥행에 고무된 딕슨 목사는 영화 제작에 뛰어들어 1906년 후속편 격인 ‘국가의 몰락(The Fall of a Nation)’을 선보였으나 흥행에는 실패, 거액을 날렸다. 영화 역사상 최초의 속편 영화인 이 작품은 원본 필름조차 남아 있지 않다. 딕슨이 세운 딕슨 스튜디오 역시 1921년에 도산으로 문을 닫았다. 딕슨 목사는 영화 흥행이 부진하자 KKK에게 도와달라고 간청했으나 무시당했다고 전해진다.

그리피스 감독 역시 ‘국가의 탄생’ 후속작을 찍었다. 1916년 촬영한 ‘불관용(Intolerance)’은 국가의 탄생에 대한 비판을 수용해 서양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관용을 담았다고 한다. 제작비도 32만 달러나 투입하며 그리피스는 새로운 대박을 꿈꿨으나 흥행수입은 1만 6,000달러가 전부. ‘국가의 탄생’처럼 백인 우월주의를 기대했던 백인 관객들이 철저하게 외면했다고 전해진다. ‘불관용’ 제작 이후 인생 하강길에 접어든 그리피스는 가족과도 헤어진 채 노숙자처럼 혼자 지내다 1948년 뇌출혈로 죽었다. 73살 나이였다. ‘불관용’은 그리피스 사후 재평가돼 그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힌다고 한다. 딕슨 목사는 그리피스보다 2년 빠른 1946년 83세를 일기로 죽었다.

그리피스가 ‘영화다운 영화’를 처음으로 선보인지 102년이 흐른 오늘날 영화산업의 규모는 예전과 비할 바가 아니다. 지난해 세계 영화시장 규모는 약 383억 달러. 오는 2020년께에는 500억 달러 수준으로 커질 전망이다. TV와 비디오 시장은 2,862억 달러로 이보다 훨씬 크다. 미국 할리우드의 영화 자본이 여기에서 최소한 절반을 쓸어간다. 두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첫째, 수없이 쏟아지는 미국 영화 가운데 더 이상 왜곡은 없을까. 둘째, 한국 영화나 문화예술이 세계시장에서 성장할 가능성은 얼마나 되는가. 답답하다. 정부가 한류 콘텐츠의 중국 진출을 막는데 사실상 앞장서고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나 만들고 있었으니.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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