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검색
팝업창 닫기
이메일보내기

‘결코 잊을 수 없는 허치슨 교수’

‘결코 잊을 수 없는 허치슨 교수’





‘경제학의 아버지’ 누굴까. 애덤 스미스(Adam Smith)다. 입장에 따라 수많은 학설이 충돌하는 게 경제학의 특징이지만 스미스를 근대 경제학의 시조로 간주하는 데는 이론(異論)이 없다. 스미스가 경제학의 아버지라면 누가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까. 유명한 인물이 두 사람 있다. 영국 철학자 데이비드 흄과 프랑스의 의사 출신 경제학자 프랑수아 케네. 스미스는 선배이자 친구인 흄에게서 윤리학과 도덕 철학을 배웠다. 프랑스에 장기간 체류하면서 케네가 경제의 흐름을 도표로 만든 ‘경제표(Tableau Economique)’에 영향받았다.

정작 스미스 스스로 꼽은 인물은 따로 있다. 프랜시스 허치슨(Francis Hutcheson) 글래스고 대학의 도덕철학 교수. 그는 어떤 사람인가. 박현채 교수와 더불어 70, 80년대 대표적인 진보 경제학자로 꼽히던 고 정윤형 홍익대 교수의 역저 ‘서양경제사상사 연구(1980)’를 보자. ‘국부론 전편에 흐르는 경제적 자유주의 사상은 그 맹아가 이미 글래스고 대학의 강의실에서 싹트고 있었다.’ 정 교수에 따르면 ‘스미스는 때때로 흄의 제자 또는 케네의 제자라고 불리지만, 만약 군가의 제자였다면 허치슨의 제자였다.’ 모교인 글래스고 대학 학장으로 취임(1787년)한 직후 그는 주임 교수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모교에 돌아오니 ‘결코 잊을 수 없는(the never to be forgotten) 프랜시스 허치슨 교수가 생각난다.’ 무엇이 애덤 스미스에게 허치슨을 기억에 남도록 만들었을까. 허치슨의 도덕철학 강의에 어린 스미스는 매료됐다고 한다. 당시 도덕철학이란 오늘날 윤리학과는 전혀 다른 영역의 학문. 신학(Theology)과 윤리학(Ethics), 법학(Jurisprudence)과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을 가르쳤다. 딱딱한 과목을 가르치면서도 허치슨 교수는 인기가 많았다. 그는 색깔이 분명했다. 영국을 통틀어 라틴어를 거부하고 영어로 강의한 최초의 교수였다.

종교에 대한 허치슨의 생각도 학생들을 강의실로 끌어당겼다. 신(神)은 신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고 믿었다. 신은 우주의 창조주가 분명하고 만물에도 신의 뜻이 깃들어 있어 일단 창조된 이후에는 독자적 법칙에 의해 움직인다고 믿은 자연신학자였다. 세상의 모든 변화는 신의 뜻에 의한 것이라던 교회와 대립했어도 학생들은 허치슨 교수를 옹호했다. 스미스는 특히 허치슨의 종교적 자유주의에 크게 영향받았다. 인간은 신을 알기 전, 또는 알지 못해도 선악을 판단할 수 있다는 강의를 교회에서 문제 삼았다. 스미스가 입학했던 1737년 이 문제가 불거졌다.

당시 교수 12명, 학생 수라야 500여 명에 불과했던 글래스고 대학은 허치슨 교수를 해임하라는 압력에 굴하지 않고 교회와 맞서 싸웠다. 스미스의 정치경제학, 근대경제학의 저변에 흐르는 자유주의는 허치슨 교수와 글래스고대학의 독특한 자유주의 학풍 속에서 배양된 셈이다. 허치슨은 태생부터 반(反) 주류로 태어났다. 영국의 변방으로 잉글랜드군의 침입과 학살이 빈번하던 1694년 북아일랜드에서 스코틀랜드 장로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생일 8월 8일) 반영 분위기가 강했다던 글래스고대학에서 공부했다.

문학과 철학, 신학을 공부해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허치슨은 더블린으로 돌아와 10여 년을 사립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뛰어난 졸업 성적에도 모교에 남지 못한 이유는 두 가지. 아일랜드인에 대한 차별과 자연 신학으로 교회의 비위를 건드린 탓이다. 글래스고 대학은 1729년 교회의 반대를 뚫고 허치슨을 모교의 도덕철학 교수로 임용했다. 익명으로 출간한 ‘미와 덕의 관념의 기원(1725년)’의 실제 저자라는 사실이 밝혀진 직후다. 허치슨은 이 책에서 인간은 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태생적으로 도덕적이며 타인의 행복을 바라는 이타심을 갖고 있다고 주장해 교회의 미움을 샀으나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허치슨의 시대에 영국 사상계의 흐름은 크게 두 가지. 토머스 홉스에서 버나드 맨더빌에 이르는 윤리적 이기주의와 샤프트베리 백작과 존 로크, 허치슨이 계보를 이은 이타설에 입각한 도덕감 이론이었다.(박우룡 서강대 연구교수 ‘아담 스미스의 도덕 사상-도덕감정론을 중심으로’) 자기 보존을 목적으로 하는 약한 존재인 인간은 이기적일 수밖에 없고 이기심이 공공의 이익과 부합할 수 있다는 게 전자, 후자는 신이 인간에게만 선천적으로 내재하는 도덕감을 줬기에 이타심이 사회를 이끈 요인이라고 봤다.

우리나라 경제 정책의 가장 큰 논란거리인 성장이냐 분배냐의 문제도 이와 관련이 있다. 스미스의 초기 저작인 ‘도덕감정론(1759년)’은 허치슨의 ‘도덕철학체계론’과 내용은 물론 목차마저 비슷하다. 허치슨처럼 이타심을 중시하던 스미스가 국부론에서는 개인의 이기심을 강조하게 된 이유는 경제학의 해묵은 논란거리다. ‘보이지 않는 손’은 시장만능주의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동정심을 내포한 것이라는 주장에서 성장이냐 분배냐의 논쟁까지 그 기원에는 허치슨이 있는 셈이다.

허치슨은 조세론과 통계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도덕철학체계론’에서 ‘여러 세대에 걸친 부의 축적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면 부에 대한 과세가 가능하다’는 대목은 누진과세의 원리를 주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통계학의 역사를 다룬 책자 ‘세계를 삼킨 숫자 이야기(I.B. 코언)’에 따르면 허치슨은 공공의 이익과 개인의 도덕성을 계산할 수 있는 공식(‘B=(M±I)/A’)을 만들기도 했다. 방정식 ‘B=(M±I)/A’에서 B는 이타심, 또는 덕이다. M은 공익의 양, A는 능력, I는 사익(私益)의 정도를 뜻한다.

허치슨은 이 수식을 활용해 도덕성의 여러 상식을 숫자로 표현하려고 시도했다. 동일한 도덕적 능력(A)을 타고난 두 사람이 있다면 공익(M)을 더 많이 생산한 사람이 더 선하다, 즉 이타심(B)이 강하다. 반대로 어떤 두 사람이 동일한 양을 사회에 기여했다면 재능이 많은 사람 쪽이 덜 선하다. 더 많은 공익을 생산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수식의 더하기와 빼기 부호를 통해 허치슨은 사익이라는 요소를 제어할 수 있다고 봤다. 허치슨이 이 수식을 통해 얻은 결론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달성하는 행위가 최선’이라는 것이다. 제러미 밴덤의 공리주의가 등장하기 50여 년 전에 이미 개념을 정확하게 제시한 것이다.

애덤 스미스에게 글래스고 대학의 도덕철학 교수 자리까지 물려줬던 허치슨은 53번째 생일은 맞은 1747년 8월 8일 삶을 마쳤다.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인간 사회가 보다 이타심이 많은 사회로 변했을까. 허치슨의 공식을 대입하면 우리 지도자들은 어떤 평가가 나올까. 공익을 측정할 기준만 제대로 설정한다는 전제 아래 허치슨의 공식이 어느 때보다도 필요해 보인다. 공식이 조금 더 진전돼 자신은 이기적이면서도 타인에게는 이타심을 바라는 사람까지 가려낼 수 있는 산식이 나오면 좋겠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

서울경제를 팔로우하세요!

서울경제신문

텔레그램 뉴스채널

서울경제 1q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