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부부처 A과장은 인사발령을 앞두고 PC에 보관된 자료를 모두 지웠다. 후임자를 위해 세세하게 인수인계 자료를 만들어놓았던 과거와는 딴판이다. 자신이 맡았던 정책과 업무처리에 대해 나중에 꼬투리가 잡힐 수 있겠다고 생각해 관련 기록을 없애는 것이다. 요즘 세종 관가에서는 업무지시를 받거나 회의를 할 때 사무관들이 녹음을 하거나 꼼꼼히 메모하거나 아예 캡처를 하는 ‘신(新) 풍속도’가 생겼다. 훗날 책임을 덤터기쓰지 않으려는 자기방어 본능이다.
22일 관련부처에 따르면 최근 정치적 이유로 세종 관가를 정조준한 정당의 고발과 검찰 압수수색, 고강도 감찰이 꼬리를 물면서 관료들이 ‘정치 희생양이 되는 것 아니냐’며 극도로 몸을 사리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는 기회 있을 때마다 적극 행정을 외치지만 현실에서는 보신주의와 복지부동이 판을 치는 형국이다.
최근 기획재정부는 내년 예산안 국회 통과 과정에서 직권남용을 했다며 구윤철 2차관, 안일환 예산실장, 안도걸 예산총괄심의관이 자유한국당으로부터 검찰에 고발됐다. 또 검찰은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으로 지난 20일 기재부 타당성심사과를 압수수색했다. 2016년 11월 면세점 사업 선정 과정 의혹과 관련해 최상목 당시 기재부 1차관실을 압수수색한 뒤 3년 만에 처음이다. 정부부처의 B과장은 “과장급 이상은 고발되지는 않더라도 만약 정권이 바뀌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법적 책임은 지지 않겠지만 나중에 인사상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어 위축될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공무원들은 요즘 교도소 담벼락을 걷는 심정이라고 한다. 여차하면 직권남용과 직무유기 낙인이 찍힐 수 있어 옴짝달싹하기 힘들다. 정열적으로 일하다 보면 직권남용의 멍에를 쓸 수 있고 반대로 일손을 놓으면 직무유기 꼬리표가 달린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직권남용 관련 고소·고발은 2015년 6,045건이었지만 올해 상반기만도 8,313건으로 급증했으며 직무유기도 같은 기간 9,137건에서 1만1,916건으로 늘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관가에서는 땅바닥에 낙지처럼 달라붙어 움직이지 않는다는 ‘낙지부동’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심심찮게 들린다.
사무관급 실무자들은 나중에 책임추궁을 당할까 봐 보고서에 ‘과수(과장 수정)’ ‘국수(국장 수정)’ 등 누구 지시로 수정했는지를 상세하게 표기한다. 직급을 막론하고 수첩이나 개인 휴대폰에 업무수행 근거를 자세히 남기는 습관이 생겼다. C과장은 “검찰 수사가 들어온다고 하니 지레 겁을 먹을 수밖에 없다”며 “녹음이 일상화됐다. 카카오톡 대신 보안성이 높은 텔레그램을 사용한다”고 귀띔했다.
축소지향형 공직사회가 된 데는 정부의 책임이 적지 않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이전 보수정권이 집행한 정책에 대해 적폐 딱지를 붙이고 실무자를 한직으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는 박근혜 정부 시절 추진됐던 양대지침(일반해고·취업규칙 변경요건 완화)과 노동개혁 과제를 적폐로 몰았다. 문화체육관광부도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130명에 달하는 공무원과 산하기관 관계자들이 수사의뢰나 징계권고 대상이 됐다.
경제부처의 한 사무관은 “현 정권 들어 불거진 적폐청산 논란을 겪으면서 공무원들이 과거에 비해 절차를 좀 더 세밀하게 따지고 이해관계가 첨예한 업무는 아예 맡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면서 “정권 차원에서 추진되는 공약 업무에서 비켜나 있는 게 롱런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고 말했다. 최고의 관운(官運)은 정권이 바뀌어도 하등 문제 될 것이 없는 업무를 담당하는 것이라는 자조 섞인 한탄도 나온다.
산업통상자원부의 경우 한때 탈원전정책을 담당하는 에너지 관련 부서가 기피 대상이었지만 지금은 내년 전기료 체계 개편 작업을 하고 있는 전력 담당 부서로 불똥이 옮겨붙었다. 전기료 체계 개편은 정무적 판단이 필요한 영역인 만큼 업무를 매끄럽게 처리하더라도 부처에서 만든 계획이 청와대 등 윗선과 어긋날 수 있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급기야 40대 젊은 과장들 사이에서는 초임 때의 소명의식이 점점 엷어지고 공직생활에 대한 회의감이 커지면서 민간으로 향하는 엑소더스 사례까지 나타나고 있다. 권기석 한밭대 공공행정학과 교수는 “선한 의도로 열심히 일했던 중간 이하 관리자까지 정치적 잣대로 과도하게 재단하는 것은 문제”라며 “스스로 일을 찾아 책임지고 성과를 내는 조직문화를 만들어야 하는데 리더십 측면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세종=황정원·한재영기자 garde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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