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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스&] 예술가로 학자로…세상의 벽 허문 '위대한 그녀들'

■동등한 우리: 집 안의 천사, 뮤즈가 되다

매기 도허티 지음, 위즈덤하우스 펴냄

60년 美래드클리프 女장학생 뽑힌

앤 섹스턴·맥신 쿠민·틸리 올슨 등

낡은 편지·일기·가족 인터뷰 파헤쳐

여성 작가로 겪은 고뇌 생생히 전해

그들간 질투·존경·경쟁하며 교류

우리 모두 연결되었단 사실 깨달아





‘논픽션(non-fiction)’은 말 그대로 허구가 아닌 사실을 바탕으로 한 글, 영화, 소설 등을 말한다. 미국 평론가 바버라 라운즈버리는 이 중 현실 세계에서 벌어진 일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고, 철저한 연구와 고증을 통해 사건을 재현한, 문학적 우수성이 높은 글을 ‘내러티브 논픽션’이라고 부른다.

문학가이자 역사학자인 매기 도허티가 쓴 ‘동등한 우리: 집 안의 천사, 뮤즈가 되다’는 1960년 미국 래드클리프 대학에서 추진된 전례 없는 ‘어머니 학부생’을 위한 장학 프로그램, ‘래드클리프 독립연구소’를 집중 조명한 ‘내러티브 논픽션’이다. 1960년 미생물학자였던 잉그레이엄 번팅은 너무도 많은 여성 학부생들이 가족을 보살피면서 연구할 방법을 찾지 못해 학자·예술가의 꿈을 포기하는 현실을 지켜봤다. 그는 이같은 현실이 여성 개인 뿐 아니라 사회와 국가에도 큰 손실이라고 판단, 래드클리프 총장직을 제안 받으면서 ‘지적으로 추방당한 여성들’을 궤도로 돌려놓는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어머니를 위한 장학 프로그램, ‘래드클리프 독립연구소’를 설립한 것이다.

여성을 위한 장학 프로그램을 소재로 한 ‘논픽션’이라니, 얼핏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다. 이미 세상에는 수많은 여성주의 관련 콘텐츠가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책이 문단과 언론의 찬사를 받고 ‘2021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최종 후보에 오를 만큼 작품성을 인정받은 데는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생생한 ‘내러티브(이야기)’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



최대 3000달러의 지원금과 개인 작업실, 하버드 도서관 이용 권한 등을 부여하는 이 전례 없는 장학 프로그램에는 수많은 여성들이 지원했다. 시인 앤 섹스턴과 맥신 쿠민, 소설가 틸리 올슨, 화가 바버라 스완, 조각가 마리아나 피네다 등이 이 혜택을 통해 1~2기 장학생으로 선발됐다.

저자는 이들을 존재하게 한 독립연구소의 프로그램의 업적을 강조하는 대신, 각 여성들이 프로그램에 참여해 겪었을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에피소드를 발굴한다. 주인공들의 오래된 문서와 노트, 편지, 일기, 작품, 기사와 가족 인터뷰를 모두 파헤쳐 철저하게 사실을 고증한 것. 장학생으로 선발된 섹스턴이 쿠민을 포함한 다른 여성 작가들을 알게 됐지만 적극적으로 교류할 수 없었던 현실을 묘사한 ‘누가 내 경쟁자인가(2장)’, 섹스턴과 쿠민이 서로를 향한 존경과 함께 질투심을 노골적으로 내뱉는 장면이 묘사된 ‘집으로 가는 길이 어디죠?(18장)’ 등은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가 쓴 글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당시 상황이 세세하게 묘사돼 있다. 특히 작가는 ‘주제: 이기적, 징징거림’으로 시작하는 섹스턴이 쿠민에게 보낸 편지를 해설을 덧붙여 소개하는데, 작가의 설명 덕분에 독자들은 두 사람이 여성 작가로서 겪었을 고뇌와 부담, 서로를 향한 사랑과 묘한 경쟁심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다.

1974년 섹스턴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 후 에이드리언 리치는 추도사에서 ‘머리는 종종 가부장적이되, 그의 피와 뼈는 페미니스트임을 그는 잘 알았다’라고 쓴다. 반 세기 전 미국의 여성들이 경험한 고뇌는 지금도 이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칭하는 것에 거부감을 갖지만, 우리가 직업인, 어머니로서 살아온 삶 자체는 뼛속까지 페미니스트일 수밖에 없다. 옮긴이가 ‘동등한 사람들’이라고 해석되는 원서의 제목을 ‘동등한 우리’라고 번역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저자는 책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수많은 교류 현장을 드라마처럼 보여주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우리도 알게 모르게 연쇄적으로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이 책은 원서의 부제 ‘예술과 여자들의우정과 1960년대 여성 해방 이야기’를 ‘집 안의 천사, 뮤즈가 되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고립되어 있던 여성들이 래드클리프 독립연구소를 통해 서로에게, 또 세상에 이름을 남기는 ‘서로의 뮤즈’가 되었다는 의미다. 1만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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