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년간 칠레 통신 인프라를 지배해온 스페인 자본이 물러나고 있다. 그 자리를 멕시코 자본이 빠르게 메우면서, 중남미 통신 권력의 중심축이 스페인에서 멕시코로 이동하고 있다. 칠레는 이 변화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무대다. 이는 단순한 기업 간 인수합병(M&A)이 아니라 디지털 인프라 패권의 이동이라는 상징적 사건이다.
1980년대 말 칠레는 군사정권 하에서 기간산업 민영화를 추진했다. 당시 국영 통신사 CTC는 기술 경쟁력이 취약해 외자 유치가 필요했다. 스페인의 텔레포니카(Telefonica)는 1989년 지분 43%를 인수하며 칠레 시장에 진입했다. 스페인은 자본·기술을, 칠레는 제도 안정성과 수요 기반을 제공하며 통신 현대화를 이끌었다. 텔레포니카는 칠레를 교두보로 페루,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브라질로 확장했다. 1990년대 말 중남미 통신시장에서 40% 이상의 점유율을 확보하는 등 사실상 독점적 지위를 누렸다. ‘총칼이 아닌 통신망으로 지배한다’는 신(新)식민주의 논란까지 촉발될 정도였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 이후 4세대(4G)·5세대(5G) 전환에 따른 투자 부담과 포화 경쟁 환경 속에서 텔레포니카의 수익성은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 틈을 타 멕시코의 통신재벌 카를로스 슬림이 부상했다. 그의 어메리카 모빌(AMX)은 공격적 가격 정책과 인수합병으로 남미 22개국에서 수억 명의 가입자를 확보하며 역내 최대 통신 기업으로 성장했다. 칠레에서는 2022년 Claro와 VTR을 합병해 모바일과고정 광대역을 통합 지배할 기반을 갖췄다.
텔레포니카는 결국 남미 사업을 단계적으로 정리하기로 했고, 칠레 법인인 모비스타 칠레(Movistar Chile) 역시 매각 대상으로 지목됐다. 스페인 자본의 퇴장 준비가 본격화된 것이다.
공백을 노리는 기업은 AMX와 칠레 최대 사업자 엔텔(Entel)이다. 칠레 유력 일간지 라 테르세라(La Tercera)는 두 기업이 한때 공동 인수전을 논의했으나 최근 각자 독자 입찰로 선회했다고 보도했다. 칠레 경제지 디아리오 피난시에로(Diario Financiero)는 “누가 인수하든 멕시코 자본의 영향력 확대는 불가피하며, 이는 칠레 통신시장 지배 구조의 근본적 재편을 뜻한다”고 분석했다.
주목할 점은 이 변화를 칠레 사회가 주권과 자존심의 문제로 본다는 것이다. 칠레는 중남미에서 가장 먼저 통신 민영화를 성공시킨 국가다. 이 성취는 ‘남미 기술 선도국’이라는 국가적 자부심을 뒷받침해 왔다. 그런데 그 상징적 자산이 같은 라틴아메리카의 경쟁자에게 넘어간다는 상황은 정치·사회적 감정을 자극하고 있다.
디아리오 피난시에로는 “우리가 이 정도도 스스로 지키지 못하는가”라는 비판 여론을 전했고, 라 테르세라는 이번 인수전이 “남미의 데이터 혈관을 누가 지배할 것인가”라는 디지털 주권 전쟁의 본질을 드러냈다고 해석했다. 통신망은 금융, 보안, 콘텐츠, AI 생태계를 아우르는 국가 주권의 핵심 기반이다.
그러나 감정과 현실은 다르다. 광대역 투자, 5G·인공지능(AI)·보안 인프라는 모두 막대한 자본이 필요한 영역이다. 글로벌 경쟁 환경 속에서 칠레 기업 단독 생존은 어렵다. 시장 논리가 자존심을 압도하는 국면인 것이다. 칠레 통신망의 지배권이 스페인에서 멕시코로 이동한다는 것은 곧 라틴아메리카 디지털 권력의 재편을 의미한다. 한 시대를 지배했던 스페인의 통신 제국은 종말을 맞고, 그 자리를 멕시코가 차지하고 있다.
칠레는 지금 글로벌 디지털 패권 이동의 최전선에 서 있다. 이 변화는 단순한 인수전이 아니라 새로운 권력 구조의 시작이다. 결국 이 질문이 남는다. “누가 중남미의 데이터 혈관을 지배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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