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5월 취임 직후부터 “과학기술이 미래”라고 줄곧 강조해 왔다. 정부가 내년 연구개발(R&D) 예산을 35조 3000억 원 규모로 올해 대비 약 21.4%나 증액한 것이 이 때문이다. 전임 윤석열 정부는 2023년 8월 과학기술계를 이권과 예산을 나눠 먹는 카르텔로 단정하고 다음해 예산을 대폭 삭감했었다.
현 정부는 최우선 중심 과제로 인공지능(AI)을 성장의 축으로 내세울 만큼 대통령이 과학기술 발전에 진심인 듯하다. 기업 출신으로 나이 50이 안된 AI 전문가들을 부총리 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과 AI미래기획수석으로 각각 과감하게 발탁한 것만 봐도 그렇다. 대통령의 과학기술과 AI 생태계 조성을 기반으로 한 신성장 산업 육성에 대한 의지와 애정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현 정부 출범 이후 6개월이 지난 현재 우리의 과학기술계 현실은 어떠한가. 역대 정부에서도 그러했듯이 초기에는 과거 정부 때 임용됐던 기관장들에게 자진 사퇴 또는 후배를 위한 용퇴를 종용한다는 소문이 난무할 정도로 뒤숭숭했다. 다행히 요즘에는 좀 잠잠해졌지만 여전히 정부출연연구원 원장과 과학기술원 총장 자리가 줄줄이 오랫동안 공석이거나 교체가 늦어지면서 불씨가 남아있다. 각 기관과 학교마다 행정 공백에 대한 우려가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을 비롯해 기초과학연구원(IBS) 등 23개 출연연, 기후환경에너지부 산하 한국에너지공대(KENTECH) 등 진작 장의 임기가 만료됐거나 내년 3월 말까지 종료 예정인 곳은 총 10여 곳에 달한다. 이미 한국에너지공대(2023년 12월), 한국한의학연구원(2024년 4월), 기초과학연구원(2024년 11월), 한국뇌연구원(2024년 12월), KAIST(지난 2월), 국가녹색기술연구소(올해 11월)의 장이 이미 임기가 만료됐으나 후임이 언제 정해질지 예측하기 힘든 실정이다. 여기에 이달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과 한국원자력연구원을 시작으로 내년 1월 한국전기연구원, 내년 3월 한국화학연구원의 기관장도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다.
특히 국내 과학계를 대표하는 기초과학연구원(IBS)과 KAIST의 리더십 공백은 매우 심각하다. IBS의 경우 2019년 취임한 노도영 원장이 작년 11월 임기 만료 후 1년이나 넘게 후임자 인선을 기다렸지만 관련 절차가 진행되지 않았다. 이에 노 원장은 부득이 지난달 개인 사정을 이유로 전 직장인 광주과학기술원(GIST)에 복귀했다. IBS 사례는 정치 논리가 개입된 우리 과학계의 씁쓸한 현실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KAIST의 사정은 더 복잡하다. 현 총장의 임기 만료 다음달인 지난 3월 3배수로 차기 총장 후보를 선출한 이후 모든 절차가 중단된 상태다. KAIST 안팎에서는 정관과 규정에 따라 총장후보선임위원회가 뽑은 3배수 후보에 대해 후속 절차를 진행하기보다 현 정부에서 새롭게 공모 절차를 밟을 수도 있다는 괴소문까지 돈다. 만약 시중의 소문대로 재공모가 이뤄진다면 과거 정부처럼 과학기술계에 대한 정치권의 과도한 개입이라는 비판이 재연될 것으로 우려된다. KAIST 이사진(15명) 중 내년 2월 말 5명, 내년 5월 초 2명의 이사가 각각 임기가 끝나는데 자칫하면 리더십 부재 사태가 장기화할 수도 있다.
출연연과 과기원 등의 수장은 연구와 교육 방향을 정하고 국가 R&D 과제를 이끄는 역할을 한다. 산학연의 유기적 기술 사업화와 인재 확보, 글로벌 협력을 책임진다. 따라서 정부가 진정으로 과학기술 강국을 만들고 미래 성장동력을 확충하려면 과학기술계의 리더십의 공백 사태를 방치해서는 안된다. 이재명 정부가 중점을 두는 AI, 반도체, 에너지 등 첨단 분야는 자본과 시간의 싸움으로 결정된다. 지금은 AI·반도체 등 첨단산업 생태계 활성화와 에너지 확보에 국가의 미래가 걸려있다. ‘인사가 만사’라고 했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글로벌 기술 패권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계의 리더십을 하루빨리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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