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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별세]미래 먹거리로 선택한 ‘바이오시밀러’…10년 만에 '우뚝'
산업 바이오 2020.10.25 16:15:38“삼성을 대표하는 대부분의 사업·제품은 10년 안에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사업이 자리잡아야 한다” 사망한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회장은 건재하던 지난 2011년 신년사에서 ‘새로운 10년을 여는 사업구조 선순환’을 강조하며 이 같이 말했다. 기존 사업을 대신할 만한 새로운 미래 먹거리를 발굴하라는 주문이었다. 삼성그룹은 이미 2007년부터 미래 신수종 6대 사업 중 하나로 지목한 ‘바이오’ 분야를 미래 먹거리로 선택했다. 그 해 2월 삼성은 미국 바이오제약 서비스업체 ‘퀸타일즈’와 자본금 3,000억원 규모의 합작사를 설립하며 국내에서는 생소하던 ‘의약품위탁생산(CMO)’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오늘날 CMO 분야에서 세계를 이끄는 ‘삼성바이오로직스(207940)’의 시작이다. 당시 삼성은 2007년부터 개발을 진행 중인 혈액암, 림프암 치료제 ‘리툭산’을 2016년부터 본격적으로 양산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미국 로슈가 개발 중인 리툭산의 특허 조기 만료를 겨냥해 ‘바이오시밀러’ 개발에 뛰어들었다. 당시 2012년부터 2015년 사이에 전 세계 수많은 신약의 특허 만료가 예정돼 있다는 사실을 내다본 시의적절한 도전이었다. 특히 선진국이 바이오시밀러를 보험에 적용하기로 결정하면서 유망 시장이 될 것이라는 혜안도 있었다. 그 후 10년 이건희 회장이 기획한 ‘미래 먹거리 발굴’ 사업은 순항하고 있다.삼성바이오로직스는 지난 3·4분기 매출액 2,746억원, 영업이익 565억원의 실적을 발표했다. 올해 3·4분기까지의 매출과 영업이익이 이미 지난 해 수준을 뛰어넘었다. 업계에서는 이미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올해 연간 매출액이 1조원을 돌파할 것이라는 전망도 내놓고 있다. 이 같은 실적은 끊임없는 투자에서 나왔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2018년 바이오를 4대 미래 성장사업으로 내세우며 2020년까지 180조원을 투자하고 4만명을 채용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런 계획으로 삼성바이오로직스는 단일 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생산 시설인 인천 송도3공장(18만ℓ)을 보유하고 있으며 현재는 25만6,000ℓ 규모의 제4공장을 2022년 말 가동을 목표로 건설 중이다. 4공장이 완성될 경우 삼성바이오로직스는 글로벌 바이오의약품 위탁생산의 30%를 담당하게 된다. 한편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이달 말 미국에서 새로운 연구개발(R&D) 센터를 개소하면서 글로벌 사업을 본격화 한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바이오로직스는 한국 시간으로 오는 29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위탁개발(CDO) R&D 센터를 열고 미국 , 유럽 등으로 글로벌 네트워크를 확장할 예정이다. /서지혜기자 wise@@sedaily.com -
[이건희 별세]민주노총 "공과 존재...제대로 된 노사관계 있어야"
사회 사회일반 2020.10.25 16:12:48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의 별세에 대해 민주노총은 “모든 것에 공과가 존재한다”며 “삼성그룹에 제대로 된 노사관계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라”고 밝혔다. 민주노총은 25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사망에 대한 민주노총 입장’이라는 제목의 논평을 내놨다. 민주노총은 “이건희 회장은 2세 승계 후 반도체, 휴대폰 사업의 진출과 성공으로 삼성그룹을 자산총액 1위의 기업그룹으로 일구어 ‘한국 산업의 양적 성장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며 “그러나 이건희 회장이 만든 삼성의 성장은 정경유착과 특혜로 점철된 역사”라고 평가했다. 민주노총은 “모든 것에 빛과 그림자가 있고 공과 과가 존재한다”며 “이제 남겨진 이재용 부회장과 삼성그룹은 남겨진 그림자와 과를 청산하고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 정상적인 기업집단으로 국민들에게 기억되고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민주노총은 정계와 관계 언론 등에 구축한 ‘삼성 공화국’의 해체, 순환출자를 통한 기업 지배 구조의 혁신, 삼성그룹에 제대로 된 노사관계 형성, 반도체 사업장 피해자에 대한 사죄 등을 요구했다. 민주노총은 “이건희 회장의 죽음으로 위의 사안들이 정리될 수 없다”며 “남겨진 이재용 부회장과 삼성그룹의 몫으로 이건희 회장의 죽음을 계기로 환골탈태하기를 바란다”고 논평을 마쳤다./변재현기자 humbleness@@sedaily.com -
"마누라·자식 빼고 다 바꿔라"…자만 빠진 삼성 깨운 한마디 [이건희 별세]
산업 기업 2020.10.25 15:37:45“결국 내가 변해야 한다. 바꾸려면 철저히 바꿔야 한다. 극단적으로 얘기해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야 한다. 나는 앞으로 5년간 이런 식으로 개혁 드라이브를 걸겠다. 그래도 바뀌지 않으면 그만두겠다. 10년을 해도 안 된다면 영원히 안 되는 것이다.”(1993년 6월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회의)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이 한마디로 삼성그룹 제2의 창업을 이끌었다. 삼성그룹 전반에 뿌리 깊게 자리했던 ‘국내 제일주의’라는 인식을 뒤바꿨다. 삼성은 품질혁신으로 세계적 초일류 기업으로 도약했다. 디자인경영·인재경영·마하경영 등 다양한 혁신이 나오게 된 밑바탕에 신경영 선언이 있었다. 지난 1990년대 초반 삼성은 동남아시아 일부 시장에서만 부분적으로 성공을 거뒀을 뿐 미국·일본 등 선진국 시장에서는 싸구려 취급을 받고 있었다. 1993년 2월 이 회장이 전자 관계사 주요 임원을 데리고 찾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 현지 매장에서 삼성 제품은 한쪽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박혀 있었다. 이 회장은 이를 가리켜 “삼성이라는 이름을 반환해야 한다. 한쪽 구석 먼지 구덩이에 처박힌 것에다 왜 삼성이라는 이름을 쓰는가? 이는 주주·종업원·국민·나라를 기만하는 행위”라며 통탄했다. 당시 삼성 경영진의 관심은 오로지 눈앞의 양적 목표 달성에만 있었다. 생산과 판매 수치에만 급급해 부가가치, 시너지, 장기적 생존전략과 같은 질적 요인들은 뒷전이었다. 이 회장은 당시 “이대로 가다가는 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내가 등허리에 식은땀이 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3년 6월4일 이 회장은 일본 도쿄에서 삼성의 경영현장을 지도해온 일본인 고문들과 삼성이 지닌 고질적 문제점들에 대해 새벽까지 회의를 했다. 삼성전자(005930) 정보통신부문 디자인부서를 지도했던 후쿠다 다미오 고문은 “삼성은 상품 기획이 약한데다 개발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시장에 물건을 내놓는 타이밍도 놓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도쿄에서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도 문제의 해결 방법을 찾아 사장단들과 끊임없이 토의했다. 그리고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한 이 회장은 또다시 충격을 받게 된다. 세탁기 조립라인에서 세탁기 덮개 여닫이 부분의 규격이 맞지 않아 덮개가 닫히지 않자 직원들이 즉석에서 덮개를 칼로 깎아내고 조립하는 모습이 담긴 품질고발 사내방송을 본 것이다. 이 회장은 비장한 각오로 1993년 6월7일 임원과 해외 주재원 등 200여명을 프랑크푸르트 켐핀스키호텔로 불러 모았다. 그렇게 마누라 빼고 다 바꾸라는 신경영 선언이 나오게 됐다. 이 회장은 이후 신경영을 전파하기 위해 직접 발로 뛰었다. 1993년 6월부터 8월 초까지 프랑크푸르트에서 도쿄에 이르는 대장정을 통해 이 회장은 사장단, 국내외 임원, 주재원 등 연인원 1,800여명을 대상으로 회의와 교육을 실시했다. 임직원들과의 대화시간은 350시간에 달했으며 이를 풀어 쓰면 A4용지 8,500장에 해당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삼성의 초일류를 향한 출발은 불량 추방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생산현장에서 불량이 발생할 경우 생산라인 가동을 중단하고 제조 과정의 문제점을 완전히 해결한 다음 재가동하는 ‘라인 스톱제’를 도입했다. 생산물량이 밀려 있어도 라인을 멈춰야 했기에 생산 담당자들에게는 고역이었다. 하지만 효과는 컸다. 1993년 전자제품의 불량률은 직전해보다 적게는 30%, 많게는 50%까지 줄어들었다. 신경영 선언은 당시 경제계에도 충격을 안겼다. 양적 성장에만 몰두한 채 내달리던 산업계는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질적 성장도 함께 이뤄져야 함을 인식하게 됐다. 1993년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는 그의 질(質) 경영을 자세히 보도해 눈길을 끌었다. 이 신문은 “삼성 제품의 질적인 문제점을 외부인이 아닌 이 회장 본인이 제시했다는 점이 무엇보다 특이하다”며 “이런 개혁 캠페인은 삼성뿐 아니라 한국의 미래를 위협하는 고질병을 치유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삼성의 영원한 라이벌인 LG 역시 비슷한 시기에 ‘일사일품’ 운동을 전개하며 상품의 질 개선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된다. 아시아도 긴장하기 시작했다. 미쓰비시·마루베니·스미토모·이토추 등 일본 9대 종합상사 지점들은 가장 경영을 잘하는 기업인으로 일제히 이 회장을 지목했다./변수연기자 diver@@sedaily.com -
[이건희 별세]이부진·서현 손 잡고 CES 관람…각별했던 딸 사랑
산업 생활 2020.10.25 15:11:47“이번에 우리 딸들 광고해야겠다.” 25일 별세한 이건희 삼성전자(005930) 회장은 지난 2010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가전전시회(CES)에서 두 딸의 손을 꼭 잡고 부스를 둘러보며 이같이 말했다. 이 회장은 딸들의 손을 꼭 붙잡고 공식 석상에 등장하는 모습이 언론에 자주 노출될 정도로 각별한 딸 사랑으로 유명했다. 이 회장은 홍라희 전 리움 미술관장 사이에 이재용 현 삼성전자 부회장과 이부진 호텔신라(008770)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故이윤형씨를 낳았다. 맏딸 이부진 현 호텔신라 사장은 아버지와 꼭 빼닮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외모부터 강한 카리스마와 승부욕이 강한 경영스타일까지 이 회장과 가장 비슷하다는 얘기를 듣는다. 차가워 보이는 외모와 달리 소탈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 사장은 1970년생으로 대원외고, 연세대 아동학과를 거쳐 2001년 호텔신라에 몸담았다. 2004년 호텔신라 상무보로 승진한 뒤 2010년 사장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현재도 호텔신라 사장을 맡고 있다.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임우재 전 삼성전기 고문과의 결혼으로 화제를 모았지만, 올해 초 5년여의 재판 끝에 이혼을 확정지었다. 임 전 고문은 이 사장의 재산인 2조5,000억원의 절반가량인 1조2,000억원을 이혼 위자료로 요구했지만, 141억원을 지급받았다. 둘째 딸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은 2018년 삼성물산(028260) 패션부문 사장에서 물러난 뒤 복지재단을 맡고 있다. 서울예고와 미국 뉴욕의 파슨스디자인스쿨 출신인 그는 2002년 제일모직 패션연구소 부장으로 입사한 뒤 의류패션 분야에 있었다. 패션 전문 지식과 경험이 풍부하면서도 사적으로는 부드럽고 여성스러운 면이 많다는 평이다. 이 이사장은 동아일보 김병관 명예회장의 차남 김재열씨와 결혼했다. 김재열씨는 미국 웨슬리언대 국제정치학과, 존스홉킨스대 석사, 스탠퍼드대학교 MBA를 거친 뒤 제일기획 상무보, 경영대학원에서 석사를 밟고 나서 2002년 제일모직 상무보를 거쳐 2011년 사장까지 올랐다. 제일기획 스포츠 총괄 사장을 거쳐 현재는 삼성경제연구소 스포츠마케팅 연구부문 사장으로 있다. 막내 딸인 故윤형씨는 2005년 미국 유학 도중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윤형씨는 2004년 SK커뮤니케이션즈의 싸이월드에 개설한 미니홈피가 소개되면서 화제가 됐었다. 당시 윤형씨는 재벌가 딸답지 않은 소탈하고 귀여운 글을 많이 남겨 팬카페가 생기기도 했었다. 뉴욕에서 불교식으로 윤형씨의 장례를 치른 이 회장은 서울 혜화동 원불교 원남교당에 윤형씨 빈소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후 종종 미국을 찾아 딸을 추모했다고 전해진다. /박민주기자 parkmj@@sedaily.com -
[이건희 별세]CJ와 앙금 여전한데…이재용 시대엔 화해할까
산업 생활 2020.10.25 15:10:14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별세하면서 왕자의 난을 일으켰던 삼성 가문의 2세 경영 시대는 막을 내렸다. 삼성그룹 첫 경영 승계를 놓고 경쟁을 벌였던 이맹희 전 CJ그룹 명예회장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유산인 앙금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이재현 CJ그룹 회장 등에 전가된 셈이다. 다만 3세들이 부친들과 다르게 화해의 제스쳐를 취해온 만큼 이 CJ그룹 회장이 이 삼성전자 회장의 빈소에 나타나 관계개선의 메시지를 쏟아낼 지 이목이 쏠리고 있다. 삼성과 CJ그룹 간 대립은 삼성그룹의 ‘장자승계’ 원칙이 깨지고 이 삼성전자 회장이 경영권을 물려 받으면서 시작됐다. 사건의 발단은 1966년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성그룹의 한국비료가 사카린 원료를 밀수하다가 부산 세관에 적발됐고 삼성은 당시 2,400만원의 벌금을 냈다. 이 때문에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은 재계를 은퇴했다. 처음에는 장남인 이 전 CJ그룹 명예회장이 삼성그룹의 후계자에 올랐다. 이 삼성전자 회장은 1966년 첫 직장을 동양방송을 택하며 당시 방송 쪽을 맡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하지만 사카린 밀수 사건 이후 청와대 투서 사건이 불거지면서 이 전 CJ그룹 명예회장은 투서의 주범이란 오해를 사게 되고 결국 왕좌의 자리를 이 삼성그룹 회장에게 물려주게 된다. 청와대 투서 사건은 이병철 창업주의 차남 이창희 전 새한미디어 회장이 이병철 창업주를 구속시켜달라는 편지를 청와대에 보낸 사건인데, 이 과정에서 이 전 CJ그룹 명예회장 이를 방관 또는 가담해 이병철 창업주의 눈밖에 났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삼성그룹의 경영권이 3남 이 삼정전자 회장에게 넘어간 이후 야인 생활을 했던 이맹희 회장은 2012년 상속을 둘러싸고 다시 동생과 맞붙었다. 이병철 회장이 남긴 재산을 둘러싸고 이 전 CJ그룹 명예회장이 이 삼성전자 회장을 대상으로 상속재산 인도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삼성가 상속소송은 치열한 법정공방을 벌인 끝에 이건희 회장의 승리로 끝났다. 소송이 벌어지다 보니 두 가문 간 사이는 더욱 멀어졌다. 당시 이 삼성전자 회장은 이 전 CJ그룹 명예회장을 두고 “우리 집에서 퇴출당한 양반이다”, “30년 전에 나를 군대에 고소를 하고, 아버지를 형무소 넣겠다고 청와대에 고발했던 양반”이라는 표현으로 적개심까지 드러냈다. 소송에 패한 이 전 CJ그룹 명예회장 소송이 끝날 무렵 “건희와 저는 피를 나눈 형제다. 묵은 감정을 모두 털어내야 한다”며 다시 화해의 제스쳐를 취했지만 끝내 장남과 삼남의 갈 등은 이맹희 회장이 세상을 떠나는 2015년까지 이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상속 갈등까지 마무리되자 3세 시대의 분위기는 달라졌다. 2014년 이재현 CJ그룹이 회장이 횡령과 배임 혐의로 구속되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범 삼성가 구성원은 이 CJ그룹 회장에 대해 탄원서를 제출했다. 탄원서에는 이 삼성전자 회장의 부인인 홍라희 여사를 비롯해 이 삼성전자 부회장, 이명희 신세계 회장,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 등이 포함됐다. 당시 탄원서에는 “이재현 회장이 현재 상태로는 수감 생활을 견뎌낼 수 없고 CJ그룹의 경영 차질이 예상된다”는 내용이 포함되며 삼성과 CJ간 화해무드가 처음으로 조성됐다는 평가가 나왔다. 2018년 삼성맨이던 박근희 삼성생명 고문의 CJ대한통운으로 영입된 사건 역시 삼성과 CJ그룹 관계 개선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당시 박 부회장은 “삼성과 CJ 가교 역할을 하겠다”며 “이제 본격적인 화해 무드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박 부회장의 영입 과정에선 이 CJ 회장과 이 삼성전자 부회장이 직접 만나 의견을 나눈 것으로도 알려졌다./박형윤기자 manis@@sedaily.com -
평창올림픽 유치 위해 170일간 해외출장, 레슬링 金 40개 조력… ‘체육인’ 이건희
문화 · 스포츠 스포츠 2020.10.25 14:46:53‘1년 반 동안 11차례, 170일간의 해외출장’.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열정 넘치는 ‘체육인’이기도 했다. 서울사대부고 재학 시절 실제로 레슬링 선수 생활도 했던 이 회장은 2018평창동계올림픽 유치의 주역이기도 하다. 조국의 첫 동계올림픽 개최를 위해 1년 반 동안 11회에 걸쳐 170일간이나 해외출장 일정을 소화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2010년 밴쿠버대회 현장을 시작으로 평창 개최가 결정된 이듬해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 총회까지 직접 참석했다. 더반 총회에서 자크 로게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 올림픽 개최지로 “피영창”을 발표하자 이 회장은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10여년간 매년 10억원 가까운 금액을 대한빙상경기연맹에 지원해 선수들의 ‘안방 올림픽’ 활약을 도운 것도 이 회장이다. 이 회장은 애틀랜타하계올림픽 기간이었던 지난 1996년 7월 IOC 위원에 선출돼 2017년 8월 건강을 이유로 위원직을 내려놓기까지 20년 넘게 스포츠외교 무대에서 영향력을 발휘해왔다. IOC 위원은 ‘스포츠외교관’으로 통한다. 올림픽 개최국과 종목 등의 결정에 참여하며 자국 스포츠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통로 역할을 한다. 2012런던하계올림픽에서 박태환이 석연치 않은 실격 위기에 처했을 때 현장에서 발 빠른 조치를 지시해 불이익을 막은 것도 이 회장이다. 삼성은 올림픽 공식후원사 중 최고 지위를 가진 톱스폰서이자 회장이 IOC 위원으로 활동하는 기업으로 IOC 내에서도 손꼽히는 입지를 다졌다. 이 회장 주도로 꾸려진 삼성스포츠단은 인기·비인기 종목을 가리지 않고 스포츠를 후원했다. 이 회장은 1982∼1997년 제21∼24대 대한레슬링협회 회장을 지내며 한국 레슬링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이 회장 재임 시기 한국 레슬링은 올림픽 7개, 아시안게임 29개, 세계선수권 4개 등 40개의 금메달을 수확했다. 1982년 프로 원년부터 2001년까지 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즈 구단주를 지냈으며 삼성은 이 회장의 뜻을 이어 프로야구·프로축구·프로농구·프로배구단·탁구·레슬링·배드민턴·육상·태권도팀을 운영하고 있다. 생전에 스키·탁구·테니스·골프 등을 즐긴 이 회장은 1997년 12월 발간된 에세이에 이렇게 적었다. “스포츠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교훈은 어떤 승리에도 결코 우연이 없다는 사실이다.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난 선수라도 노력 없이 승리할 수 없다. 모든 승리는 오랜 세월 선수·코치·감독이 삼위일체가 돼 묵묵히 흘린 땀방울의 결실이다.” /양준호기자 miguel@@sedaily.com -
[이건희 별세] 중기중앙회 "대·중소기업, 한배탄 부부로 비유했던 이회장 애도"
산업 기업 2020.10.25 14:33:45중소기업계가 25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영면을 추모했다. 중소기업중앙회는 이날 논평을 통해 “중소기업을 진정한 동반자로 생각하며 애정을 베풀어 주신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님께 진심 어린 애도를 표한다”며 “고인은 끊임없는 혁신과 변화를 통해 세계 굴지의 초일류 글로벌 기업을 일궈내고 수많은 일자리를 만들며 대한민국 경제를 앞장서 이끌어온 재계의 거인이었다”고 회고했다. 특히 “이 회장이 평소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한배를 탄 부부와 같다’고 했다”며 “지난 1997년 경기 용인에 중소기업 인재양성을 위한 ‘중소기업인력개발원’ 건립을 지원하는 등 중기중앙회와도 특별한 인연을 이어왔다”고 안타까워했다. 대·중기 상생에 헌신한 뜻도 기렸다. 중기중앙회는 “이 회장은 중소기업과 공동 기술개발을 위해 혁신기술기업협의회를 운영해 협력사의 경쟁력을 키우고 중소기업 스마트공장 구축을 지원하는 등 대·중소기업 상생과 동반성장을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고 강조했다. /이상훈기자 shlee@@sedaily.com -
[이건희 별세] 가족장 준비 한창인 삼성서울병원…"조화·조문 정중히 사양"
사회 사회일반 2020.10.25 14:16:5325일 별세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은 오전부터 분주한 분위기였다. 삼성전자 측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감염병 예방을 위해 50인 미만이 집합하는 ‘가족장’으로 치러질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회장의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지하 2층에 위치한 17(562㎡)·19(213.6㎡)·20(213.6㎡)호 세개 방을 합쳐 만들어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 측에서는 조화와 조문은 정중히 사양한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그럼에도 애도의 뜻을 담은 화환이 계속해서 도착했다. 결국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강경화 외교부 장관,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최정우 포스코 회장,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 정몽진 KCC 회장 등 정·재계 인사들의 화환들이 도착해 빈소로 들어갔다. 오후 현재 빈소 준비가 한창이며 외부인 출입은 통제된 상태다. 장례식장 1층 중앙 출입문은 취재진 50여명이 대기 중이며 관계자들이 외부인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중국 관영 방송인 CGTN 등 외신도 이날 삼성서울병원을 찾았다. 같은 시간 서울 서초동 삼성사옥에는 조기가 게양됐다. 이 회장의 장례식은 4일장으로 치뤄지며 오는 28일 발인 예정이다. 가족친지는 이날 오후부터, 사장단과 외부 인사는 26일인 내일 오전 10시부터 조문받을 예정이다. 1942년에 태어난 이 회장은 부친인 이병철 삼성창업주 별세 이후 1987년 삼성그룹 2대 회장에 올라 삼성그룹을 이끌었다. 그는 2014년 5월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자택에서 심근경색을 일으켜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이날 오전 삼성서울병원에서 향년 78세로 별세했다./한민구·심기문기자 1min9@@sedaily.com -
"10년 내에 삼성 대표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
산업 기업 2020.10.25 14:11:13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위기의 순간마다 특유의 직설적인 화법으로 과감하고 선제적인 변화를 주문했다. 이 회장은 지난 1987년 12월 회장 취임사에서 “삼성은 이미 한 개인이나 가족의 차원을 넘어 국민적 기업이 됐다”며 “미래지향적이고 도전적인 경영을 통해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으로 성장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1988년 3월에는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제2의 창업’을 선언하며 “1990년대까지 삼성그룹을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으로 발전시키겠으며 앞으로 각종 사회봉사 사업을 비롯한 문화진흥 활동을 전개하기 위한 별도의 기구를 구성하겠다”고 미래 비전을 밝혔다. 협력업체와의 상생도 한발 앞서 강조했다. 이 회장은 1989년 1월 신년사에서 “삼성의 협력업체도 바로 삼성 가족”이라며 “그들에게 인격적인 대우와 적극적인 지원을 해 회사와 협력업체가 하나의 공동체이며 한가족이라는 자부심을 느끼도록 해줌으로써 참된 공존공영을 이루는 것이 인간중시 경영”이라고 역설했다. 디자인 경영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이 회장은 1993년 6월 프랑크푸르트에서 “앞으로 세상에서 디자인이 제일 중요해진다”며 “성능이고 질이고는 이제 생산기술이 다 비슷해지는 만큼 앞으로는 개성을 어떻게 하느냐, 디자인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급변하는 글로벌 경영환경에서 뒤처지면 안 된다며 위기의식도 끊임없이 주문했다. 그는 IMF 사태 직전인 1997년 1월 신년사에서 “지난 10년 동안 세기말적 변화에 대한 기대와 위기감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았다”며 “우리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삼성은 물론 나라마저 2류·3류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절박한 순간”이라고 지적했다. 2010년 3월 경영에 복귀하면서는 “지금이 진짜 위기다. 글로벌 일류기업들이 무너지고 있다. 삼성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앞으로 10년 내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여성 인재의 중요성도 설파했다. 이 회장은 1997년 에세이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서 “다른 나라는 남자·여자가 합쳐서 뛰고 있는데 우리는 남자 홀로 분투해 마치 바퀴 하나는 바람이 빠진 채로 자전거 경주를 하는 셈”이라며 “이는 실로 인적자원의 국가적 낭비”라고 진단했다. 2011년 여성 임원 오찬에서는 “여성 임원은 사장까지 돼야 한다”면서 “임원 때는 본인의 역량을 모두 펼칠 수 없을 수도 있으나 사장이 되면 본인의 뜻과 역량을 다 펼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이재용기자 jylee@@sedaily.com -
"불량은 암이다" 휴대폰 화형식…갤럭시 신화는 그렇게 탄생했다[이건희 별세]
산업 기업 2020.10.25 13:56:52삼성 역사상 가장 뼈아픈 기억 중 하나인 ‘휴대폰 화형식’은 삼성이 인식의 전환뿐 아니라 실제 제품 품질의 전환을 맞게 된 계기였다. 삼성전자(005930)는 지난 1988년 국내 최초로 자체 개발한 휴대폰(SH-100)을 내놓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업계에서는 삼성을 위협적인 존재로 보지 않았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반드시 1명당 1대의 무선단말기를 가지는 시대가 온다. 전화기를 중시해야 한다”며 신수종사업으로 휴대폰을 지목했다. 그리고 직접 버튼 배열까지 신경 쓴 ‘애니콜’ 브랜드를 만들어 1994년 10월 첫 제품을 내놓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점유율 30%를 차지했다. 당시 국내외 시장은 모토로라가 철옹성을 구축하고 있었다. 삼성은 모토로라가 차지한 시장점유율을 가져오기 위해 질보다 양을 늘리는 데 초점을 맞췄다. 무리한 제품 출시로 양적 성장만 추구한 결과 그해 삼성전자 휴대폰의 불량률은 11.8%까지 치솟았다. 높은 불량률을 보고받은 이 회장은 크게 화를 냈다. 이 회장이 불과 1년 전(1993년)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며 독일까지 가서 ‘질의 경영’을 부르짖었는데 아직도 삼성은 과거의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신경영 이후에도 이런 나쁜 물건을 만들고 엉터리 물건을 파는 정신은 무엇인가. 적자 내고 고객으로부터 인심 잃고 악평을 받으면서 이런 사업을 왜 하는가”라며 “삼성에서 수준 미달의 제품을 만드는 것은 죄악이다. 회사 문을 닫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시정해야 한다”며 강하게 질타했다. 이 회장은 불량품을 무조건 새 제품으로 바꿔주라고 지시했다. 무려 15만대, 500억여원어치에 달하는 불량품이 수거됐다. 1995년 3월9일 이 회장은 수거된 15만대의 휴대폰을 구미사업장 운동장에 쌓으라고 지시했다. 2,000여명의 임직원이 지켜보는 앞에서 해머를 든 10여명이 전화기를 내리쳤다. 조각난 휴대폰에 불까지 붙였다. 임직원들의 불량 의식도 함께 태워버리라는 특단의 조치였다. 제조를 담당한 여직원들은 제 손으로 만든 제품이 녹아내리고 재가 되는 모습을 보며 서로 부둥켜안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당시 이를 지켜본 신종균 삼성전자 사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내 자식 같은 무선전화기가 타는 것 같았다. 그 화형식이 계기였다. 우리 가슴속에 불량에 대한 안이한 마음을 털끝만큼도 안 남기고 다 태워버렸다. 새로운 출발이었다. 지금의 삼성은 거기서 시작됐다.” 화형식으로 ‘불량은 암’이라는 인식이 삼성인들 가슴속에 자리를 잡아갔고 현장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부실요인을 찾아 고치는 풍토가 그룹 전체에 확산됐다. 그리고 화형식 4개월 후 삼성전자의 애니콜은 국내시장 점유율 52%를 기록하며 모토로라와 노키아를 누르고 1위를 차지했다. 2002년에는 열고 닫는 클램셸(조개껍데기) 형태의 ‘SGH-T100’을 내놓았다. 삼성의 기술이 집약된 이 모델은 ‘이건희폰’으로 불리며 단일 모델로만 1,000만대가 팔려나갔다. 휴대폰 시장의 강자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2012년 삼성전자는 마침내 애플을 제치고 세계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 1위에 올랐다. 이 자리는 현재까지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변수연기자 diver@@sedaily.com -
[이건희 별세]시민들 반응은..."한 시대 저문 느낌"
사회 사회일반 2020.10.25 13:40:0725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별세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은 만감이 교차한다며 “국내 경제 발전을 위해 고생한 만큼 하늘에서 영면하기를 바란다”는 반응을 보였다. 서울 노원구에 거주하는 한모(69)씨는 “오랜 기간 한국 경제를 이끌어 온 삼성을 만든 분이고 그분과 함께 한 세대인데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며 “바쁘고 정신 없이 경제 활동을 했던 삶을 뒤로 하고 편하게 쉬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모(35)씨도 “이건희 회장은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주역이며,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에 큰 공헌을 할 만큼 스포츠 발전에도 힘써왔기에 평소에 정말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해왔다”며 “국가 경제 발전에 이바지 하느라 생전에 수고 많으셨던 만큼 부디 하늘에서 편히 쉬시기를 바란다”고 했다. 삼성 전·현직 직원들도 타계 소식에 애도를 표했다. 15년째 근무하고 있는 강모씨는 “많은 국민들이 사랑해주는 지금의 삼성이 있게 만들어 준 분이다. 큰 어르신이 떠나갔다. 매우 안타깝다”고 아쉬워했다. 20년간 삼성에서 근무했던 자영업자 한모씨도 “혜안을 가지고 한국 경제를 이끌어 간 분이다. 애도를 표한다”며 “상속세 등 해결해야 할 부분이 남아있는데 이를 잘 정리하는 게 남은 과제가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이건희 회장이 비리에 연루되기도 했지만 우리나라 경제 기반을 다진 공로는 절대 잊지 말아야 하는 반응이 다수였다. 이모(29)씨는 “2000년도 들어서 사법적 논란이 있었지만, 우리나라 경제 기반을 다진 최고경영자(CEO) 중 한 분으로 좋은 곳에 가서 편히 쉬시면 좋겠다”고 전했다. 회사원 김모(39)씨도 “양면이 있는 인물”이라면서도 “경제발전 등 단점 보다는 장점이 큰 어른이었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모(25)씨는 “한국 경제 성장과정에서 막대한 영향을 끼친 그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한 시대가 저물었다는 느낌을 받는다”며 “그 많은 재산들을 두고 자연으로 돌아간다니 죽음 앞에서는 재벌이고 서민이고 평등하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한민구·심기문기자 1min9@@sedaily.com -
[이건희 별세] 27년전 '굴욕'이 일궈낸 '삼성TV 신화'
산업 기업 2020.10.25 13:31:031993년 이건희 삼성 회장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전자제품 유통매장인 ‘베스트바이’에 갔다가 충격을 받았다. 삼성 TV가 소니·도시바 같은 일본 제품에 치여 한 귀퉁이에서 먼지만 잔뜩 뒤집어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귀국하자마자 삼성전자(005930) 임원들을 불러 혼쭐을 냈다. 이 회장은 곧바로 전략회의에서 “전자 계열사 사장들은 삼성제품이 미국에서 천덕꾸러기 신세임을 알게 됐을 것”이라면서 “2·3등 회사는 미래가 없으니 앞으로 일류 제품 개발에 적극 나서라”고 질책했다. 이 회장이 베스트바이에서 받은 충격은 오늘의 ‘가전 강자’ 삼성전자를 만들었다. TV 사업부는 2000년대 초만 하더라도 만년 적자 부서였다. 세계 최대 시장인 북미(미국·캐나다)에서는 바닥을 맴돌았다. 현지 시장조사업체가 TV 업체 순위를 13위까지 발표하던 시절, 삼성전자는 12위였다. 이 회장은 TV 부문의 집중 육성을 주문했다. 휴대폰·가전 등 삼성전자의 다른 전자제품 성공을 위해서라도, 대중 친밀도가 가장 높은 TV 시장 정복은 필수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잘나가던 반도체사업부의 엔지니어 300명을 TV사업부로 재배치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방식으로, 브라운관에서 평판(LCD나 PDP) TV 쪽으로 이동해 가는 대전환 시기에 앞선 기술력을 확보하면 판을 바꿀 기회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동안의 마케팅 방식에 대해서도 쇄신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눈길을 끌 수 있도록 디자인을 차별화시켜야 한다는 진단이 계기가 됐다. 평판TV 시대로 접어들면서 소비자들은 TV의 디자인을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고민 끝에 삼성전자는 2006년 보르도 TV를 내놓았다. 멀리서 보면 마치 와인잔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로, 명품 와인의 원산지인 ‘보르도’에서 이름을 따왔다. 고정관념을 깬 이 제품은 삼성전자 TV를 베스트바이 등 유통점에서 인기를 끌었고, 출시 첫해에만 250만대가 팔렸다. 삼성전자는 보르도TV의 성공을 발판삼아 2008년에 장미꽃을 형상화한 ‘크리스털 로즈 TV’로 연타석 히트를 쳤다. 삼성전자는 이같은 성공에 멈추지 않고 2008년 하반기 TV 기술의 트렌드를 바꿔버릴 혁신 제품을 준비한다. 기존의 광원으로 쓰던 형광등 대신 LED를 쓴 LED TV를 내놓는다. LED는 전력 소모가 적으면서도 화질을 더욱 밝고 선명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강점이었다. 또한 두께를 획기적으로 줄였다. 경쟁사들도 뒤늦게 LED TV를 내놨지만 삼성전자의 아류작 취급을 받았다. 매년 새로운 개념의 TV를 내놓으며 베스트셀러를 만들어 낸 삼성전자는 세계 TV 시장에서 2007년부터 1위를 달리고 있다. 삼성전자 TV 굴욕의 진앙지였던 미국 유통점에서의 대접도 눈에 띄게 달라졌다. 미국의 추수감사절 연휴에 여는 특별 할인행사에서는 고객들이 아귀다툼을 하며 사려하는 제품 중 하나다. 업계 한 관계자는 “일본과 중국 틈에 끼여 고사 직전까지 갔던 한국 TV를 세계인이 다시 보게 된 데는 삼성전자와 이건희 회장의 발 빠른 대응이 한몫했다”고 말했다. /한동희기자 dwise@@sedaily.com -
실리콘밸리 50차례 오가며...일찌감치 반도체에 눈떠 [이건희 별세]
산업 기업 2020.10.25 13:26:15삼성의 글로벌 성공 신화를 쓴 고(故) 이건희 회장은 어릴 적 말수가 적고 내성적이었지만 사람을 보는 눈만큼은 남달랐다. 이 회장과 서울사대부고 동기인 고 홍사덕 전 국회부의장의 회고에 따르면 이 회장은 고교 때부터 “나는 사람에 대한 공부를 가장 많이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자동차와 반도체 등 선진기술에 대한 집착도 컸다. 결국 ‘인재’와 ‘기술’은 삼성이 오늘날 정보기술(IT) 업계의 글로벌리더로 우뚝 서는 원동력이 됐다. 이 회장은 지난 1942년 1월9일 대구에서 삼성그룹 창업주인 호암 이병철 회장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이병철 회장과 박두을 여사는 슬하에 3남5녀를 뒀다. 당시 호암은 대구 서문시장 근처에서 청과·건어물 무역회사인 삼성상회를 경영하고 있었다. 이 회장의 형은 고인이 된 이맹희 전 CJ그룹 명예회장과 이창희 전 새한그룹 회장이다. 누나로는 이인희(한솔그룹 고문), 이숙희, 이순희, 이덕희씨가 있다.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은 유일한 동생이다. 유년기를 대구에서 보낸 이 회장은 호암과 함께 1947년 상경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 1953년 선진국을 배우라는 아버지의 엄명으로 일본 도쿄에서 유학했다. 3년간의 일본 유학생활을 마치고 서울에서 중고교를 다녔다. 고교 시절 레슬링부에 들어가 2학년 때는 전국대회에서 입상하기도 했다. 럭비도 즐겼는데 1997년 출간된 에세이에서 “럭비는 한번 시작하면 눈비가 와도 중지하지 않는다. 오직 전진이라는 팀의 목표를 향해”라고 썼다. 당시 스포츠와 맺은 인연을 계기로 레슬링 등 스포츠 육성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1996년에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 됐다. 고교 졸업 후 이 회장은 호암의 권유로 일본 와세다대 상학부에 진학했다. 와세다대 졸업 후에는 미국 조지워싱턴대 경영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미국에서 이 회장은 자동차에 심취했다. 자동차를 분해하고 조립하기를 되풀이하면서 자동차 구조에 대해서는 전문가 수준에 올랐다. 미국에서 한 대사가 타던 차량을 4,200달러에 사서 한참 몰다가 600달러를 더 받고 팔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1967년 홍라희 전 리움 관장과 결혼한 이 회장은 결혼 이후 삼성 비서실에서 2년간 근무하면서 삼성그룹의 큰 그림을 그리게 된다. 1970년대 미국 실리콘밸리를 자주 찾으며 첨단산업인 반도체에 눈을 떴다. 32세 때 호암의 반대에도 거의 자기 돈으로 파산 위기에 처한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인수한 뒤 실리콘밸리를 50여차례 드나들며 반도체 기술 이전에 힘썼다. 삼성의 반도체 신화가 탄생한 순간이다. 삼성그룹 후계자로서의 본격적인 경영수업은 1978년 8월 삼성물산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시작됐다. 호암은 1977년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건희가 후계자”라고 공식화했다. 이듬해에는 삼성그룹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호암은 일찌감치 “건희는 취미와 의향이 기업 경영에 있어 열심히 참여해 공부하는 것이 보였다”고 평가했다. 이 회장이 삼성그룹 경영권을 물려받은 것은 부회장에 오른 지 9년이 지나서였다. 삼성 경영권 승계까지는 우여곡절도 많았다. 호암은 애초 이 회장에게 중앙매스컴을 맡길 작정이었다. 이 회장은 1966년 첫 직장으로 동양방송에 입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해 불거진 한국비료의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삼성의 후계구도는 송두리째 흔들렸다. 이 사건에 호암의 장남과 차남인 이맹희·이창희씨가 관여한 것으로 밝혀졌고 사건 직후 이창희씨는 구속됐다. 호암은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경제계에서 은퇴한다. 이후 이맹희씨는 삼성 총수대행으로 10여개의 부사장 타이틀을 달고 활동했다. 당시만 해도 장자상속 원칙에 따라 삼성의 경영권이 장남인 이맹희씨에게 넘어갈 듯이 보였다. 하지만 호암은 자서전에서 “맹희에게 그룹 일부의 경영을 맡겨봤는데 6개월도 채 못돼 맡긴 기업은 물론 그룹 전체가 혼란에 빠져 본인이 자청해 물러났다”고 밝혔다. 이어 청와대 투서사건 등이 터지며 이맹희씨는 호암의 신임을 잃었고 호암은 1970년대 일찌감치 이건희 회장에게 삼성을 맡기기로 결단한다. 이 회장은 1987년 12월 제2대 삼성그룹 회장에 취임한다. 당시 이 회장의 나이는 46세였다. 이 회장은 취임식에서 “미래지향적이고 도전적인 경영을 통해 1990년대까지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으로 성장시킬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회장의 당시 약속은 삼성이 반도체와 스마트폰·TV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글로벌 1위 기업을 일구며 현실이 됐다./이재용기자 jylee@@sedaily.com -
[이건희 별세] 이재용 부회장 등 상속세 10조 넘을 듯…역대 최대 규모
경제 · 금융 경제·금융일반 2020.10.25 13:20:1925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별세함에 따라 재산을 물려받을 이재용 부회장 등 상속인들이 내야 할 세금은 10조원을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속세 전문 세무사들은 주식 평가액의 60%, 나머지 재산의 50%를 상속세로 내게 될 것으로 추정했다. 상속세법령에 따르면 증여액이 30억원을 넘으면 최고세율 50%가 적용되고, 고인이 최대주주 또는 그 특수관계인이라면 평가액에 20% 할증이 붙는다. 극단적으로는 한 계열사의 1주만 있어도 할증이 적용된다. 이 회장은 현재 국내 상장사 주식 부호 1위다. 그는 수년간 병상에 누워 지내면서도 주식 부호 1위 자리를 지켰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이 회장의 보유 주식 평가액은 23일 종가 기준으로 18조2,251억원이다. 지난 6월 말 기준 이 회장은 ▲ 삼성전자 2억4,927만3,200주(지분율 4.18%) ▲ 삼성전자 우선주 61만9,900주(0.08%) ▲ 삼성SDS 9,701주(0.01%) ▲ 삼성물산 542만5,733주(2.88%) ▲ 삼성생명 4,151만9,180주(20.76%) 등을 보유했다. 이 회장은 이들 4개 계열사의 최대주주이거나 최대주주의 특수관계인이다. 모두 상속세법상 최대주주 할증 대상이다. 따라서 이들 4개 계열사 지분 상속에 대한 상속세 총액은 평가액 18조2,000억원에 20%를 할증한 다음 50% 세율을 곱한 후 자진 신고에 따른 공제 3%를 적용하면 10조6,000억여원이다. 주식 평가액은 사망 전후 2개월씩 총 4개월의 종가 평균을 기준으로 산출하므로 실제 세액은 달라질 수 있다. 부동산 등 다른 재산에 대한 세율은 50%가 적용된다. 상속인들은 상속세 총액 가운데 자신이 상속받은 비율만큼 납부하게 된다. 이 회장 상속인들의 상속세 신고·납부 기한은 내년 4월 말까지다. 다만 한꺼번에 내기 부담스럽다면 연부연납제도를 활용할 수 있다. 연부연납은 연이자 1.8%를 적용해 신고·납부 때 ‘6분의 1’ 금액을 낸 뒤 나머지를 5년간 분할 납부하는 방식이다. 구광모 LG그룹 회장도 고 구본무 회장에게 물려받은 재산에 대한 상속세 9,215억원을 이 같은 방식으로 내고 있다. /유주희기자 ginger@@sedaily.com -
[이건희 별세]국내 최초 1,000만대 팔린 '이건희 폰', 1위 이끌었다
산업 기업 2020.10.25 12:52:26“디자인과 같은 소프트한 창의력이야말로 기업의 소중한 자산이자 21세기 기업 경영의 최후 승부처가 되리라고 확신한다.”(1996년 신년사)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철학이 삼성전자(005930) 최초로 1,000만대 넘게 팔린 휴대폰을 만들었다고 평가받는다. ‘SGH-T100’(국내 모델명 SCH-X430)은 이른바 ‘이건희 폰’이라고 불렸다. 이건희 회장이 디자인 개발에 관여하고 평소 애용한 제품이기 때문이다. 갤럭시Z폴드2·갤럭시Z플립 등 혁신적 디자인으로 무장한 폴더블폰의 시초였다는 평을 받는다. 지난 2002년 출시된 ‘이건희 폰’은 조개를 닮은 형태의 클램쉘 디자인으로 한 손에 쥐기 편하게 디자인됐다. 이 회장은 제품의 개발 단계부터 세심히 살폈다. 얇고 작은 제품이 독차지했던 휴대폰 시장을 새로운 디자인으로 확장한 것이다.‘이건희 폰’은 세계최초로 고선명·고화질의 컬러 초박막액정화면(TFT-LCD)을 디스플레이로 탑재했다. 흑백 휴대폰 시장에 컬러 시대를 연 제품이다. 이 외에 31만 화소의 내장 카메라로 동영상까지 찍을 수 있었고, 64화음 멜로디도 지원했다. 세련된 디자인의 ‘이건희 폰’은 출시된 지 약 1년 5개월만에 전 세계에서 1,000만대 팔리는 기록을 세웠다. 국내 최초의 밀리언 셀로(1,000만대 판매) 휴대폰이다. 이건희폰은 삼성전자를 당시 노키아, 모토로라와 함께 세계 3대 휴대폰업체로 끌어올렸다./김성태기자 ki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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