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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저 태풍 헌터

대형 해양연구선 크노르호의 승무원들은 해저 태풍을 쫓는 바다 위의 헌터다. 이들은 래브라도해의 수심 3㎞ 아래에 측정 장비를 던져 넣고 지구의 운명을 알려줄 단서를 찾는다.

연구선이 캐나다 뉴펀들랜드섬 인근의 벨아일 해협을 빠져나오자 선교에 있던 1등 항해사의 지시가 떨어졌다. 거친 바다에 대비 해 모든 물품을 밧줄로 묶거나 안전하게 수납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때 갑판 두 층 아래에 위치한 주 연구실에서는 에이미 보워 박사가 특대형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황색 바탕에 커다란 적색, 오렌지색 점들이 표시된 모니터 화면은 마치 한 장의 추상화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크게 확대된 래브라도해의 해저 지형도였다.

컴퓨터가 로봇 같은 목소리로 텍스트를 읽어주는 동안 보 워 박사는 모니터와 키스라도 할 듯 얼굴을 들이대고 화면 속에서 단서를 찾았다.

보워 박사는 세계 최대 민간해양연구소인 우즈홀해양연구 소의 선임과학자다. 지금은 해저 기후 연구를 위해 출항한 해양연구선 크노르호의 제192항해 중 제1구간의 책임을 맡 고 있다. 특히 그녀는 황반변성과 색소성 망막염이라는 선 천적 질환을 두 가지나 앓고 있다. 법적으로 맹인인 것이다.

하지만 22년간 해양학자로 일하면서 북대서양의 겨울 폭풍 을 이겨냈고 아덴만의 소말리아 해적도 극복했다. 그리고 컴 퓨터나 여타 장비들의 도움을 받아 두 눈이 멀쩡한 사람들 보다 해양 상태를 훨씬 잘 바라본다. 기후가 허락한다면 크노르호는 그린란드의 수도 누크로 연구팀을 데려갈 것이다.

그곳 래브라도해의 북위 60도 36 분, 서경 52도 24분에 도착하면 연구팀은 온갖 측정장비를 부착한 계류 장치를 바다로 던져 넣을 계획이다. 모든 것이 제대로 이뤄질 경우 심해저 3.2㎞까지 내려간 계류 장치에 의해 이르밍거 소용돌이의 정보가 수집된다.

이 소용돌이는 멕시코만류의 지류인 이르밍거 해류에 의해 발생하는 '중 규모 소용돌이(mesoscaleeddies)'의 하나로서 시간당 약 1.6㎞의 속도로 회전하는 일종의 해저 태풍이다. 지상의 허리케인이나 태풍과 비교하면 이 정도 속도는 미 풍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중규모 소용돌이는 수면 위에서 보거나 느낄 수 없다.

설령 거울 표면처럼 잔잔한 바다를 항 해하고 있더라도 그 아래에는 해저 태풍이 불고 있을 수 있 다는 얘기다. 이르밍거 소용돌이도 직경 수 ㎞에 걸쳐 수면 을 들어 올리지만 주변과의 높이 차이는 15㎝에 불과하다. 때문에 중규모 소용돌이는 오직 과학자들만의 문제로 치부되고는 한다. 누구도 이들에게 이름을 붙인 적이 없으 며 이들로 인해 침몰한 선박이나 익사한 선원이 없는 만큼 전문 기상채널에서조차 언급되지 않는다.

해양학계에 몸담 지 않는 한 그 명칭도 들어보기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중규모 소용돌이는 홍수나 태풍과 마찬가지로 지구 기후변화의 중요한 원인이자 결과다. 이들은 느리게 회 전하지만 최대 1,954조ℓ의 바닷물을 이동시킨다. 그 과정 에서 다양한 동·식물군, 표류물, 해조류, 크릴새우 등도 이 동된다. 그런데 만일 이 소용돌이의 수온이 주변보다 높으 면 엄청난 열이 함께 전달되면서 지구기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르밍거 소용돌이가 바로 그런 존재로 주변 수역보 다 1~2℃가 따뜻하다. 이에 의해 얼마나 많은 열이 다른 곳으로 전달되는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그 발생 빈도나 활동기간, 이동거리, 최 종 목적지 등도 불명확하다. 보워 박사가 연구를 통해 밝혀 내고자 하는 것이 이 부분들이다.

다만 그녀를 포함한 해양 학자들이 분명히 알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이르밍거 소 용돌이가 래브라도해의 기후에 영향을 미친다면 이는 곧 그 린란드의 기후, 더 나아가 세계 기후에 연쇄적 도미노효과 를 유발한다는 점이다. 래브라도해는 이르밍거 소용돌이의 발원지지만 빙산의 고향이기도 하다.

캐나다아이스서비스(CIS)에 의하면 래브 라도 해류를 따라 이동하는 빙산이 41개나 된다. 때문에 크 노르호의 1등 항해사는 저녁이 되자 2명의 선원에게 야간투 시경을 들고 수평선을 감시하라고 지시했다.





암흑의 바다

우주홀해양연구소의 해양생물학자였던 레이첼 카슨은 지 난 1950년 발간된 저서 '우리를 둘러싼 바다'에서 이렇게 말 했다. "태곳적부터 이어져온 암흑의 장막이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낯선 바다의 표면 이곳저곳에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 장막은 빠른 속도로 거둬졌다. 이제 인간은 바다 의 대부분을 알고 있다.

암흑의 바다라는 개념을 적용할 수 있는 것은 바다의 3차원적 구조를 생각할 때뿐이다. 인류는 바다의 모든 표면을 파악하는 데 수백년이 걸렸지만 바닷속세상을 이해하는 속도는 경이적일 만큼 빠르다." 카슨은 의기양양한 어조를 유지했지만 글의 말미에 이 런 말을 남겼다. "심해를 탐사하고 표본을 채취하는 최신 장 비를 모두 동원하더라도 누구도 마지막까지 남은 바다의 궁 극적 미스터리를 풀 수 있다고 단언하지는 못할 것이다." 중규모 소용돌이에는 아직 카슨이 언급한 암흑의 장막 이 드리워져 있다. 그 실체가 처음 알려진 것은 1959년 영국 해양학자 존 스왈로우에 의해서다.

당시 그는 북쪽으로 흐 르는 크고 깊은 해류가 있다는 가설을 증명키 위해 에리스 호를 타고 바하마제도 동쪽의 사르가소해를 찾았다. 그리고 특정 수심에 떠 있도록 설계된 중립 부력 부표들을 띄워 해 류의 존재 유뮤를 관찰했다. 결과는 뜻밖이었다.

어떤 부표는 원을 그리며 돌다가 아크 모양으로 움직였고 두서없이 움직이다가 재빨리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도 있었다. 예상처럼 북쪽을 향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렇듯 부표를 이용, 해류를 찾으려던 시도 는 완벽히 실패로 끝났지만 그의 부표들로 인해 중규모 소 용돌이의 존재가 드러났다.

또한 이를 통해 과학자들이 바 다를 바라봤던 시각에도 근본적 변화가 일어났다. 물론 아직도 바다의 3차원적 구조에 집착하는 해양학 자들은 있다. 하지만 갈수록 많은 학자들이 바다의 네 번째 차원이자 가장 미스터리한 차원인 '시간'에 주목한다. 19세 기의 물리해양학자들은 지리학자나 지도제작자들이 육지 의 지도를 만들던 방식대로 해류와 바다의 수심을 측정, 해 도를 제작했다.



그러나 스왈로우의 발견에서 분명히 드러나 듯 이런 지리학적 방식은 별로 효과적이지 않다. 사실상 바다는 육지보다 하늘과 더 유사하다. 대양과 대 기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밀접하게 상호작용하고 있으며 지 구의 기후는 세상에서 가장 깊은 바다인 마리아나 해구에 서 성층권 끝까지 모든 면에서 연결돼 있다는 게 해양학자 들의 설명이다.

해저 태풍과 해상 폭풍

우즈홀연구소를 출발한지 6일만에 처음으로 크노르호의 선장 켄트 시슬리가 주 연구실을 찾았다. 그는 오후 9시경 목적지인 그린란드 대륙붕 바로 서쪽에 도착할 것이라고 말 했다. 하지만 바다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크노르호 주변 에 폭풍이 형성되고 있었다. 또한 북극으로부터 초속 16m 의 바람이 불어왔고 내일 아침이면 풍속이 초속 20m에 달 할 것으로 예상됐다. 친구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이 싫다는 듯 해저 태풍 연구에 나선 크노르호의 앞길을 해상 폭풍이 막아선 것이다.

문제는 그린란드 누크에서의 제1구간이 3일 내 끝난다는 것이었다. 이미 제2구간에 탑승할 연구팀이 미국 시애틀에 서 항공편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폭풍이 지나길 기다릴 시 간 따위는 보워 박사팀에게 없었다. 결국 시슬리 선장은 오 늘 밤 연구용 계류 장치를 내리자고 제안했다.

이에 보워 박 사가 계류 장치 전개를 책임지고 있는 갑판장 윌 오스트롬 의 생각을 물었다. 그는 반대 의사를 밝혔다. 숙련된 전문가 라면 거친 바다에서도 하루에 10개의 계류 장치를 내릴 수 있지만 현 크노르호의 작업조로는 무리라는 것이었다. 더욱이 제1구간 연구팀은 전례가 없을 만큼 인원이 적 어 마땅한 대체인력을 찾기도 어려웠다.

한동안의 논의 끝 에 보워 박사는 모든 승조원을 대상으로 폭풍 속 작업을 이 겨낼 강한 신체조건을 갖춘 사람을 강제 선발해 투입하자는 오스트롬의 제안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강제 징집된 사람은 보워 박사를 도와 시각장애 인용 해양학 교과과정을 개발하던 매사추세츠주 퍼킨스맹 인학교의 과학교사 케이트 프레이저와 28세의 박사 연구생 데이브 서덜랜드, 그리고 해양연구 현장이라고는 태어나서 처음 와본 필자였다.

오스트롬은 선발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이 일 을 34년이나 했어. 21살 때가 처음이었지. 꼬맹이 취급을 받 던 그때 내게 일을 가르쳐준 분들은 대부분 제2차 세계대전 이나 한국전쟁을 겪었던 군 출신들이었는데 이제 내가 신참 을 가르치게 됐군." 그는 이어 조교다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교육 목적은 두 가지다. 여러분 때문에 내가 죽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첫 번 째고, 두 번째는 여러분이 계류 장치를 놓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약 1시간에 걸쳐 여러 기술들을 알려 줬다.

선박 로프작업에 사용하는 마린스파이크 공구의 사 용법, 밧줄 매듭짓는 법과 제대로 푸는 법, 각종 수신호의 의미와 대처법 등이었다. 오스트롬은 마지막으로 주 연구실의 기상 지도 한 곳을 가리키며 강조했다. "현재 해상 상황은 엉망진창입니다. 앞 으로 5시간 동안 계속 나빠질 뿐 나아지지는 않을 겁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이곳에서 3일간 작업해야 합니다. 일을 빨 리 끝낼수록 좋겠죠."

컨버전스형 탐사 장비

스왈로우가 중규모 소용돌이를 처음 발견한 이래 50년간 해양학자들은 두 가지 방법으로 해저 태풍을 연구해왔다. 하나는 스왈로우처럼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무작정 중규모 소용돌이를 찾아낸 뒤 중립 부력 부표를 띄우는 방식이다. 이를 라그랑주법(Lagrangian method)이라 한다.

다른 하 나는 중규모 소용돌이 발생지로 알려진 해역에 데이터 수집 용 계류 장치를 넣은 후 소용돌이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 는 것으로 오일러법(Eulerian method)이라 부른다. 그런데 어느 날 우즈홀연구소의 카페에서 점심을 먹던 보 워 박사는 이 두 방법을 융합할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 다. 계류 장치에서 부표를 발사하는 것이었다.



이후 보워 박 사의 한 동료가 이 아이디어를 실현할 '수중 자율 발사 플랫 폼(SALP)'의 개발에 성공 했다. 연구팀이 출항하기 며 칠 전 필자는 보워 박사의 강의를 참관한 적이 있다. 당시 그녀는 자신이 2년간 주도해온 실험 내용을 애 니메이션으로 보여줬다. 강의실의 스크린 위에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길 이 3.2㎞의 계류 장치였다.

장치의 아래쪽은 1톤 중량의 강철 무게추에 의 해 해저 지면에 고정돼 있었고 위쪽 끝은 노란색의 원형 부 표가 달려있었다. 물론 이 부표는 중립 부력 부표로서 수면 위가 아닌 수중에 머물러 있었다. 또한 무게추와 부표를 연 결하는 13㎜ 굵기의 철제 케이블에는 자기 기록식 유속계 8대, 염도·수온 측정장치(시버드 SBE 37-SM 마이크로캣) 9대, SALP 2대가 장착돼 있었다.

SALP는 거대한 리볼버 권총처럼 생겼는데 총알 대신 또 다른 6개의 중립 부력 부표가 장전된다. 계류 장치 하나에 서 총 12개의 부표가 발사되는 것으로 각 부표는 유체 주머 니에 유체를 충전 또는 제거하는 방식으로 부력을 조절, 다 양한 깊이에서 정보를 수집하게 된다.



이때 스크린 위에 이르밍거 소용돌이가 등장하며 계류 장치의 노란색 부표를 잡아챘다. 그러자 SALP의 압력계와 온도센서가 해류, 수온의 변화를 감지한다. 이렇게 소용돌 이 출현이 확인되면 SALP가 부표 1개를 소용돌이 속에 발 사한다. 이후 수개월간 부표는 소용돌이와 함께 이동하며 며칠마다 한 번씩 수면 위로 부상해 그동안의 기록내용을 연구팀에게 무선 송신한다.

12개의 부표가 모두 성공 리에 발사된다면 연구팀은 래 브라도해의 가혹한 겨울 시즌 을 포함해 최장 2년간 끊임없 이 데이터를 얻을 수 있다. 이 르밍거 소용돌이의 생성에서 소멸까지 모든 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즉흥 물리학의 대가

저녁 10시가 되자 시슬리 선 장이 엔진을 멈추고 외부조명 등 점등을 명령했다. 계류 장치를 투하할 시간이 된 것이다. 이윽고 크노르호의 선미에 버티 고 있던 A자형 크레인의 안전체 인이 거둬졌다. 이제 갑판과 바다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은 아무것 도 없었고 어둠 속에 발을 내딛는 순간 수심 3.2㎞의 바다로 빠지 게 된다. 필자는 안전모를 쓰고 방수바 지와 고무장화를 입었다.

상체는 절연복, 레인코트, 우비, 구명 재 킷을 차례로 입어 철통방어 태세 를 갖췄다. 많은 비가 내리지는 않았지만 차가운 빗물이 얼굴을 때리는 것만으로 고통은 충분하 고도 남음이 있었다. 보워 박사는 그때 주연구실에서 프레이저 교 사와 함께 '풍선 일기'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계류 장치 연구일지의 첫 장을 작성했다.

준비 작업이 완료되면서 모든 지휘권은 갑판장 오스트롬에게 넘겨졌다. 지금부터는 시슬리 선 장도 그의 말을 따라야 한다. 붉 은색의 상하의 일체형 슈트를 입 은 오스트롬은 곧바로 야수로 변해 사방으로 손가락질을 하며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에 따라 필자를 포함한 강제 징집자 세 명이 로프와 삭구(索具), 윈치, 크레인 등을 조작해 계류 장치를 바다로 내려뜨려야 했다.

오스트롬이 슬립 라인(slip line)을 맡고 있던 서덜랜드 에게 소리쳤다. "그거 동여매! 빨리! 저건 풀어! 빨리 풀라 고!" 이어 필자에게도 호통이 떨어졌다. "자넨 빨리 윈치를 맡아!" 윈치 조종석에 자리를 잡자 오스트롬이 바다를 가리키 며 호통쳤다.

"로프를 풀어! 풀라니까!" 필자가 얼어버린 손가락으로 작은 스위치를 밀자 디젤-전기식 윈치가 윙윙대 며 드럼에 감긴 와이어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오스트롬이 소리쳤다. 하지만 필 자의 반응이 조금 늦었다. "멈추 라고 했잖아!" 그 후 몇 시간 동안 필자는 왜 오스트롬이 연구진들에게 악마 로 불리는지 여실히 깨달았다. 일 에 임하는 그의 태도와 전문성은 실로 철저했다.

특히 그는 '즉흥 물리학'의 대가로 칭해도 무방할 만큼 뛰어났다. 허공에 매달린 물 체의 모양만으로 무게를 알아맞 히고 현재의 풍속에 의해 어떻게 흔들릴지를 정확히 예측, 적절한 대응을 펼쳤다.

시간이 멈춘 바다

우리는 직경 163㎝의 노란색 수 중 부표부터 투하를 시작했다. 이 부표의 상승압력은 1,285㎏으로 상단부에 무선 위성 송수신 장치 와 비컨이 장착돼 있다. 서덜랜드 가 무선 장치와 비컨의 전원을 켜 자 갑판원들이 크레인의 고리에 부표를 연결하고 윈치와의 연결 선을 풀었다. 이제 부표는 윈치가 아닌 크레인의 통제권에 들어갔다.

이때쯤 필자는 서덜랜드와 임무를 교대했다. 그의 윈치 조작술이 필자보다 뛰어났기 때문이다. 필자의 새 임무는 부 표와 무게추를 연결한 케이블이 엉키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 다. 새 위치에 선 뒤 크레인이 부표를 허공에 들어 올려 바다 위로 가져갔다. 그리고 오스트롬의 명령에 의해 투하했다.

부표가 엄청난 양의 물을 튀기며 바다로 떨어지면서 필 자가 손에 쥐고 있던, 케이블이 꿈틀거렸다. 마치 거대한 물 고기를 잡은 낚시꾼이 된 느낌이었다. 필자는 오스트롬이 그만 놓으라고 할 때까지 케이블을 팽팽히 잡아당기며 부표 를 떠내려 보냈다. 그날 밤은 마치 시간이 멈춘듯 길고 힘겨웠다.

부표의 비컨 불빛이 파도에 밀려 희미해지다가 완전히 사라지듯이 필 자의 손 감각도 점차 사라져갔다. 하지만 비에 젖은 몸을 말 리거나 추위를 피할 방법은 없었다. 피로감에 시야가 흐려지 며 신체기능이 떨어질 무렵 선미의 선원들은 유속계, 염도· 수온측정기, SALP를 부표와 연결된 케이블에 부착했다.

오스트롬은 내게 연달아 소리치며 지시했다. "이봐! 윈 치를 맡아! 윈치로 올라가라고! 서덜랜드도 좀 쉬어야 할 거 아냐!" "내가 아래쪽을 가리키면 와이어를 풀어야지! 이런 빌어먹을!"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의 작업이 고난도는 아니었다. 다만 수면 부족 상태의 춥고 배고픈 무경험자에게 그 날은 고통 그 자체였고 밤이 깊어갈수록 고통은 배가됐다.

필자와 다 른 사람들이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을 때 보워 박사는 전혀 지치지 않았다. 따뜻하고 안전한 곳에서 코트를 입은 채 코 코아를 마시며 프레이저에게 작업 상황을 물어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법적 맹인이 갑판에서 도와줄 것은 없었지만 순 간적으로 부럽고도 얄미운 생각이 드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어느 순간 보워 박사가 쾌활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저 거 봐요. 해가 떠와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필자는 눈치 챌 여력도 없었지만 이미 하늘은 검은색에서 회색으로 변 해 있었다. 오전 6시를 조금 넘긴 시각, 계류 장치의 1톤짜리 무게추 가 뱃전 너머로 떠밀려 바다에 떨어졌을 때 필자는 비로소 모든 작업이 끝났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커피 한잔을 마 시고 안정을 취한 뒤 필자는 주 연구실에서 자부심 넘치는 마음으로 계류 장치가 보내오는 기록들을 소리 내어 읽으며 보워 박사의 데이터 입력을 도왔다. 어제 예견된 대로 밖에는 강풍이 불고 있었다. 보워 박사 를 도와주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크노르호는 엔진 을 재가동시켜 항해를 재개했는데 거친 파도에 밀려 심하게 흔들리면서 배가 침몰할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불안감과 극 심한 두통이 찾아왔다. 필자는 보워 박사에게 말했다. "이 제 좀 자야겠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

예기치 않은 중규모 소용돌이의 발견을 대비, 보워 박사는 12개의 부표 중 하나를 따로 갖고 있었다. 그리고 항해 마지 막 날 우리는 위성 데이터를 통해 하나를 발견했다. 바로 그 토록 찾고자 했던 이르밍거 소용돌이였다. 하지만 소용돌이 를 발견했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폭풍이 물러간 바다는 더없이 고요했던 탓이다. 위성 자료가 정확하다면 분명 우 리의 밑에서는 해저 태풍이 불고 있는데도 말이다. 인류는 눈에 보이는 것에 주로 의지하며 살아간다. 그래 서인지 중규모 소용돌이, ppb 단위의 이산화탄소 증가, ㎜ 단위의 해수면 상승, 무선 전파, 암흑물질 등 눈에 보이지 않 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현상을 증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나마 최선책이 보워 박사팀처럼 오류의 여지가 있는 기기와 불완전한 지식에 의존, 간접적으로 감지하는 정도다. 이를 감안하면 수백년 전의 자연과학자들이 부럽지 않 을 수 없다. 그들은 오직 현미경과 망원경으로 물 한 방울 속 의 생태계부터 우주 저편의 행성까지 눈에 보이는 것만을 찾으면 됐기 때문이다.

사실 보워 박사팀이 래브라도해에 던져 넣은 12개의 부 표는 전 세계 바다에 배치된 수많은 부표 중 극히 일부에 불 과하다. 해양학자들이 바다에 넣어 놓은 수중 부표는 이미 3,000여개에 달한다. 그렇지만 이들 부표들은 수심 2㎞ 이 하로 내려가지 못하도록 설계돼 있다. 또한 북극의 특정 위도 이상으로 이동하지도 않는다.

보워 박사의 설명이다. "그 때는 깊은 수심과 북극의 얼음에 의해 무선신호가 약해져 통신이 불가능합니다." 중립 부력 부표가 수집하는 데이터 로도 심해의 비밀을 모두 풀 수는 없다는 얘기다. 앞서 발견된 이르밍거 소용돌이도 결국 오류로 판명됐 다. 우주홀연구소의 누군가가 기한이 지난 지도를 보내왔던 것이었다.

연구팀이 하나 남은 부표를 던져 넣었을 때 소용 돌이는 이미 지나간 후였다.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고가의 장비 하나가 의미 없이 사 라졌다고는 해도 연구가 실패한 것은 아니다. 계류 장치의 SALP에 장전된 부표 1개가 성공적으로 발사됐으며 나머지 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엄청난 노력과 적잖은 예산이 필요하겠지만 앞으로 이들이 전해 줄 정보는 지금껏 바다에 드리워져 있 던 암흑의 장막 하나를 걷어내는 데 많은 힘을 보탤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인류에게 새로운 세상의 모습을 선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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