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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값 논쟁 진실게임

정부-정유사 가격 논리를 심층 분석한다


고유가 문제가 연일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정부는 세금 인하와 석유유통 구조 개선 카드를 써가며 기름값 잡기에 공력을 쏟아 부었다. 공정거래위원회를 앞세워 정유사 담합 사례를 강도 높게 추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부가 펼쳐 든 비장의 카드는 번번이 시장의 냉대를 받았다. 기름값이 치솟았던 2008년이나 현재나 상황은 비슷하다. 올라갈 땐 신바람을 내고 내려갈 땐 풀 죽은 기름값이 이번엔 과연 조정될 수 있을까. 기름값을 움직이는 메커니즘을 심층 분석했다.

SK이노베이션(구 SK에너지) 구자영(63) 사장은 잠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난 2월 10일 SK이노베이션 본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 질의응답 자리에서였다. 구 사장은 질의응답에 앞서 SK이노베이션의 글로벌 사업 비전 을 소개했다. 또 1월에 다녀온 스위스 다보스포럼에서 느낀 점을 기자들에게 차근히 설명했다. 하지만 CEO 질의 응답 시간이 시작되자 조용히 듣고만 있던 기자들의 태도가 돌변했다. 마치 국정감사 현장을 방불케 할 만큼 구 사장에게 적극적인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지금 대통령, 장관, 공정위원장까지 기름값을 인하하라고 할 정도로 말들이 많습니다. 정유업계 1위 업체의 CEO로 어떤 입장이십니까?" 구 사장이 대답했다. "물가 안정차원에서 유가를 내려야 한다는 정부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협조할 것은 협조해야 하며 그것이 기업의 사회적 책 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질문은 이어졌다. "협력할 수 있는 폭이 공급가격의 인하가 될 수도 있나요?" 구 사장은 답했다. "정부의 뜻을 심도 있게 고민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 다." 구 사장은 기자들의 질문에 대부분 정부 정책에 따르겠다는 모범답안만을 제시했다.

"어느 시점에 얼마나 가격을 하락할 건지 묻고 싶은데요, 말씀 안 하실 거죠?" 불쑥 기름값 인하 계획을 직접적으로 꼬집는 기자의 질문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이번에도 구 사장은 구체적인 답변을 하지 않았다. 구 사장이 기자들 앞에서 기름값을 인하하겠다고 직접 밝히는 건 정부 압력에 스스로 백기를 드는 꼴이 되기 때문이었다. 정부의 뜻에 따르는 흉내를 낼 수는 있어도 시장가격 인하의 열쇠를 정부 손에 직접 쥐어 쥘 수는 없단 뜻이었다

정유사 기름값 문제에 대한 십자포화는 또 있었다. 구자영 사장이 기자간담회를 하던 시각에 지식경제부 장관도 오찬 기자간담회를 갖고 있었다.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은 이 자리에서 정유사를 겨냥한 직격탄을 거침없이 날렸다. 최 장관은 기자들에게 말했다. "정유사 회계 장부를 분석해 보겠습니다. 기름값 원가 구성요인을 뜯어보고 원가구조를 직접 계산할 생각입니다." 최 장관이 직접 원 가를 계산하겠다고 나선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최 장관은 1977년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 해 1년 가까이 삼일회계법인에서 근무한 이력을 갖고 있었다.

최 장관은 구체적인 항목을 조목조목 따지며 말했다. "정유업계는 영업이익률이 3%대라는 걸 내세우며 다른 제조업보다 영업이익률이 낮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른 제조업과 달리 영업외 비용이 별 로 없다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그렇게 따지면 영업이익률은 절대 낮지 않아요." 그는 덧붙였다. "한국 같이 작은 나라는 정유사가 몇 개씩 있을 수는 있는 환경을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자연적으로 정유사 과점이 이뤄지고 있는 겁니다. 정부가 들여다볼 여지가 충분히 있다는 말이죠. 경제학에도 이런 경우엔 정부 개입이 괜찮다는 이론이 있습니다." 최 장관은 정유사에 대한 불신을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지식경제부 장관이 특정 기업 회계장부를 들춰보겠다고 나서면 정부의 시장 개입 논란이 불거질 수 있다. 시장경쟁을 촉진시켜야 할 정부가 시어머니처럼 기업 살림살이를 일일이 간섭하는 건 볼썽사나워 보일 수도 있다. 기업의 불법 거래행위나 가격 폭리를 조사하는 건 공정거래위원회의 소임이다. 그럼에도 최 장관은 정유 사 회계장부의 구체적 항목을 들먹이며 기업 수사 의지를 드러냈다. 장관이 공정거래위원회의 시장감시 임무를 떠 안겠다고 자처한 꼴이다. 익명을 요구한 국내 정유사 관계자는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공정거래위원회는 매년 정유사 장부를 들쑤셔 왔습니다. 담합이나 폭리의 의혹을 찾아내려고 혈안이었죠. 하지만 정유사 장부는 걸고 넘어질 게 없을 만큼 투명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지식경제부까지 앞장 서서 정유사 때려잡기에 나서고 있는 겁니다."

때마침 최중경 장관과 같은 날에 기자간담회를 갖은 구자영 사장의 답변은 정유업계를 대변하는 무게 있는 말로 둔갑했다. SK이노베이션 행사에 참석한 기자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취잿거리였던 셈이다. 한 기자가 구자영 사장에게 정유사 가격 담합 의혹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구 사장은 잘라 말했다. "정유업계는 상당히 투명합니다. 고의적인 담합이 어려운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공정거래위원회와 지식 경제부가 세밀하게 시장을 들여다보기 때문에 최근 5 년간 석유 유통구조와 원가가 상당히 투명해졌습니다." 기름값에 대한 갖가지 말들이 터져 나왔던 2월 10일은 그렇게 숨가쁘게 지나가고 있었다.

시장 신봉자에서 시장 감시자로

지난 1월 18일이었다. 정부는 지식경제부 내에 기름값을 평가할 태스크포스팀을 가동시켰다. 관례적으로 경제 부처 관계자들이 모여 물가안 정 차원에서 기름값을 논의한 적은 많다. 하지만 이번엔 형태와 의도가 이전과는 많이 달랐다. 지식 경제부, 기획재정부, 공정거래위원회, 국무총리실, 대한석유협회, 연구기관, 시민단체 등에서 나온 기름값과 관련된 국내 전문가들이 모두 동원됐다. 석유시장을 감시할 특별조직의 출범이었다. 에너지 경제연구원 이달석 박사도 연초부터 TF팀 활동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이 박사는 말한다. "정부 차원에서 이렇게 대대적인 회의기구를 운영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인 것 같아요. 2월 안에 회의 결과물을 내놓고 구체적인 정책방향을 결정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난 설 연휴 전에 두 차례 회의를 가졌고 이제 한두 번 더 회의가 남았죠. 시간이 촉박하지만 최대한 각계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 분석하고 있는 중입니다."

정부가 대대적으로 기름값 잡기에 팔을 걷어붙인 데에는 그만한 계기가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1월 13일 국민경제대책회의에서 "(기름값을 포함해) 주유소 행태 등이 참 묘합니다"라고 말했다. 대통령의 발언은 국제 석유가격 하락에도 불구하고 쉽게 떨어지지 않는 국내 정유업계의 판매 가격을 염두해 둔 것이었다. 올해 들어 리터당 휘발유 가격은 2008년 고유가 시절과 비슷한 리터당 1,900원에 육박하고 있다. 이 대통령 발언 이후 5일 만에 범 부처 차원의 TF팀이 신설됐다. 막상 정부는 기름값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정유사를 TF팀에서 빼버렸다. 대한석유협회가 정유사를 대신 해 충분히 업계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익명을 요구한 지식경제부 한 관계자는 말한다. "장middot;차관들도 정유사들을 굳이 왜 참석시켜야 하냐고 말씀하셨죠. TF팀 구성 취지도 정유 사 입장을 일일이 들어주면서 기름 시장 구조를 살펴보자는 게 아니었습니다. 시장 플레이어의 목소리보다 시장의 근본적인 모순을 들여다보려는 의지가 강했죠. 국제가격과 국내가격을 비교해보 고 주유소별 판매가격도 꼼꼼히 따져볼 계획입니다." 이전 기름값 논란 때와 마찬가지로 정부는 정 유사를 직접 겨냥하고 있다.

정유사는 대부분 중동지역에서 원유를 도입해 정제하지만 공식적으론 싱가포르 제품가격을 국제 가격 기준으로 삼고 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도 국제적인 가격으로 인정하는 싱가포르 석유가를 기준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기준가에 있는 게 아니다. 국제유가가 오를 땐 빠르게 많이 오르고 내릴 땐 천천히 적게 내리는 국내 기름값이 여론의 질타를 받아왔다. 이른바 '기름값 비대칭성의 문제' 다. 정부는 비대칭성의 주된 원인에는 정유사의 은밀한 담합이 얽혀 있다고 추측하고 있다. 고유가 현상이 나타났던 2008년이나 지금이나 상황은 비슷하다. 정부가 기름값이 고공행진을 할 때면 어김없이 정유사에 기름값을 인하하라고 압박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의혹이 있기 때문이었다.

2008년 고유가 시기를 거치면서 기름값의 비대칭성을 파헤쳐 보자고 만들어진 게 석유시장감시단이었다. 국내 빅4 정유사들의 담합행위를 집중적으로 감시하기 위해 2009년 10월 조직된 시민감시단이었다. 초대 원장은 서울여대 송보경 교수가 맡았다. 석유시장감시단 임원진에는 교수, 연구진 등 석유시장 전문가들이 대거 포진했다. 석유시장감시단의 김창섭 부단장은 말한다. "출범 초기부터 많은 준비를 했습니다. 정유업계에 분명히 담합이 있다는 심증을 가지고 시작했으니까요. 정부와 청와대의 기대도 무척 컸습니다. 하지만 폭리나 담합은 구체적인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감시단은 그걸 찾아내기 위해 노력했죠."

그러나 감시단은 얼마 안 돼 힘 빠진 결과물을 내놓고 말았다. 2010년 2월 프레스센터에서 김창섭 부단장은 이렇게 발표했다. "지난 2개월 동안 휘발유 가격의 비대칭성 문제를 조사했습니다. 정유사는 크게 의심되는 부분 없이 안정적으로 휘발유 가격을 결정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가격결정 구조가 매우 복잡해 소비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선 정유사의 설명이 필요할 것입니다." 감시단이 되레 정유사의 손을 들어주는 꼴이었다.

김창섭 단장은 말한다. "시장을 감시해야 하는 감시단이 신통한 결과를 내놓지 못해서 정말 힘이 빠지더군요. 감시단은 공식적인 데이터를 가지고 통계학적으로 석유시장을 분석합니다. 의혹이 있다면 수치에서 발견된다는 얘기죠. 담합이다 폭리다 하는 가치판단은 정부가 할 일입니다." 그는 덧붙인다. "지난해 정유사는 리터당 휘발유 공급가격에서 38원을 마진으로 남겼습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말한다면 거기서 사회환원의 명분을 만들 수는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엄연히 시장감시의 실패였다. 어쩌면 감시단은 복잡한 석유시장 속에서 감시단의 기능과 능력의 한계를 절감했을지 모른다. 이명박 정부도 석유시장의 높은 벽을 느끼긴 마찬가지였다. 2008년 한 해 동안 이명박 정부는 기름 값을 잡기 위해 다양한 전략적 카드를 있는 대로 꺼내 들었다. 2008년 2월 국제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돌파하자 3월에 유류세 10% 인하를 과감하게 단행했다. 정부가 고유가에 맞춰 유류세를 인하한 건 드문 일이었다. 자칫 포퓰리즘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산업기술대학교 강승진 교수는 말한다. "한시적으로 세금을 내렸지만 시장에선 불과 몇 백 원의 효과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두 달이 지나니까 10% 유류세 감면 효과가 사라지더군요. 그러 자 2009년 다시 원상복귀를 해버렸습니다." 세금 인하 카드가 무용지물이 되면서 이번엔 석유유통 구조를 개선하는 다양한 정책이 수립됐다.

강승진 교수는 설명한다. "2008년 3월부터 정부로부터 다양한 석유유통구조 개선책들이 쏟아 져 나왔어요. 우선 주유소 간, 대리점 간 석유제품 거래를 제한하던 조치를 해제했습니다. 쉽게 말 해 SK 주유소가 GS주유소에서 석유 제품을 얼마든지 사거나 되팔 수 있다는 얘기였죠. 여기에 대형 마트 주유소도 설립이 허용됐습니다. 또 석유수입업자의 등록조건을 제한하던 갖가지 규제를 모 두 완화시켰습니다.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건 정유사의 상표표시제도를 없앤 거였어요." 상표표시 의무가 해제됐다는 건 정유사들이 타사 주유소에 기름을 공급해도 된다는 의미였다. 그건 정유사 간 급격한 시장경쟁을 부추기는 버튼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개선책은 석유시장의 자율경쟁을 촉진시키면 기름값을 반드시 떨어뜨릴 수 있다는 정부의 철썩 같은 믿음 때문에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2008년 여름이 되자 서울 시내 주유소휘발유 가격은 정부 정책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리터당 2,000원을 돌파했다. 어쩌면 이때부터 정부는 석유시장 구조를 더욱더 의심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익명을 요구한 지식경제 부 한 관계자는 말한다. "2009년에도 세금 인하 카드와 유통구조 개선 카드가 당최 먹혀 들지 않았습니다. 사업자 간의 시장싸움도 눈에 띄지 않았죠. 이런 걸 두고 흔히 '시장이 솔리드해졌다' 고 말합니다. 윗선에서 더욱 매서운 눈초리로 정유사들을 바라보기 시작했죠." 이명박 정부는 시장의 자율 경쟁원리에 기름값을 마냥 맡겼다가 실패를 맛봤다. 그 정책 실패는 정부를 시장의 냉혹한 감시자로 돌변시킨 이유가 되기에도 충분했다.

시장 가격인가, 담합 가격인가

공정거래위원회는 1월 13일부터 4일간 4개 정유사(SK이노베이션, GS칼텍스, 에쓰오일, 현대 오일뱅크)와 SK가스, E1 등 2개 LPG 수입사를 상대로 대대적인 현장조사에 착수했다. 공정위원회 산하 시장감시국, 카르텔조사국, 소비자정책국 등 핵심 부서 직원 100여 명이 에너지 기업 가격 정보와 관련된 자료를 모두 수거해 조사하는 이른바 '싹쓸이 수사'였다. 공정위가 시장 담합을 조사할 때 주로 쓰는 방법이다. 익명을 요구한 정유사 가격담당자 출신의 한 관계자는 증언한다. "공정위가 정 유사 내부자료를 수백, 수천 장 가져간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겁니다. 그 자료를 분석해낼 능력 이 없기 때문이죠. 대부분 정유사 가격자료는 수백 장의 엑셀시트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 장마다 숫자들이 눈이 아플 정도로 가득 채워져 있어요. 정유사가 원유를 정제해 만든 14개 석유제품의 모든 정보가 그 엑셀시트 안에 숫자로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겁니다." 그는 덧붙인다. "사실 공정위 직원 100명이 아니라 1,000명이 달려들어도 14개 석유 관련 제품 개별 원가는 물론 전체 원가도 추정할 수 없을 겁니다. 정유사의 가격결정 공식은 일반인이 접근하기에 매우 복잡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이죠." 그의 말은 이어졌다. "공정위가 정유사 수사에서 제일 먼저 맞닥뜨리는 벽이 뭔 줄 아세요? 다름 아닌 이 숫자들입니다. 아마 이번에도 몇 달 끙끙 앓다가 뚜렷한 혐의를 찾지 못하고 암묵적 담합 행위를 했다는 구실로 정유업계를 밀어붙일지 몰라요."

1997년 이전까지만 해도 기름값은 정부의 가격고시 제도에 따랐다. 정부가 14개 석유제품의 가격을 일일이 책정해 시장에 고시를 한 것이다. 이때 석유제품별 가격결정 공식은 정부 혼자서 만든 게 아니었다. 당시 정유사 가격담당자들과 정부 담당자들이 모여 업계와 정부의 현실에 맞게 짜맞췄다. 그 뒤로 정부가 이 공식을 통해 가격을 고시하면 정유사가 그 가격을 받아서 시장에 제품을 공급했다. 구조적으로 기름 값을 결정하는 시스템이 변경된 시기가 있었다. 지난 1997년이었다. 정부는 기름값 결정의 모든 권한을 정유사에 맡겨버렸다. 완전한 시장경쟁 시스템을 정유업계에 도입한 것이었다. 하지만 기존의 가격결정 공식은 그대로 정유사 내부에 남아 있었다. 익명을 요구한 관계자가 주목한 점도 바로 이 부분이다. 가격은 자유화됐어 도 정유사의 가격결정의 뿌리에는 과거 가격결정 공식이 살아있다는 것이었다.

정유사의 국내 공급가격은 국제 거래가격이 있어야 결정할 수가 있다. 정유사는 가격자유화 이후 2001년까지 원유가를 국제가격 기준으로 삼았다. 2002년부터는 싱가포르 현물시장 가격을 국제가격으로 규정해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 다. 익명을 요구한 관계자는 말한다. "공정위가 구체적인 담합 증거를 포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격자유화 이전부터 가격결정 공식을 꿰뚫고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지금 정 유사에서 가격담당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소용 없습니다. 그들은 가격을 제품별로 어떻게 배분 해서 얼마에 내다팔까를 고민하지, 제품원가나 가격공식 따위는 잘 모른다고 할 수 있어요."

사실 정유사가 공개하는 기름값의 구조는 의외로 간단하다. 정유사가 원유 생산지에서 원유를 사들여 배로 싣고 오는 도중에 싱가포르 석유 현물시장에서 국제 석유 제품가격이 결정된다. 정유사는 국내 정제시설에서 14가지 석유 제품을 생산해 각각의 제품에 유통비용과 정 제마진을 더한다. 이게 정유사의 국내 공급가 다. 이 공급가에 정부와 주유소가 달라붙어 기름값을 올리기 시작한다. 정부는 교통세, 교육세 등 갖가지 세금을 갖다 붙인다. 보통 세금은 휘발유 값의 50%에 달한다. 세금이 붙은 기름 값은 주유소 사장들을 거쳐 판매가격이 매겨진다. 이때 주유소의 마진이 얹혀진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드러나지 않는 게 있다. 바로 원유의 생산원가다. 실제로 정유사가 14개 제품을 생산할 때 들어가는 각각의 생산원가나 전체 평균 생산원가는 알 도리가 없다. 가격자유화 이후 정유사는 기업의 영업비밀을 내세워 단 한번도 원가를 공개하지 않았다. 가격결정 공식을 꿰뚫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면 복잡한 정유사의 생산원가를 계산해내기도 어렵다.

이에 대해 에너지경제연구원 이달석 박사는 반문한다. "이제 와서 가격결정 공식 이야기를 끄집어 내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다만 석유가격 이 자유화되고 몇 년 동안 가격결정 공식이 중요한 시기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정유사엔 과거의 가격공식보다 더 영향력이 큰 가격결정 요인이 산재해 있습니다. 국내외 석유수급상황이라든지, 글로벌 정유사간의 시장경쟁 등이 기름값을 더 요동치게 하는 원인이란 얘기죠." 강 승진 교수는 말한다. "전체 시장을 들여다보면 기름값 폭리를 가장 많이 하고 있는 곳은 산유국입니다. 고유가 시기를 활용해 엄청난 폭리 취하고 있죠. 사우디아라비아의 대략적인 원유 생산비용은 배럴당 10달러도 안됩니다. 그걸 한국이 90달러, 100달러에 사오고 있는 거죠."

정유사가 담합 행위를 했다는 판단은 전적으로 공정위에게 맡겨야 하는지도 모른다. 지난 10 년간 공정위는 정유사의 담합 행위에 대한 제재 조치를 총 네 차례에 걸쳐 시행했다. 하지만 2000년 정유사 군납 유류 입찰담합 건을 시작으로 사실 공정위의 담합 증거는 매번 불분명했다. 네 차례의 담합 행위에 대해서 공정위는 "암묵적인 담합 행위가 포착됐다" 는 심증에 가까운 근거와 몇 개의 자료로 정유업계를 몰아세웠다. 그동안 결정적인 담합의 증거를 정유사 장부에서 속 시원히 찾지 못했단 말이다. 암묵적 담합은 해석하는 입장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다. 경제 검찰로 불리는 공정위에 암묵적 담합이란 용어는 손쉽게 휘두를 수 있는 철퇴였단 얘기다.

공정위는 2009년 LPG 담합행위를 한 정유업계와 LPG업계에 6,689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과징금을 부과했다. 담합 증거는 SK에너지가 자진 신고한 A4 용지 몇 장 분량의 진술서가 결정적 이었다. SK에너지는 리니언시 제도(제재 감면이라는 당근을 줘서 기업들의 자수를 유도하는 제도)를 통해 과징금의 100%를 면제받을 수 있었다. 당시 SK에너지는 정유사 사이에서 왕따가 됐다. SK에너지가 일부러 과징금을 면제받으려고 리니언시제도를 이용해 공정위에 허위 진술을 했 다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논란의 불씨는 여전히 가라앉지 않고 있다. 가격자유화가 14년째에 접어들고 있지만, 공정위의 조사활동은 정유사 장부를 대부분 비껴나가 암묵적 담합 행위라는 모호한 증거만이 제시되고 있는 상황이다. 어쩌면 최중경 장관이 기자들 앞에서 정유사 장부를 뒤져보겠다고 일갈한 이유는 이젠 객관적이고 명백한 담합조사의 증거가 필요했다고 느꼈기 때문 인지도 모른다.

공정한 기름값 시대는 올까

"차라리 과거의 정부 가격고시제 시절로 돌아가자는 정유사의 하소연도 있습니다. 정부가 가격자유화를 시켜놓고 이제 와서 이렇게 달달 볶을 바에는 그게 더 편하다는 얘기죠." 강승진 교수의 말이다. 기름값을 통제하는 정책은 단기적으로 효과를 볼지는 모르지만, 정유사의 국내 공급물량을 축소시켜 제품가격을 올리는 부작용도 낳을 수도 있다. 자유시장 경제를 신봉하는 미국도 일찍이 이러한 실패를 경험했다. 1973년 미국 닉슨 대통령은 국제 원유가의 상승압력으로 정유사 휘발유 값을 동결시켜버렸다. 그 결과 미국 내 석유부족 현상이 갑자기 발생했다. 당연히 미국의 휘발유 값은 널뛰 듯 뛰어 올랐다. 기름값 문제를 단기적인 제도장치로 해결하다 불거진 일이었다. 이달석 박사는 말한다. "정부는 환율, 이자율과 같은 거시경제 지표를 적절히 조절해가며 기름값 잡기에 나서야 합니다. 그런 제도적 장치를 먼저 계획하고 정유사에 세부적인 주문을 해도 늦지 않습니다."

어쩌면 국내 석유시장에 필요한 건 제도가 아니라 소통이 먼저일지도 모른다. 지난 2월 11일 나완배 GS칼텍스 사장은 껄끄러운 상대인 김동수 공정거래위원장과 마주 앉아야만 했다. 광화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15대 기업 CEO와 공정위원회 위원장과의 오찬 자리에 나 사장은 정유업계 대표로 참석했다. 공교롭게도 나 사장은 김 위원장 바로 앞에 자리를 배정받았다. SK이노베이션 구자영 사 장이 기자들에게 한바탕 시달린 다음 날이었다. 나 사장은 김 위원장의 발언을 꼼꼼히 노트 위에 옮겨 적었다. 행사를 마친 후 나 사장은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유사가 정부에) 미움을 받는 게 아니라 그간 정부와 소통이 부족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는 정부와 적극적으로 대화하고, 소통에 나설 생각입니다." 정부 뜻을 따르기만 하겠다던 정유업계가 한발 먼저 정부 곁으로 다가서겠다는 적극적인 의지를 표명한 셈이었다.

석유시장감시단 송보경 단장은 정부와 정유사가 기름값 상승의 연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몰아세운다. 그녀는 한 경제전문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부와 정유사 모두 국제 유가 상승의 프리미엄을 즐기고 있습니다. 유가가 상승하면 공장도 가격이 올라 정부는 그만큼 높아진 부가세를 징수할 수 있습니다. 정유 사는 유가가 오를 때 석유가격을 더 많이 인상 할 수 있는 여지가 생깁니다."예전처럼 기름값 고공행진을 두고 정부와 정유사가 서로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할 때가 아니라는 지적이다.

사실 소통 부재는 정부와 정유사 사이에서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기름값을 둘러싼 정부 부처 안의 이해관계도 매우 복잡하다. 유류세는 기획 재정부에서 책정한다. 하지만 걷어들인 세금은 대부분 국토해양부가 사용한다. 실제 기름값 관련 정책을 입안하는 지식경제부는 세금인하를 요구하는 여론의 뭇매를 대표로 혼자 맞고 있다. 기름값 관련 정부 부처 세 곳이 서로 다른 입장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날고 기는 기름값을 잡기 위해 한 목소리를 내는 건 힘든 일이란 얘기다.

강승진 교수는 말한다. "먼저 정부가 기름값과 관련해 하나의 생각과 하나의 행동을 할 수 있는 실무적인 소통창구를 마련하는 게 우선입니다. 그동안 업체와 정부 사이에 너무 높은 담이 쌓여 있었어요." 기름값 담합 문제는 2002 년 이후 고유가 행진을 이어오는 동안 매년 불거져 왔다. 그 와중에 정유사는 여론의 따가운 시선에 밀렸고 정부의 눈치 살피기에 바빴다. SK이노베이션 구자영 사장은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해석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고의적인 담합의 시대는 지나갔다" 고 말했다. 정부와 정유업계가 기름값 문제를 소통으로 해결하는 접점을 찾을지 지켜보는 일만 남은 듯하다.

이권진 기자 goenerg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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