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경원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 교수
오랫동안 병고에 시달렸던 스티브 잡스가 애플에서 사퇴했을 때, 그의 건강은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었다. 하루 빨리 잡스 없는 애플의 시스템을 구축해야 했다. 세계 브랜드 가치 8위 기업 애플은 신속하게 후임 CEO로 팀 쿡 Tim Cook을 임명하고 ‘아이폰 4S’를 출시하는 등 겉으로는 경영권 승계가 무난하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애플이 계속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다. 간결한 조형미와 직관적인 인터페이스 등 '굿 디자인'으로 혁신을 주도했던 애플의 디자인 신화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사람들의 시선이 모아지고 있었다.
후계자로 떠오른 조너선 아이브
잡스의 후계자 물망에 오른 사람들 중에는 최고운영책임자(COO)였던 팀 쿡 외에도 최고디자인책임자(CDO)인 조너선 아이브 Jonathan Ive 부사장이 있었다. 하지만 쿡이 애플의 차기 CEO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1998년 애플에 입사해 2007년 COO로 승진한 쿡은 이미 경영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그는 2009년 잡스가 간 이식을 위해 휴직했던 몇 달 동안에는 CEO 역할도 수행했었다.
반면 아이브의 부상은 큰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바로 애플이 자랑하는 '단순하고 우아한 디자인'을 만들어낸 주역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잡스가 신제품을 발표할 때마다 모두 자신이 디자인한 것처럼 행세했기 때문에 정작 실제 디자이너였던 아이브의 역할이나 기여가 알려질 기회는 제한적이었다. 물론 아이브는 자신의 디자인을 잡스가 도용했다고 주장해왔다. 그렇다면 잡스와 아이브는 어떻게 협력할 수 있었을까?
잡스가 꿈꾸면, 아이브가 만든다.
2010년 7월 미국 포춘은 기술부문에서 가장 스마트한 인물 50명을 선정·발표하면서 잡스를 '최고의 경영자', 아이브를 '최고의 디자이너'로 평가했다. 잡스를 선정한 이유는 그가 '사람들이 진정으로 즐길만한 제품을 만들어낸 공상가, 마이크로 매니저, 그리고 쇼맨'이라는 것이었다. 특히 잡스는 대부분의 경영자들과는 달리 '팝 문화의 아이콘'이라는 점이 높이 평가되었다.
포춘은 "스티브 잡스는 아이폰을 꿈꾸었고, 조너선 아이브는 그것을 창조했다"라는 짤막한 말로 두 사람의 역할을 명확하게 정리했다. 잡스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보스만큼이나 완벽주의자인 아이브가 디자인 역량을 십분 발휘한 덕분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 CEO가 아무리 훌륭한 제품 콘셉트와 전략을 갖고 있더라도, 그런 것을 현실로 구체화시켜줄 CDO가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따라서 잡스는 평소 '세상의 어떤 것을 주어도 아이브와는 바꾸지 않겠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한때 퇴직을 고려했던 아이브
1967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아이브는 은세공 교수인 아버지로부터 완벽한 마무리를 강조하는 공예가 정신을 배웠다. 노섬브리아 대학교(구 뉴캐슬 폴리테크닉)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아이브는 단지 외관에만 치우치지 않는 영국식 산업디자인 교육 덕분에 제품의 기능과 형태가 조화를 이루는 디자인 역량을 기를 수 있었다. 그는 디자인상도 여러 차례 수상했다.
런던에서 '탠저린'이라는 디자인회사 설립에 참여했던 아이브는 1992년 고객사였던 애플로 자리를 옮겼다. 아이브가 애플에서 처음으로 디자인한 것은 세계 최초의 PDA인 뉴튼이었다. 하지만 당시 CEO 존 스컬리가 야심 차게 추진했던 뉴튼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일정관리, 메모, 필기 인식 등 획기적인 기능을 갖추고 있었고 디자인도 나름대로 무난했지만, 너무 비싼 가격과 육중한 무게, 느려터진 명령처리속도 등으로 인해 실패작이 되고 말았다 .
1996년 아이브는 애플의 산업디자인 팀장으로 승진했다. 하지만 좀처럼 역량을 발휘할 기회를 잡지 못했다. 당시 애플의 혁신 정책이 엔지니어링 주도의 '비용 절감'에만 치중하는 바람에 독창적인 디자인을 만들어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97년 잡스가 CEO로 복귀한 것은 심각하게 퇴직을 고려하던 아이브에게 새로운 전기가 되었지만, 처음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매끄러웠던 것은 아니다. 훌륭한 목수인 아버지에게서장인정신을 배웠고 바우하우스* 디자인 이념에 통달했던 잡스가 외부에서 디자인 슈퍼스타를 초빙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사내 디자이너들의 입지는 좁을 수 밖에 없었다.
사내에 조성된 창의적인 제품 혁신 환경
최근 출간된 스티브 잡스의 공식 자서전에는 이런 얘기가 나온다. 잡스가 처음으로 애플 팀장들을 모두 소집한 회의에서 "우리의 목표는 단순히 돈을 버는 게 아니라 훌륭한 제품을 만드는 것"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에 아이브가 애플에 남아 있기로 했다는 것이다. 아이브는 CEO가 그런 철학을 갖고 있다면 한동안 비용절감에만 치중했던 애플에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처음 애플의 디자인 스튜디오를 함께 둘러보던 날, 잡스와 아이브는 대화를 나누다가 서로의 사고방식이 같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이후 두 사람은 친구 이상의 끈끈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디자인이 주도하는 제품 혁신이라는 점에서 잡스와 아이브가 공동으로 탄생시킨 첫 성과는 아이맥이었다. 두 사람의 완벽주의자가 의기투합해 기존 컴퓨터의 고정관념을 완전히 벗어난 소비자 친화적인 PC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투명한 조개 형태의 케이스 개발을 포함해 모든 개발 과정은 모험의 연속이었다. 고난도의 생산 공정을 감당해낼 협력업체의 선정에서부터 적절한 소재의 선택까지 난제가 산적해 있었다. 경쟁사들의 PC 케이스는 20달러 정도 였지만, 아이맥은 65달러라는 높은 생산비용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러나 잡스의 결단은 아이맥의 성공으로 충분히 보상받았다.
디자인이 주도하는 애플의 혁신은 우연히 이뤄진 게 아니다. 애플이 자랑하는 '딱 맞음과 완벽한 마무리 Fit and Finish'를 실현하려면 밤낮으로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디자이너와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함께 고민하는 엔지니어,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 경영자라는 세 가지 요소가 어우러져야 한다. 잡스는 바로 그런 창의적인 혁신 환경을 조성하고 적극 활용했기에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특히 애플 신화의 가장 중요한 원동력은 '단순함은 곧 궁극의 정교함'이라는 신념을 갖고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전시될 만한 훌륭한 제품을 만들고자 했던 잡스의 열정이었다. 그의 자서전에 기술된 것처럼 보안이 철저히 유지되는 디자인 스튜디오 내에서 잡스와 아이브는 '애플다움'이라는 정체성 있는 제품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제 잡스가 없는 애플에서 아이브가 어떻게 그런 신화를 이어갈지, 귀추가 주목된다.
*바우하우스(Bauhaus) 1919년 독일 바이마르에 설립된 디자인 대학. 장식과 겉치레가 배제된 단순함을 추구하는 모던디자인 교육 기관의 효시이다.
사진 한국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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