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훈 과학칼럼니스트 enitel@hanmail.net
30대 이상이라면 지난 1970년대에 방영됐던 추억의 외화시리즈 '600만 달러의 사나이'를 기억할 것이다. 항공기 사고를 당해 한쪽 눈과 한쪽 팔, 양 다리를 잃은 우주비행사가 최첨단 생체공학 눈과 의수, 의족을 부착한 사이보그로 거듭나 초인적 능력을 발휘하며 특수임무를 수행해나가는 내용이었다.
당시만 해도 이 같은 사이보그는 만화와도 같은 공상과학(SF)의 산물로 치부됐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세계 각국에서 사람에 버금가는 우수한 능력의 휴머노이드들이 속속 개발되고 있는 지금도 그런 생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600만 달러의 사나이가 첫 방영된 지 40여년이 지난 올해 2월 우리는 인공장기와 인공 의·수족, 인공혈액 등을 한 몸에 지닌 인공 사이보그 '바이오닉 맨(Bionic Man)'의 출현을 목도하게 됐다.
100만불의 사나이
바이오닉 맨의 개발 배경은 다소 의외의 구석이 있다. 로봇공학 연구소나 기업, 혹은 대형 국책 프로젝트의 산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다르다. 바이오닉 맨은 TV 프로그램을 위해 개발됐다. 영국의 채널 4 방송국이 기획한 '생체공학인간 제작 방법(How To Build A Bionic Man)'이라는 다큐멘터리가 그것이다.
실질적인 제작은 파퓰러사이언스에서도 자주 소개됐던 정교한 로봇 손 '덱스트러스 핸드(Dexterous Hand)'의 제작사인 영국의 섀도 로봇에서 주도했다. 우수한 로봇공학 능력에 더해 영국의 유명 방송인 스티븐 프라이를 본뜬 휴머노이드를 제작해 방송에 출현시켰었던 경험이 선정에 중요한 요인이 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새도 로봇의 리처드 워커 박사와 매튜 고든 박사팀은 전 세계 18개 대학 연구팀 및 기업으로부터 인공장기 등을 제공받아 신장 2m의 바이오닉 맨을 완성했다. 인공장기의 가격을 더한 제작비는 무려 100만 달러에 달한다.
바이오닉 맨의 전 개발 과정과 성능은 지난 2월 7일 방송전파를 탔으며, 3월 11일까지 영국 과학박물관의 '나는 누구일까요?(Who am I?)' 갤러리에 전시될 예정이다.
바이오닉 맨의 특징은 앞서도 말했듯이 뇌와 소화기관을 제외한 모든 부분이 인공 인체로 이뤄져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바이오닉 맨은 그 존재만으로 생명공학, 로봇공학 등 현대 첨단과학기술의 총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렉스의 외모에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부분은 단연 사람과 흡사하게 생긴 머리(얼굴)다. 섀도 로봇은 채널 4의 다큐멘터리 진행을 맡은 스위스 심리학자 베르톨트 마이어의 머리를 모사해 제작했다. 캐번디시 이미징에 의뢰해 마이어의 두개골을 고해상도 CT 스캔해서 렉스의 두개골을 만들었고, 그 위에 실리콘 소재 인공 피부와 안구 등을 부착한 것.
안구의 경우 미국 캘리포니아대학팀이 개발한 홍채에 영국 옥스퍼드대학팀의 시각장애 치료용 인공망막을 덧붙여 외부를 볼 수 있도록 했다. 안경에 장착된 카메라의 광학신호를 망막이 전달받아 두뇌 격인 중앙처리장치(CPU)로 보내는 메커니즘이다. 그러면 CPU의 시각 인식 알고리즘이 광학신호를 분석해 물체의 형태나 문양을 인식하며, 바이오닉 맨은 이 정보를 바탕으로 자신의 위치와 자세를 파악하면서 이동하거나 물건을 잡을 수 있다.
호주 시드니 소재 맥쿼리대학팀의 인공 내이에 힘입어 바이오닉 맨은 소리도 듣는다. 외부에서 소리가 들렸을 때 신경섬유를 자극, CPU에 전기신호를 전달하면 CPU가 이를 소리 형태로 재해석하는 방식이다. 기본 구조만 보면 인간의 귀와 거의 흡사하다.
바이오닉 맨은 그 존재 자체로 큰 의미를 갖지만 현대 생명공학과 로봇공학 기술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는 역설적 존재이기도 하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인공
특히 바이오닉 맨은 이런 소리 정보 해석능력과 맞물려 스티븐 호킹 박사가 사용하는 것과 유사한 '보이스 신디사이저', 인공지능시스템 '챗봇(Chatbot)'을 활용해 사람들과 간단한 대화를 나누는 것도 가능하다.
순환계를 이루는 인공 인체는 다년간의 생체 모방 연구를 거쳐 개발된 것들이다. 일단 인공심장은 미국 애리조나 소재 신카디아의 작품으로서 배터리로 구동되며 인공혈액을 바이오닉 맨의 채내 곳곳으로 순환시키는 역할을 한다. 가격은 7만6,000파운드(약 1억2,500만원)에 이른다. 바이오닉 맨 개발비의 10% 이상을 인공심장 하나가 차지하는 셈이다.
인공혈액은 영국 셰필드대학팀이 개발했으며 액체 플라스틱 소재여서 진짜 혈액과 달리 세균 감염의 우려가 없다고 한다. 또한 예일대학팀의 인공 비장이 인공혈액을 정화한다.
바이오닉 맨에는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샌프란시스코캠퍼스 슈보 로이 박사팀의 인공 신장과 영국 드몽포르대학의 인공 췌장도 달려있다. 이중 신장은 실리콘 소재 나노 여과시스템으로 소변의 불순물을 거르는데 오는 2017년 임상시험이 예정돼 있다.
기도(氣道)는 영국 런던의 로열프리병원의 것을 사용했다. 지난 2011년 스웨덴의 한 환자에게 성공리에 이식된 제품이다.
사지(四肢)는 어떨까. 팔은 자가 학습기능을 갖춘 미국 존스홉킨스대학의 모듈형 인공 팔, 손은 영국 터치 바이오닉스의 'i-림(i-Limb)'을 장착했다. 이와 관련 재미있는 사실은 프로그램 진행자인 마이어 역시 i-림을 착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왼손이 없는 선천적 장애인으로 현재 팔 근육에서 발생하는 미세전기신호를 읽고, 손의 움직임으로 바꿔주는 i-림을 착용한 채 생활하고 있다.
이 전자식 인공 손은 실제 손에 가장 가까운 움직임을 구사할 수 있어 물건을 잡는 것은 물론 키보드 타이핑까지 가능하다. 블루투스 기능을 지원하는 만큼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무선 연결하여 손의 미세 조정 및 동작 설정이 가능하다.
바이오닉 맨의 인공 인체 중 가장 놀라운 부분은 단연 다리다. MIT 미디어 랩이 설립한 i워크의 인공 다리 '바이옴(BiOM)'에 뉴질랜드 렉스바이오닉스의 장애인 보행보조용 외골격을 덧씌운 구조를 하고 있다.
바이옴의 경우 인간의 종아리 근육과 아킬레스건의 움직임을 모방하는 모터 및 스프링 시스템, 몸의 움직임을 읽고 걷기·뛰기·오르기 등의 행동에 필요한 힘을 측정하는 센서를 통해 이동 시에 최적의 에너지를 배분한다. 여기에 최첨단 외골격이 더해지면서 바이오닉 맨은 지팡이나 보행기 같은 별도의 보조기구 없이도 안정적으로 걸을 수 있다.
바이오닉 맨의 빛과 그림자
이렇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실제 인체 장기의 약 70%를 인공 인체로 대체한 바이오닉 맨은 그 존재 자체로 큰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이를 정반대로 해석하면 현대 생명공학과 로봇공학 기술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는 역설적 존재가 될 수 있다. 바이오닉 맨을 통해 우리가 아직 해결하지 못한 기술적 난제들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단점은 소화기관의 부재다. 이는 눈부신 과학기술 발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누구도 인공 위(胃)와 인공 창자의 개발에 성공하지 못한 탓이다. 총격에 의해 소화기관이 망가진 뒤 평생(?) 이유식만 먹고 살 수밖에 없었던 영화 속 사이보그 '로보캅'을 떠올리게 되는 부분이다.
또한 바이오닉 맨은 생각을 할 수 없다. 이는 곧 인간의 뇌를 대체할 만한 인공지능의 부재를 뜻한다. 사실상 인체 내의 소우주라고 불릴 만큼 복잡하기 그지없는 뇌를 대체하거나 그 정도 수준의 지적 판단 및 자가 학습이 가능한 인공지능의 개발은 언제쯤 현실화될지 가늠하는 것도 어렵다.
이뿐만이 아니다. 바이오닉 맨에 장착된 인공 장기나 인공 의·수족도 실제 인체와 동일한 효용성을 발휘하지 못한다. 편안함은 차치하고라도 성능, 안정성 등 거의 모든 측면에서 한참 뒤쳐진다.
물론 그렇다고 이것이 바이오닉 맨이 지닌 근본적 가치까지 훼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인공 인체의 기술적 지평과 미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음은 결코 부인할 수 없다. 또한 향후 관련기술이 지속적으로 진보하면 현재와 같이 손상된 인체를 단순히 대체하는 수준을 넘어 원래 이상으로 기능을 강화시켜주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예상도 충분히 가능하다.
다만 이때 인류는 미래를 위해 중요한 결정의 기로에 서게 될 것이다. 인간의 기준은 어디까지이며, 이러한 기술의 발전이 인류의 발전에 긍정적 역할을 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심각하게 논의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마이어 박사는 자신의 얼굴을 닮은 바이오닉 맨을 보고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처음 바이오닉 맨을 만났을 때 두려움과 감동이 뒤섞인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바이오닉 맨을 탄생시킨 첨단과학기술들은 앞으로 진화의 한계를 뛰어넘는 수준으로 인간의 능력을 향상시킬 것이다. 이는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득이 될 수도, 해가 될 수도 있는 양날의 검이다."
미국 보스턴대학의 생명윤리학자 조지 안나스 교수도 마이어 박사의 발언에 공감했다.
"이러한 기술들이 본격 실용화되면 인간의 기준이 흔들리는 위험한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 기계와 인간이 하나가 된 새로운 인류는 자칫 통제 불능의 파괴적 여파를 불러올 수 있으며, 그 위험을 감지했을 때는 돌이키기에 너무 늦었을 지도 모른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