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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고암 이응노 10주기전 `통일무'
입력1999-03-28 00:00:00
수정
1999.03.28 00:00:00
『나의 그림은 추상적인 표현이었으나 1980년 5월의 광주사태가 있고나서부터 좀 더 사람들에게 호소되는 구상적인 요소를 그림 속에 가져 왔다. 200호의 화면에 수천명 군중의 움직임을 그려 넣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고 이내 광주를 연상하거나 서울의 학생데모라고 했다. 유럽사람들은 반핵운동으로 보았지만, 양쪽 모두 나의 심정을 잘 파악해준 것이다』고암 이응노(1904~1989). 분단시대라는 고난의 세월을 통일무로 승화시킨 고암은 생전에 이렇게 말했었다. 동양정신을 유럽에 전파한 동도서기의 거장 고암은 남북분단의 현장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또한 고암은 시대의 아품을 화폭 깊숙이 초대한 작가였다.
고암의 작고 10주기를 맞아 대규모 추모전시회가 「통일무」라는 이름으로 마련됐다. 4월 2일부터 22일까지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와 중구 태평로 조선일보미술관에서 마련된 이번 전시회에는 고암의 미공개작중 대표작 180여점과 부인 박인경씨, 아들 이융세씨의 작품이 각 5점씩 선보인다. 또 도양임술학교 출신의 고암 제자 20명의 작품 30여점이 자리를 함께 한다.
고암은 식민지 시절 간판가게나 신문사 보급소을 운영하거나 스승 집에서 집사노릇을 하면서 사회의 현실을 뼈속 깊이 체험했다. 고암이 묵죽화로 화단에 입문했지만 마냥 대나무에만 머물지 않은 것은 이때문이었다.
국전과 같은 제도권 미술에 싫증을 느낀 고암은 지난 58년 파리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다양한 재료적 실험을 거듭했으나 끝내 모필만은 버리지 않았다. 필묵은 고암예술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69년 동백림사건에 연루돼 반공법위반으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아 2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77년에는 피아니스트 백건우·영화배우 윤정희부부를 북한으로 납치하려 했다는 정부 발표로 다시 엄청난 시련을 겪었다. 얼핏 음악가 윤이상씨를 연상케하는 이력이다.
1983년 프랑스 국적을 획득한 그는 87년 평양에서 작품전을 가졌고 잇따라 89년에는 호암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갖게 됐다. 그러나 고암은 개막 당일 85세를 일기로 숨져 파리의 장 블랭 사원에 묻혔다.
그는 묵죽화에서 산수화, 수묵추상, 문자추상, 인간 연작을 남겼는데, 고전과 현대, 동양과 서양, 자연과 인간, 남과 북을 넘나들며 끊임없이 「순환-회귀」의 자기혁신을 추구했다.
고암은 수묵담채와 유화물감은 물론 나무·천·한지와 신문지등의 종이등을 사용했고, 감옥에서는 밥풀을 짓이겨서 작업을 했다, 처음 파리에 갔을 때 다양한 재료가 널려 있다는 이유로 구두공장을 작업장으로 삼기도 했고, 교도소에서 복역할 때는 휴지에 간장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던 것이다.
고암은 또 파리에 동양미술학교를 세워 필묵을 사용한 한국의 회화 기법과 정신을 유럽인 제자들에게 남겼고, 그의 작품 600여점이 전세계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가나아트센터는 전시 기간중 가나아트 아카데미홀에서 국내외에서 제작된 영상자료를 상영하는 한편 고암을 기리는 5차례의 특별 강연과 좌담회를 갖는다.
입장료는 대인 2,000원, 소인 1,000원. 20인 이상 단체가 1,000원이다. 문의 (02)720-1020. 【이용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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