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불과 한 세대 만에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감자 칩을 수출하는 국가에서 컴퓨터 칩을 수출하는 국가로 변모한 것이다. 일등공신은 국가 연구개발(R&D)이었다. 전전자교환기술(TDX)·반도체기술(DRAM)·이동통신기술(CDMA) 등 필수 기술을 국가 R&D를 통해 확보했고 수출 경쟁력을 강화했다. 국가 R&D가 있었기에 지금의 이동통신 강국, 반도체 강국, 나아가 정보통신기술(ICT) 강국 대한민국이라는 명성을 얻게 됐다.
그러나 지금의 국가 R&D 사업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실정이다. 양적으로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투자 규모가 세계 1위권에 이를 만큼 성장했으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국가 중 기술무역 수지는 최하위, 과학인용색인(SCI) 논문 피인용은 30위에 머무는 등 질적 성장에서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원인은 장기적인 R&D 정책의 미흡, 공급자 중심의 R&D 운영, 정부와 민간의 R&D 영역의 혼재 등이다. 정부출연 연구기관들의 연구 성과가 미흡하다는 지적도 있다. 현재 우리 사회는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 장기적인 저성장, 중국의 급부상, 인구 경쟁력 저하로 인한 내수 시장 규모 축소, 기업의 투자율 저하로 인한 기술 축적 속도 저하 등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여전히 국가 R&D이며 그 수행기관인 출연연들의 역할이 크다.
최근 미래창조과학부와 기획재정부는 국가 R&D 사업의 문제점을 해소하고 투자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혁신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혁신안은 기초 연구에 대한 지원 체계를 과제 중심에서 연구자 중심으로 전환하는 것과 응용·개발 연구는 공급자 중심에서 수요자 중심으로 개선하는 것을 주요 골자로 하고 있다. 또 국내 위주의 폐쇄형 전략을 국제적 R&D 협업의 개방형 전략으로 바꾸고 범부처 차원의 투명한 과제관리 체계 구축도 추진할 계획이다. 지난해 기초기술연구회와 산업기술연구회를 '국가과학기술연구회'로 통합하면서 과학기술 분야 연구기관 간 상호협력과 융합연구 활성화에 새로운 계기도 마련했다.
이러한 국가 R&D 정책의 변화 속에 출연연들도 역할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출연연들 간에 미래 지향점과 가치를 공유하고 영역 이기주의를 탈피해야 한다. 다양한 융합연구를 시작으로 출연연들은 정부 R&D 수요를 충족시킬 뿐만 아니라 급변하는 글로벌 시장의 수요를 만족시킬 수 있는 세계 최고의 연구기관으로 환골탈태해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국민에게 행복을 주고 사랑을 받는 기관'으로 거듭나야 한다. 10~20년 후의 우리 사회를 내다보며 국가혁신의 핵심 인프라, 재난재해 방지 등 다양한 사회적 수요에 대한 해결 수단을 제공해야 한다.
올 초에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을 주관기관으로 한국건설기술연구원·한국철도기술연구원·한국지질자원연구원 등 4개의 출연연이 사물인터넷(IoT)을 이용한 도시 지하매설물 모니터링·관리 시스템 연구 수행을 위해 UGS융합연구단을 출범시켰다. 아울러 한국화학연구원과 한국기계연구원·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한국과학기술연구원이 참여해 화학공정(CCP)융합연구단이 새롭게 출범했다. 정부 출연연 간 협력과 개방형 혁신을 통한 기술·산업 간 융합이 국가 R&D의 전환점을 마련할 수 있다.
사회사상가 제러미 리프킨은 저서 '한계비용 제로 사회'에서 앞으로 사회가 시장 자본주의사회에서 협력적 공유사회로 대전환을 이룰 것이라고 예언했다. 정부 출연연들이 협력적 공유의 중요성을 깨닫고 협업 생태계를 구축한다면 우리 사회는 현재 직면한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고 새롭게 도약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김흥남 ETRI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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