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뉴엘 사태를 계기로 시중은행과 무역보험공사, 관계 기관들이 무보의 단기수출보험 약관 개정을 위해 머리를 맞대고 있지만 서로 간의 입장 차가 현격히 커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은행의 수출금융을 관장하는 금융위원회와 무보의 상급 기관인 산업통상자원부도 협상 테이블을 마련했지만 좀처럼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글로벌 경기 위축으로 우리나라의 수출 실적이 6개월째 뒷걸음질치고 있는 가운데 윤활유 역할을 해야 할 수출금융에 제 기능을 상실한 데 따라 앞으로 수출 위축이 더 심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무보 약관 대체 어떻길래=8일 정부와 업계에 따르면 무보와 시중은행 10여곳, 금융위와 산업부는 지난 2일 '무보의 단기수출보험 약관 개정'을 위한 태스크포스(TF)를 꾸리고 의견조율에 들어갔다. 올해 초 발생한 모뉴엘 사기 대출에 대해 은행 측이 청구한 보험금 지급을 무보가 거절한 데 따라 현재와 같은 형태로는 더 이상 무보의 보증서를 신뢰할 수 없다는 은행들의 입장에 따른 조치다.
현재 무보가 취급하는 단기수출보험의 약관을 보면 무보는 은행들이 손실방지 및 경감 등의 의무를 태만히 한 데 따른 손실에 대해서는 보상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선관의무'를 명시하고 있다. 은행 측은 두루뭉술한 선관의무를 없애고 케이스별로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자는 입장이다. 시중은행의 한 관계자는 "신용보증기금이나 기술보증기금의 보증 약관을 보면 서로의 책임소재가 분명하게 명시돼 있다"면서 "무보의 단기수출보험 약관 역시 책임소재를 명확히 해야 은행으로서는 무보가 발급한 보증서를 믿을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무보 측은 약관상 선관의무는 일반적이므로 고칠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다.
또 다른 쟁점은 수출보험의 효력 발생 시점. 현재 무보 약관에는 '네트 거래'라는 용어를 통해 수입업자가 수입품을 수령한 시점부터 보험이 효력이 발생한다고 본다. 반면 은행들은 약관이 무역 현장의 실상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1~2개월가량 걸리는 운송기간을 고려할 때 수출회사는 물품 수령이 아닌 선적 시점을 근거로 자금을 융통해야 하고 실제 수출금융도 같은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다만 무보 측은 선관의무와 더불어 약관에 명시된 보험의 효력 발생 시점을 근거로 모뉴엘 사기 대출 건에 대한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은 상황. 수협은행과 농협은행이 무보를 상대로 단기수출보험금 지급소송을 제기한 데 이어 다른 은행도 송사에 나설 태세여서 약관부터 먼저 개정했다가는 소송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보험 효력 시점을 손질할 처지가 못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산업부·금융위, 제 식구 챙기기=양측 이견을 조율해야 할 당국은 "수출금융을 살려야 한다"는 원칙에는 공감하면서도 각론에서는 갈린다. 금융위는 은행을, 산업부는 무보 입장을 두둔한다. 금융당국의 한 관계자는 "아직 실무자 선에서 진행하고 있는 협의를 좀 더 지켜볼 계획이지만 현재 진행상황을 보면 은행이 억울한 입장이 많다고 판단된다"며 "핵심은 모뉴엘 건으로 깨진 은행과 무보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인데 그러자면 무보의 약관이 합리적인 수준에서 고쳐져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산업부는 이유 불문하고 일단 은행의 수출금융부터 풀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산업부의 한 관계자는 "합리적인 수준이라면 약관을 개정하는 게 맞다"면서도 "다만 모든 약관에 있는 주의의무를 문제 삼아 은행들이 수출금융을 줄이는 행태가 더 큰 문제가 아니냐"고 지적했다.
◇이해관계자 다툼 속 애타는 중기 수출업체=수출금융이 크게 위축되면서 가장 타격을 입고 있는 것은 중소 수출업체들이다. 금융당국의 최근 조사결과에 따르면 선적서류 등을 주고받은 뒤 수출채권을 은행에 매각해 현금화하는 오픈어카운드(OA) 방식의 수출 가운데 무보 보증을 활용하는 사례는 전체 금액의 3.9%에 불과하지만 회사별로는 40%에 육박한다. 신용도가 높은 대기업은 굳이 무보의 보증서가 없더라도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는 데 별 어려움이 없지만 중소 수출회사 2곳 가운데 1곳은 보증 없이 수출금융을 이용하는 건 사실상 가로막혀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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