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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 중심 인사시스템 흔들… 정치권 간섭 빌미 우려도
지난 9월 중순 신한금융그룹에 비보가 하나 날아들었다. 주요주주이자 사외이사를 지낸 한 인사가 '신한사태'를 다룬 회고록을 내기로 했다는 소식이었다. 신한금융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서둘러 연유를 캐봤다. 해당 인사는 알려지지 않았던 신한사태의 비화를 공개해 반면교사로 삼겠다고 했다. 나쁜 지배구조가 어떻게 조직문화를 피폐해지게 하는지를 알리겠다는 것이었다. 해당 인사는 사태 당시 중심에 섰던 3인방 중 한 명의 계열로 알려졌다.
회고록이 출판되면 '제2의 신한사태'가 다시 부상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신한금융은 읍소했다. 신한사태 재판이 아직 진행 중인 만큼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의견을 전달했다. 결국 없었던 일로 흐지부지됐지만 이 에피소드에는 현재 신한금융의 현주소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2010년 라응찬 전 신한금융 회장과 신상훈 전 사장, 그리고 이백순 전 신한은행장이 고소ㆍ고발을 주고 받으며 결국 동반 퇴진한 사건이다. 이것이 '신한사태'의 표피다.
그렇다면 사태는 진정으로 끝났을까. 금융계는 물론 신한금융 내부에서도 '아니라'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다. 신한사태의 악령이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어두운 그림자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다음달부터 시작되는 신한사태 2차 공판과 차기 회장 결정을 앞두고 3인방을 추종하는 세력 간의 힘겨루기가 본격화하면서 한동우 회장 체제 출범 이후 간신히 찾아가던 내부안정이 균열되고 있는 모습이 역력하다.
특히 이미 현역에서 물러난 신한금융 전직 고위인사(OB)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이들은 한 회장의 연임을 막기 위해 노골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상황이 이렇자 직원들의 동요도 한층 심해지고 있다. 신한금융 전체에 위기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표면적인 진원지는 국정감사를 통해 제기된 신한은행의 정치인 계좌 불법조회 논란이다. 일종의 신한사태가 남긴 '악령의 최신 버전'인 셈이다.
김기식 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신한은행 본사 경영검사부는 2010년 4월부터 9월까지 매월 정관계 주요 인사를 포함한 약 20만건의 고객정보를 조회했다. 신한은행은 일단 내부기준에 따라 적법하게 행한 절차라고 해명했지만 금융감독원이 특별검사에 들어간 이상 '뭔가'가 나올 것이라고 금융계는 분석하고 있다. 문제가 된 정치인들의 경우 '동명이인'이라고 하지만 석연치 않은 부분이 적지 않다는 얘기다.
문제는 이번 일을 계기로 조직문화에 커다란 생채기가 생기고 있다는 점이다. 벌써부터 조직 내에 확인되지 않은 루머가 나돌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김 의원이 불법조회 사실을 폭로하자 신한금융 내부에서는 "올 것이 왔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정보 제보자가 어느 쪽인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는 것이다. 금융계 핵심관계자는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은 과거에 이미 다 나왔던 내용이고 신한은 그로 인해 페널티도 받았다"며 "다른 점이라면 정치인 계좌를 감찰했다는 것인데 사실 여부를 떠나 논란만으로도 득을 볼 쪽에서 얘기를 흘리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신한사태로 벌어진 세력갈등의 어두운 유령이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일각에서는 이번 일을 계기로 수면 아래에 잠복해 있던 신한금융의 줄서기 문화가 다시 부상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나온다. 신한사태의 본질 중 하나였던 1인자와 2인자 간 알력다툼이 다시 재발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불법조회 논란은 신한사태가 낳은 사생아, 더 나아가서는 기형아인 셈이다.
한 대형 금융지주 고위관계자는 "신한금융의 문화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일사불란한 군대식 문화"라며 "라 전 회장과 신 전 사장 모두 지금의 신한금융을 만든 장본인으로서 그들을 추종하는 각기 다른 세력들이 금융그룹 내부에 남아 있다"고 말했다.
동시에 신한사태라는 상처가 도지면서 정치권과 당국 등 외부의 간섭이 들어올 빌미가 될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잘 알려져 있듯 신한금융은 금융지주사 중 유일하게 '그들만의 리그'가 열리는 곳이다. 안정된 지배구조와 후계자 양성 프로그램으로 그룹 회장은 그룹 내부에서만 배출됐다.
그러나 최근 들어 KB금융그룹 회장이나 우리금융그룹 회장에 도전했다 떨어진 사람들 가운데 신한금융을 노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나온다.
신한금융의 한 관계자는 "이번 일로 이득을 볼 쪽이 라 전 회장인지, 신 전 사장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직을 갈등 속으로 몰아넣는 것만큼은 분명하다"며 "신한금융이라는 조직을 권력쟁탈의 도구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고 전했다.
한동우 회장도 고민에 휩싸이게 됐다. 2011년 취임 후 첫 인사를 단행한 뒤 그룹 내에서는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신 전 사장의 오른팔과 추종 세력들이 모조리 척결됐다"는 말이 나왔고 그룹 내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다.
하지만 올 들어 단행된 인사에서는 불만의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한 회장 스스로가 비주류에 머물다 회장이 된 케이스지만 라 전 회장이나 신 전 사장 양측 모두에게 갚아야 할 정서적 채무가 상당 부분 줄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말이 나왔다.
신한금융의 한 관계자는 "5월 한 회장이 계열사 최고경영자(CEO) 인사를 단행했을 때 각각 라응찬ㆍ신상훈 계열인 위성호ㆍ이성락 부행장을 신한카드ㆍ신한생명 사장으로 발령내자 탕평인사라는 평가가 나왔는데 내부에서는 계파 안배가 아닌 실력 위주의 인사였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며 "비주류였던 서진원 당시 신한생명 사장이 행장으로 발탁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최근의 세력갈등은 한 회장의 이런 노력을 수포로 돌려놓을 수 있다고 그룹 내부 인사들은 지적한다.
남은 2개월은 신한금융의 운명을 가를 분수령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당장 오는 11월18일에는 신한사태 2차 공판이 예정돼 있다. 서울고등법원 형사3부는 서울대병원에 라 전 회장의 건강상태를 체크한 결과 심문이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고 증인으로 다시 채택했다.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는 라 전 회장이 증인소환에 응할지는 현재로서는 미지수지만 검찰은 법정이든 병원이든 장소를 가리지 않겠다는 입장이어서 어떻게든 증언은 확보될 가능성이 높다. 양측은 현재 라 전 회장의 증언에 대한 공개 여부를 놓고 대립하고 있다.
여기에 11월 말부터는 차기 회장 논의가 시작된다. 신한금융 CEO 승계 시스템상 회장 임기 3개월 전인 12월22일까지는 후임자를 결정해야 한다. 올해 마지막 이사회에서 회추위 구성 등의 논의가 나올 수 있다는 이야기가 도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마땅한 대항마가 없다는 점에서 한 회장의 연임이 유력하게 점쳐지지만 남은 변수를 감안할 때 속단하기는 어렵다. 특히 공판에서 신 전 사장이 무죄가 될 경우 신한금융의 차기 회장을 둘러싼 셈법은 더욱 복잡해진다.
금융계의 한 관계자는 "이번 논란이 어떻게 수습되느냐에 따라 한 회장의 거취도 달라질 것"이라며 "만약 신한금융마저 외부인사가 들어오게 되면 간신히 찾아가던 내부안정이 다시 소용돌이로 빠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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