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 경쟁, 무한 증식을 향해 돌진하는 폭주기관차 같은 자본의 속성에 자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인문 고전에서 경영의 지혜를 추출하려는 의도일까.
금융가에 인문학 바람이 거세다. 금융자본주의의 탐욕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전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가운데 '샤일록 자본주의'의 아지트라는 멍에를 쓴 금융권에 인간과 삶의 근원을 성찰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15일 금융계에 따르면 인문학과 관련한 사내 강좌나 강연을 마련해 직원들의 큰 호응을 얻고 있는 금융회사들이 늘어나고 있다. 일종의 자기혁신 프로그램으로 인문학 수업이 활용되고 있는 셈이다.
보험권의 인문학 배우기는 '열풍'이라는 단어가 맞을 정도다.
삼성생명의 경우 올해 사내 온라인강좌에 인문학 코너를 신설했다.
초한지, 사기(史記), 로마제국 쇠망사, 주역, 서양 미술사 등 강좌 수만 해도 무려 99개에 달한다. 본사 임직원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 카페도 운영되고 있다. 지난해에는 배철현 서울대 교수가 샤갈의 그림을 통한 사랑 등을 강의해 호평을 받았다.
삼성생명의 한 관계자는 "보험의 본질은 사람에 대한 사랑이므로 인문학을 이해하면 보험의 본질을 깊게 체험할 수 있다"며 "인문학 강좌를 들으며 이런 소명의식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어 유익하다"고 말했다.
대한생명도 최근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총 54개의 인문학 강좌를 개설했다.
'사기' '홍길동전' '그리스로마신화' '간디 자서전' 등 문화ㆍ역사ㆍ철학 등 3개 인문학을 주제로 온ㆍ오프라인에서 강의를 들을 수 있다. 대한생명은 연내에 100개 이상의 인문학과정을 개설할 계획이며 하반기에는 인기 강좌 교수도 초빙할 예정이다.
대한생명의 한 관계자는 "수강신청 1시간 만에 대부분 과정의 인원이 초과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며 "수강인원의 80% 이상이 지점장 등 영업 관련 근무자였다"고 소개했다.
은행권의 인문학 배우기 열기도 이에 못지않다.
하나금융그룹은 지난 2002년부터 '하나금융그룹 드림소사이어티'라는 지식경영 프로그램을 운영해오고 있다. 최근 101회째 행사 때는 일본에서 '경영의 신'으로 추앙받는 이나모리 가즈오 교세라그룹 명예회장을 초청해 경영철학을 듣는 자리를 가졌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윤석철 한양대 석좌교수, 김영나 국립중앙박물관장 등 일반인들에게도 명망이 높은 강사를 초빙해 치열한 비즈니스세계에서 결핍되기 쉬운 인문교양의 정수를 임직원들에게 수혈시켜주고 있다.
KB국민은행은 금융권 최초로 웹사이트 내 'KB 레인보우 인문학'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 서비스는 경제ㆍ심리ㆍ미술ㆍ역사ㆍ음식문화 등 7가지의 인문학 주제에 대해 별도 페이지(www.kbrainbow.com)에서 웹진 형식의 콘텐츠를 제공하는 것으로 선정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매월 1회 고정적으로 칼럼을 등재한다. 사내 직원들은 물론 일반 고객들도 쉽게 접할 수 있는 만큼 인문학을 매개로 고객과의 접점을 확대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신한카드도 '한국미술에 말 걸다' '명화, 세상을 담다' '손자병법과 전략적 리더십' '사기(史記)의 인간경영' 등을 주제로 인문학 강좌를 열었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인문학을 통해 고객과 폭넓은 소통의 장을 마련할 수 있어 의미가 있다"며 "금융 분야에 국한됐던 서비스를 보다 넓혀 고객과 함께 나눌 수 있는 화제가 더욱 풍성해지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