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검색
팝업창 닫기
이메일보내기

[이산상봉] "이제 헤어지지 말자" 잡은손 못놓고

[이산상봉] "이제 헤어지지 말자" 잡은손 못놓고50년만의 만남 현장 표정 ■ 서울 『오마니….』 『순환아, 니가 참말 순환이 맞나….』 한국종합전시장(COEX) 3층 컨벤션센터는 오후4시40분 울음바다로 변했다. 꿈에도 그리던 가족들을 만난 이산가족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오열하며 이산의 회한을 달랬다. 그리운 어머니·아버지, 그리고 1·4후퇴 때 잃어버린 어린 딸, 전쟁통에 의용군으로 간 아들, 피난길에 처자식을 친척집에 남겨두고 잠시 다녀온다며 떠났던 남편, 그들이 반백년간의 생이별을 뒤로 하고 재회한 것이다. 곱던 어머니는 어느새 등이 활처럼 휘었고 코흘리개 소년은 반백의 중노인이 돼 다시 만났다. 그럼에도 이들은 50년간의 간극을 훌쩍 뛰어넘어 한눈에 서로의 가족을 알아보고 얼굴을 쓰다듬어주며 한을 달랬다. 코 앞에 앉아 있는 가족이 혹시 사라질까, 정말 눈 앞에 있는 사람이 내 아들 맞나를 거듭 확인하는 이들은 반백년의 세월이 그려놓는 서로의 주름살을 어루만지며 말문을 잇지 못했다. "인원제한 넷째 못왔다"에 "죽기전 볼수 있나" 한탄 서울방문 2명 노모 앓아누워 못만나고 발만동동 상봉시간 끝나자 "50년 기다렸는데…" 애타는 목소리 이날을 기다리며 곱게 준비했던 선물이 바닥에 떨어져버린 것도, 곱게 맨 옷고름이 풀리는 것도 이들에게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토록 기다렸던 어머니와 아들·형제가 눈 앞에 앉아 있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들의 입에서는 서로의 얼굴을 직접 만져볼 수 있다는 환희와 지난 세월의 고통이 뒤섞인 비명이 터져나왔다. TV를 통해 생생하게 이 장면을 지켜보던 시청자들도 너나 할 것없이 눈물을 흘리며 지난 50년 이산의 아픔을 절감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이들은 가족들이 빈 자리를 채우기도 전에 부둥켜안고 바닥에 쓰러졌다. 위암으로 전 국민을 안타깝게 했던 이덕만(87) 할머니는 맏아들 안순환(67)씨의 모습을 보는 순간 비틀거리며 휠체어에서 일어서 눈물을 쏟았다. 줄곧 묵주를 돌리며 흥분을 가라앉히던 박보배(90) 할머니는 아들 강영원(66)씨를 품에 안은 채 『그동안 에미없이 어찌 살았으까』하며 통곡했고 강씨는 어머니 품안에서 헤어질 때의 16세 소년으로 돌아간 듯 흐느껴 울었다. 17세 때 의용군으로 끌려간 뒤 소식이 끊어졌던 서시석(67)씨도 어머니 김금례(87)씨 앞에서 오열했다. 어머니 김씨는 벅찬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잠시 정신을 잃는 듯 했으나 곧 떨리는 손으로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이제 다시는 헤어질 수 없다』고 되뇌였다. 8남매 중 맏이로 혼자 떨어져 북에 살았던 권중국(70)씨는 『인원제한으로 넷째 차희(66)와 여섯째 춘례(59)가 올 수 없었다』는 동생들의 말에 『죽기 전에 볼 수 있겠냐』며 바닥을 치기도 했다. 북측의 조주경(69)씨는 노모인 신재순(여·89)씨를 보자마자 힘껏 껴안고는 『오마니』를 연발했다. 재순씨는 아들 주경씨의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눈물만 쏟았다. 반백의 약간 벗겨진 머리에 갈색 테의 두꺼운 안경을 쓰고 나온 주경씨는 왼쪽 팔이 없는 상태로 의수를 착용하고 나왔다. 이를 본 노모 재순씨를 비롯, 친지들은 목이 메여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통탄했다. 재순씨가 『어떻게 이렇게…』라며 울먹이자 주경씨는 『6·25 때 연천 전투에서 (팔을)잃었다』고 대답했다. 곧이어 주경씨는 함께 나온 주호(71·사촌)·주찬(67·사촌)씨 등과도 『잘 지내냐』며 인사말을 건네며 서로의 안부를 묻기도 했다. 오후6시30분 어느새 첫 상봉시간이 끝나고 있었다. 『그동안 기다린 세월이 얼만데 조금만 더 같이 있을 수 없냐』는 가족들의 애타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그제서야 준비한 선물을 꺼내놓고 다음날 웃는 얼굴로 다시 보자 말하면서도 차마 잡은 손을 놓지 못해 이산가족들은 또 울었다. 한편 이날 정부는 의자 8개씩을 갖춘 100개의 테이블을 준비, 테이블마다 적십자 요원 2명씩이 배석한 채 남측 가족 5명과 북측 가족 1명씩 상봉하도록 준비했다. 이에 따라 미처 컨벤션센터에 입장하지 못한 수백명의 남측 가족들은 상봉장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려야 했다. /오철수기자 CSOH@SED.CO.KR 한영일기자 HANUL@SED.CO.KR 김홍길기자 91ANYCALL@SED.CO.KR 김정곤기자 MCKIDS@SED.CO.KR ■ 평양 평양을 방문한 남측 방문단의 경우 오후5시 숙소인 고려호텔에서 2층과 3층으로 나눠 북측에 두고온 가족·친지들과 감격적으로 상봉했다. 북측에서도 역시 북측 가족들이 먼저 장 내에서 남측 이산가족들을 기다렸으며 장충식(張忠植) 남측 단장을 선두로 가족들이 입장하자 장 내가 숙연해지며 벌써 곳곳에서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생존해 있는 줄 알았던 어머니가 사망했다는 비보를 방북 직전 통보받은 장이윤(72)씨는 큰 조카 종관(65)씨를 부둥켜안으며 『어머니가 살아계신다고 할 때가 언젠데 이제와서 돌아가셨다고 하니 어느 말을 믿어야 하느냐』며 『내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고 되뇌었다. 그는 두 조카에게 『어머님이 살아 생전 나를 찾지 않으셨니. 어떻게 돌아가셨니』라고 물으며 참았던 울음을 참지 못하고 끝내 터뜨리고 말았다. 휠체어 없이는 한발짝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통증이 심한 김금자(70)씨는 큰 오빠를 만나자 『아버지』라고 부르며 『오빠! 왜 그렇게 늙었어요. 전 아버지가 나오신 줄 알았어요』라며 오열했다. 김씨는 오빠에게 『전에는 다리가 조금씩 저린 정도였는데 방북사실을 통보받은 후 통증이 허리까지 올라왔다』며 『그래도 오빠를 만나니 금세 병이 나은 것 같다』고 어리광을 부리기도 했다. 서순화(82) 할머니는 50년 전 헤어진 아들을 만나자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다. 『오마니』라는 아들의 말에 서할머니는 『미안하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1·4후퇴 때 막내인 너를 남겨놓고 잠시 후 다시 만나려 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특별취재반 입력시간 2000/08/15 19:26 ◀ 이전화면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

서울경제를 팔로우하세요!

서울경제신문

텔레그램 뉴스채널

서울경제 1q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