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한국은행이 없다.’ 일련의 금융위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한은이 선제적 조치에 나서지 못해 중앙은행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서는 유동성 대책의 총 사령탑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중앙은행의 역할 중 핵심인데 기획재정부와 금융위원회가 등을 떠밀어야 겨우 나서면서 항상 한박자 늦게 대책을 내놓고 있다는 비판이다. 한은의 이 같은 ‘뒷북 치기’식 대응에 일각에서는 한은이 독립성을 찾지 못해 붙여졌던 ‘남대문 출장소’라는 비판 대신 위급한 시장상황을 지나치게 관조하듯 바라보는 모습을 빗대 ‘남대문 사(寺)’라는 말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정부는 리먼브러더스 파산 이후 직간접적으로 여러 루트를 통해 한은이 유동성 공급에 적극 나서도록 요청했다. 총액대출한도 확대부터 외환보유고를 통한 달러 공급 등 한은에 선제적 조치를 건의한 것이 수차례다. 하지만 이성태 한은 총재는 시종일관 신중 모드를 견지했다. 최근 청와대에서 열린 서별관 회의. 이 총재는 관계 부처 장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회의 도중 버럭 화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사고는 누가 치고 왜 우리가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은행들이 자산관리를 못해 일을 벌렸고 정부가 감독을 제대로 못해 이 꼴을 만들었는데 이제 한은이 나서서 뒷감당을 해야 하느냐는 지적이었다. 하지만 위급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머리를 맞댄 자리에서 이 같은 발언이 적절한 처신이냐는 점에 대해서는 논란이 없지 않다. 한편으로 이 총재의 이 같은 발언은 최근의 위기상황에 대한 한은의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한은은 결국 지난 17일 대통령 주재로 열린 청와대 서별관 회의에서 청와대와 정부의 강력한 요구에 못 이겨 억지춘향식으로 유동성 공급에 나섰지만 한발 늦은 정책 탓에 시장에 대한 효과는 반감되고 말았다. 정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한은이 좀더 빨리 유동성 대책을 내놓았으면 시장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며 “시장 심리가 패닉 상태에 빠진 뒤에야 뒤늦게 대책이 나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은은 23일 열린 금융통화위원회에서도 정부와 시장이 그토록 원하던 은행채 매입 결정을 뒤로 미뤘다. 금리정책도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지속되는 가운데 한은은 8월 금리를 인상하고 10월 금리를 내렸다. 8월의 인상에 대해 시장에서는 ‘인하를 위한 인상’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결과적으로 금리인상은 전혀 약효를 발휘하지 못한 채 주택담보대출 금리만을 끌어올리는 요인이 됐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한은의 선제적 조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1997년 외환위기 때 상황은 급박한데 정작 우리 중앙은행은 독립성에 매몰돼 있었다”며 “다른 중앙은행을 보면 ‘금융전쟁’의 최전선에 그들이 있다”고 말했다. 시중은행의 한 고위임원도 “기업들이 죽어가고 있다”면서 “(유동성 공급을) 중앙은행에서 앞장서야 하는데 한은이 뭐하는 곳인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또 다른 은행 임원은 “연초 강만수 재정부 장관과 알력이 있을 때는 ‘약자’인 한은 편을 들었지만 솔직히 지금은 이 총재의 모습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물론 한국은행으로서 고충도 있다. 한은의 한 관계자는 “나라 곳간지기로 국가재산을 함부로 쓸 수 있느냐. (한은 입장에서는) 사안마다 매우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며 “최근 내놓은 원화ㆍ외화 유동성 공급 대책도 수많은 고민과 검토를 통해 나오게 됐다”고 설명했다. 한은이 섣불리 나설 경우 최후의 방패막이마저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민간경제연구소의 한 고위관계자는 “한은의 고충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외환보유고의 최후 보루로서 역할도 있고 중앙은행으로서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것은 맞다”면서도 “문제는 평상시 대책과 위기상황에서의 대책이 다르고 그에 맞춰 대응태도도 달라져야 한다는 점”이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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