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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화폭속에 전통무예 숨결이…

■ 옛 그림에서 만난 우리 무예 풍속 (허인욱 지음, 푸른역사 펴냄)

신윤복이 그린 쌍검대무에서 두 무희는 화려한 검무 솜씨를 자랑한다. 삼국시대부터 인기를 끌었던 검무는 민초들 사이에서 무예가 깊은 사랑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우리 역사에서 무(武)는 문(文)에 비해 항상 뒷전이었다 심지어 무예가 존중 받아야 할 임진왜란 중에도 양반들 사이에 무를 경시하는 세태는 여전했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계기로 무예에 대한 생각은 많이 바뀌었다. 1595년 선조는 지방 서원 가운데 긴급하지 않은 것들은 혁파하고 대신 각 도에 중앙 훈련원과 같은 무학(武學)을 세워 병사를 길러내고 군사훈련을 시키게 했다. 무예에 대한 관심은 숙종도 선조 못지 않다. 왜검(倭劍)을 배워오도록 동래 왜관에 무인을 파견하기도 하고 중국에 까지 무인을 보내 무예를 배워오게 하려 한적도 있었다. 허인욱 삼척대 강사가 쓴 ‘옛 그림에서 만난 우리 무예 풍속사’는 옛 그림을 통해 우리 조상들의 무예 풍속을 들춰내고 있다. 역사서에서 무예는 늘 찬밥 신세였지만 풍속도에서 만큼은 사정이 달랐다. 삼국시대 고분벽화에서 무예는 단골 메뉴였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칼을 들고 신장(神將)이나 천장을 받치고 있는 역사(力士)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말 달리며 활로 사냥하는 기사 장면, 씨름 하는 장면 등 다양한 무예 그림도 등장한다. 삼국시대 이래로 권세 가문에서는 무보다 문이 대우를 받은 게 사실이지만 민초들 사이에선 무가 훨씬 더 사랑 받았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고구려 태조왕 대에 와서 매년 3월과 10월에 신두수 대제에 모든 군중이 모여 칼춤, 활쏘기, 깨금질, 덕견(태껸), 물싸움을 한다고 하고 송도의 수박(手拍)이 중국으로 건너가 권법이 되었으며 일본에 건너가 유도가 되었다”고 썼다. 일제 강점기 민족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해 다소 과장되긴 했겠지만 삼국시대 무예의 인기를 짐작할 만하다. 개천이나 강을 경계 삼아 두편의 마을 사람들이 돌멩이를 마주 던지면 싸우다가 백병전을 벌이는 편싸움으로 번지는 석전은 조선시대에 공인된 전쟁놀이였다.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맨손무예’를 뜻하는 수박은 문헌상으로는 고려 의종 때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역사가 깊다. 수박은 지금 우리에겐 씨름이나 태껸에 비해 낯설지만 고려시대나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무인으로 출세하려면 반드시 갖춰야 할 기예였다고 한다. 오랜 세월 골방 병풍 속 그림이나 화첩에서 먼지에 가려졌던 활쏘기, 검무, 석전, 격검, 마상재, 수박. 저자는 우리 기억 속에서 가물가물 잊혀질 뻔한 전통 무예를 화려하게 부활시키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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