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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 서거] 파격·반전… 비극으로 막내린 정치 풍운아

원칙·소신으로 최고권좌 올랐지만 '깨끗한 정치'가 오히려 족쇄로

SetSectionName(); [盧 서거] 파격·반전… 비극으로 막내린 정치 풍운아 원칙·소신으로 최고권좌 올랐지만 '깨끗한 정치'가 오히려 족쇄로 온종훈기자 jhohn@sed.co.kr 빈농의 아들로 출발해 노동인권변호사 등 비주류에서 대통령 당선의 극적인 기적 그리고 대통령 퇴임 1년 만에 검찰 출두와 자살… 23일 63세를 일기로 타계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삶은 대한민국 민주화와 한국 현대정치와 격변을 같이한 한편의 드라마 그 자체였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다는 그만의 '원칙'과 지역주의에 항거했다가 번번이 좌절한 '소신'을 무기로 최고 권좌에 올랐지만 퇴임 후 짧았던 삶은 불행했던 전직 대통령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이 초라하기만 했다. 정치개혁을 외치며 현실정치의 벽과 온몸으로 맞섰지만 역설적이게도 '깨끗한 정치'를 향한 부르짖음은 그의 명예를 나락으로 떨어트리고 참담한 마지막 길을 걷게 한 족쇄가 됐다. 인권 변호사로 부산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 대통령에 당선돼 재임할 때까지 그는 늘 한국정치의 이단아였다. 호남에 지역기반을 둔 민주당의 영남 출신 대선후보로 당선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극적인 반전을 이끌어냈으며 대통령 당선이후 불과 1년여만에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을 받았다. 이후에도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는 극적인 승부수로 또 다른 기적을 만들었으나 이후 지지율 급락해 집권 마지막은 레임덕을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대통령 집권 막판에는 야당에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연정을 제시할 정도로 그의 정치 이력은 파격과 반전에 반전을 거듭했다. 노 전 대통령은 1946년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학업에 두각을 나타낼 정도로 비상한 두뇌를 지녔지만 가난 때문에 대학 진학의 꿈을 일찌감치 접고 부산상고에 진학했다. 하지만 가난에서 벗어나 세상에 큰 뜻을 펼치고픈 야망은 고교 졸업 후 평범한 청년이었던 그를 법조인의 길로 이끌었다. 수 차례의 고배를 마신 끝에 나이 서른에 사법고시에 합격, 판사의 길을 걷다 “적성에 맞지 않아” 7개월 만에 그만두고 변호사로 전직했다. 잠시 안락한 삶을 살던 그가 인권 변호사의 가시밭길로 접어든 것은 81년 시국사건인 ‘부림사건’ 변론이 계기가 됐다. 이후 소외받는 노동자와 학생들의 편에 서서 군사정권에 저항했던 노 전 대통령은 87년 9월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씨사건을 통해 이름 석자를 세상에 알렸다. 당시 사인 규명에 나섰다가 3자 개입 혐의로 구속됐지만 돈키호테 같은 용기를 눈여겨본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 측의 권유로 88년 13대 총선에 출마, 5공 실세였던 허삼수 후보를 꺾고 제도권 정치에 입문했다. 초선의원에 지나지 않았던 그가 신데렐라처럼 부상, 한국정치의 새 희망으로 떠오르게 한 무대는 88년 5공 청문회였다. 그의 정치이력중 가장 화려한 부분으로 그 이후에도 ‘청문회 스타’라는 별칭이 계속해 따라 붙을 정도였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등 힘있는 증인들을 정연한 논리와 송곳 질문으로 몰아세워 TV를 시청하던 국민을 열광시키면서 `청문회 스타'가 됐다. 그러나 이후 정치인으로서의 삶은 순탄치 못했다. 90년 1월 3당 합당 때는 정치적 스승인 김영삼 총재의 손을 뿌리치고 합류를 거부한 뒤 지역주의의 벽에 막혀 낙선을 거듭하는 등 비주류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동시에 영남 출신임에도 김대중 전 대통령과 뜻을 함께한 그의 '소신'은 대통령의 길로 이끈 최대의 정치적 자산이 됐다. 98년 보선에서 '김대중 깃발' 아래 종로에 도전, 금배지를 달았지만 2000년 총선에서 지역주의 극복을 내세워 고향 부산에 내려갔다가 한나라당 허태열 후보에게 고배를 들었다. 이 같은 그의 정치적 무모함은 '바보 노무현'이란 이름으로 인터넷을 타고 대중, 특히 영ㆍ호남 지역주의에 지친 표심을 파고들면서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바람과 2002년 대선을 휘감은 ‘노풍’을 일으킨 기폭제가 됐다. 노풍의 진원은 호남이었다. 민주당 대선후보 광주 경선에서 1위를 차지하는 이변을 일으켰고, 이는 ‘이인제 대세론’을 일거에 함몰시키면서 전라도의 압도적 지지를 받는 경상도 출신 후보로 나서는 발판으로 작용했다. 특히 16대 대선전날 새벽 국민통합 21 정몽준 대표가 후보단일화를 철회했지만 마지막 순간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그는 정면돌파를 택했고, 정치 인생 내내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던 그 특유의 승부사적 기질로 비주류로서 첫 청와대 입성이라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정치인 노무현'의 승부사적 면모는 대통령 재임 중에도 옛 정치의 반동에 맞서며 그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2004년 3월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한 야권이 여소야대 구도에서 열린우리당 지지발언 등 선거법 위반 혐의를 걸어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발의했지만, 되레 메가톤급 역풍을 불렀고, 결국 제3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의 의회독주에 제동을 걸며 과반을 차지하는 또 다른 기적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정치, 경제, 대북관계 등 거의 우리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노 전 대통령의 무모하게 보이는 정치 실험은 그칠 줄 몰랐고, 하루가 멀다하고 계속되는 청와대발 충격 발언은 민심이반과 열린우리당의 지지율 급전직하로 이어지면서 오히려 국정 난맥상을 야기한 자충수가 됐다. 거듭된 재보선 전패로 의회 과반을 잃고 뿌리채 흔들리던 열린우리당은 결국 2006년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에 참패했다. 사실상 국정운영의 동력을 상실, 조기 레임덕에 빠지자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하는 승부수를 던졌지만 박근혜 전 대표의 '원칙'에 의해 일언지하에 외면당했다. 급진적 개혁정책으로 사회 전반에 피로감이 누적되는 와중에 아파트값 급등과 북한 핵실험 사태 등이 맞물리면서 여당 내부에서 탈당을 요구하고 나서는 등 '정치적 동지'들마저 돌렸다. 노 전 대통령은 정국 타개책으로 4년 연임제 개헌이라는 마지막 카드를 들고 나왔지만 역시 한나라당의 거부로 뜻을 접어야 했다. 대신 남북관계에 주력해 대선이 막판이던 2007년 10월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이끌어내 퇴임막판까지 한나라당과 이명박 후보를 긴장시키게 됐다. 노 대통령 권좌에 있는 동안에도 바람 잘 날 없었지만 퇴임 후 불거진 박연차 뇌물게이트는 노 전 대통령의 자신의 정체성과 다름없었던 도덕성을 바닥에 떨어트리며 지지계층의 외면 등으로 그를 ‘사지’로 몰고 갔다. 퇴임 전 입버릇처럼 "농촌으로 돌아가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삶을 살겠다"고 약속했던 그였지만 퇴임이후에도 현실정치에 ‘훈수’를 두는 등 적극적인 정치재개의사를 보였다. 그러나 퇴임 1년만에 검찰 조사로 친형인 건평씨와 부인 권양숙여사, 자녀들까지 수뢰 혐의로 검찰에 줄줄이 불려가는 상황에서 극단적인 방법으로 ‘정치인 노무현’에 대한 평가의 숙제를 안겨두고 돌아오지 않는 길을 갔다. 밤새 조문 줄이어…노건평씨 빈소 찾아노무현 전 대통령의 분향소가 차려진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회관 입구에는 밤새 조문객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형 건평(67)씨도 24일 분향소를 찾았다. 노건평씨는 이날 오전 8시40분쯤 노 전 대통령의 장남 건호씨와 함께 빈소가 마련된 마을회관 주위를 한 바퀴 돈 뒤 마을회관 안으로 들어갔다. / 김해= 한국아이닷컴 고광홍기자 kkh@hankooki.com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혼자 웃는 김대리~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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