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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탄생 100년] 2부. 성장 이끌고 신화로 남은 캔두이즘 <2> 마술 같은 조선산업 도약

70년대 고속성장 이끈 '현대의 마술'

1963년 1,600톤급 화물선 첫 진수 이후 1974년 25만톤급 유조선 2척 동시건조

鄭의 추진력·정부 지원 결합… 조선 불모지서 단숨에 정상으로

울산 현대중공업 전경과 최신 플랜트 건조 현장

1974년 6월28일 현대중공업 조선소 준공식 겸 1, 2호선 명명식. 2년 전 항공촬영 사진에서 보듯이 갯벌뿐인 울산 미포만(작은 사진)은 인간의 땀과 의지로 세계 최고의 조선소로 거듭났다. 초대형 유조선 건조와 조선소 건립을 동시에 진행하는 사상 초유의 성과는 국민들에게 자부심은 물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1970년대 고속성장을 이끄는 정신적 동력으로 작용했다. /사진제공=현대중공업

기술·자금 백지상태서 시작… 세계 각국 돌아다니며 수주

1976년 세계 2위 조선소로 중화학 육성정책에도 일조


 '한국 최대 선박 화물선 신양호 진수.' 서울경제신문 1963년 7월24일자 1면에 실린 기사의 요지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진수식에 참석한 신양호는 1,600톤급 화물선. 지금으로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당시에는 국가 최고지도자가 직접 참석할 만큼 나라의 경사였다. 1973년 6월2일, 박정희 대통령의 영애인 박근혜양이 부산 대한조선공사에서 2만톤급 유조선 코리어갤럭시호 진수식 테이프를 끊었다. 10년 동안 최대선 건조 능력이 12.5배 커진 셈이다. 바로 1년 뒤인 1974년 6월27일 울산 현대조선소. 25만9,000톤급 유조선 두 척의 완공식이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다. 한국이 세계가 주목하는 유수의 조선국가로 부각된 순간이다. 2만톤급을 국영 조선사에서 겨우 건조하던 한국은 26만톤에 이르는 초대형 유조선을 두 척이나 동시에 건조한 후부터 조선 강국을 향해 쾌속 순항, 세계 정상의 조선국으로 자리매김했다. 당시 서울경제신문은 관련 기사에 이런 제목을 붙였다. '現代의 魔術(현대의 마술)'.

1974년 6월28일자 서울경제신문 1면 기사를 좀 더 따라가보자. '(초대형 유조선은) 요술도 마술도 아니다. 피와 땀, 勞力(노력)과 刻苦(각고)의 結晶(결정)이다.'

완공식을 마친 뒤 피로연에서 박정희 대통령도 비슷한 말을 남겼다. "처음에는 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만든 배가 물에 뜨겠냐고 물었다던데 지금 도크에 접안한 26만톤급 제 1, 2호 유조선이 물에 떠 있는 것이냐 아니면 나무로 받쳐놓은 것이냐"는 대통령 발언에 참석자 모두가 '해냈다'는 기쁨을 누렸다. '사상 최대 규모인 2만톤급 유조선'으로 감격에 젖은 지 불과 1년 만에 그 13배에 달하는 26만톤급 유조선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은 국민들의 감동과 자부심을 자아냈다. 초중고교 각 학급 교실의 뒷면 환경미화 게시판에는 '우리나라가 만든 26만톤급 유조선' 사진이 오랫동안 단골 메뉴로 붙어 국력 신장의 상징으로 꼽혔다.

현대조선의 질주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연달아 비슷한 규모에 대형 유조선 수주에 성공하며 정부의 시책목표 달성도 앞당겼다. 박근혜 대통령이 영애 자격으로 참석했던 2만톤급 유조선 진수식에서 이낙선 당시 상공부 장관은 '75년도에는 10억달러, 80년도에는 20억달러를 수출해 세계 10대 조선강국으로 올라서자'는 비전을 제시했는데 현대조선의 눈부신 실적으로 정부의 청사진은 현실이 됐다. 잇따라 대형 유조선을 수주한 현대조선은 1976년을 기점으로 세계 2위 조선소로 올라섰다.



조선산업의 불모지에서 거둔 마술이나 신화 같은 조선산업의 도약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우선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 의지가 강했고 일관성이 있었다. 오원철 당시 청와대 경제 제2수석비서관이 저서 '한국형 경제건설'에서 남긴 회고. "조선업에 뛰어들려는 업체가 아무 데도 없었다. 국내 최고 재벌그룹은 단호한 거부 의사를 밝힌 상태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지목한 정주영 현대건설 회장마저 난색을 표했다." 결국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조선업 진출을 결정한 아산은 숱한 시련에 맞닥뜨렸다. 기술과 인력·자금 모든 것이 백지 상태에서 세계를 돌아다니며 메이저 금융기관과 선주를 설득해 조선소 건설자금과 수주물량은 물론 직원교육과 연수까지 따냈다.

조선산업에 뛰어든 후 아산은 더욱더 일에 매달렸다. 일주일에 절반은 울산 미포만 조선소 건설현장을 찾아 현장을 진두지휘하던 당시 크고 작은 사고도 치렀다. 현장에서 잠들어 새벽에 깬 뒤 직접 차를 몰고 현장을 돌던 중 차가 미포만 바다로 떨어지는 사고를 만나 목숨을 잃을 뻔했으나 마침 순찰 중이던 직원이 그의 목숨을 구했다. 현장의 소요도 없지 않았다. 임금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국회로 비화한 적도 있으나 노사화합과 '잘살 때까지는 참자'는 시대정신으로 문제를 극복해나갔다.

아산이 조선산업에서 거둔 성공은 한국의 산업 전반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용 철강 수요 증가는 제2제철소 건립을 낳고 기업인들의 중화학공업에 대한 자신감도 키웠다. 한국의 주력 수출품목이자 효자산업인 조선과 자동차·철강의 밑뿌리가 이때 형성된 것이다.

현대조선에는 운도 따랐다. 제4차 중동전(1973년) 직후 불어닥친 고유가와 불황에도 원유를 확보하려는 각국의 경쟁 속에 유조선만큼은 주문이 이어졌다. 현대의 성공에 자극받아 국내의 다른 기업들도 뒤늦게 조선산업에 뛰어들었고 결국 한국 조선산업은 세계 1위로 우뚝 섰다. 이 덕분에 국내 기업들은 물론 한국 경제도 1974년과 1979년에 불어닥친 두 차례의 석유파동을 극복하는 힘을 얻었다.

아산 역시 고령교 사업 실패 이후 사업을 확장하면서도 빚에 시달렸으나 잇따른 신사업 성공과 정부의 8·3사채동결 조치(1972년) 덕분에 묵은 빚을 완전히 청산하고 세계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세계 최대 토목공사인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건설 공사를 수주한 바탕에도 조선소를 통해 플랜트를 제작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작용했다. 유조선 완공 1년 뒤인 1975년 6월 말 미국 뉴스위크지는 현대그룹을 특집 보도하며 이런 기사를 실었다. '현대그룹의 창시자인 정주영 회장은 한국의 경제적 기적을 현실화한 정력과 결의에 찬 새로운 유형의 기업가를 상징한다'. /권홍우 선임기자 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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