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말 채권단으로부터의 구제금융이 끊긴 후 전면적 디폴트(채무불이행) 상황으로 치닫던 그리스 정부가 회심의 역전카드를 던졌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가 채권단에서 요구해온 것보다 더 강력한 수준의 경제개혁 카드를 꺼내 든 것이다. 구제금융과 채무탕감을 받기 위한 빅딜카드로 해석되면서 그리스의 운명을 가를 이번주 말 유럽연합(EU) 정상회의를 앞두고 채권단이 적지 않은 압박을 받게 됐다.
그리스 정부는 9일(현지시간) 3차 구제금융을 받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증세, 재정지출 및 연금삭감, 노동시장, 민영화 개혁 등을 이행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13쪽 분량의 고강도 경제개혁안을 내각회의에서 의결한 뒤 채권단에 제출했다.
개혁안에 담긴 재정지출 규모는 2년간 최대 120억~130억유로(약 15조1,000억~16조2,000억원)로 전해졌다. 이는 같은 기간 중 최대 79억유로를 삭감하라고 요구했던 국제채권단의 기존 개혁안보다 한층 더 높은 수준의 긴축안이다.
증세 내용 역시 진일보했다. 특히 부가가치세를 확충하라던 채권단의 요구가 거의 전면적으로 수용됐다. 부가세율 인상은 서민증세라고 거부하며 법인세율 인상 등만을 고집해온 치프라스 정부가 한발 물러선 것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현재 3단계(6.5%, 13%, 23%)로 나뉜 부가가치세율이 음식점 업종에 대해서는 23%의 최고세율로 단일화된다. 섬 지역에 대한 부가가치세 감면 혜택도 일부 벽지 도서지역을 제외하면 오는 2016년 말까지 전면 폐지된다.
이 밖에 법인세율을 현행 26%에서 향후 28%로 올리고 TV광고에 대한 세금을 신설하며 사치세율 인상(10%→13%) 및 적용 대상 확대(길이 5m 이상 관광선 등) 등의 제도개선까지 추가됐다.
지금까지 치프라스 정부가 강력하게 거부해온 연금개혁 요구도 대폭 수용했다. 우선 소득상위 20%에 대한 연금지급이 내년 3월부터 끊기며 저소득층 고령자에 대한 추가 연금지급 제도 역시 2019년 말까지 사라진다. 아울러 연금지급 총액이 올해와 내년 각각 국내총생산(GDP) 대비 0.25~0.5%, 1%씩 줄어들게 된다.
이번 개혁안의 내용을 보면 표면적으로는 치프라스 정부의 백기투항처럼 보인다. 그러나 치프라스는 고개를 숙임으로써 더 큰 협상력을 얻게 됐다. 이제는 채권단이 양보할 차례라는 요구를 당당히 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그리스는 이번 개혁안의 반대급부로 채권단으로부터 3차 구제금융을 받을 방침이다. 요청금액은 535억유로며 만기는 3년이다.
이제 공은 돈줄을 쥔 채권단에 넘어갔다. EU 재무장관협의체인 유로그룹의 11일 회의가 첫 관문이다. 여기서 긍정적으로 협의가 이뤄지면 12일 열리는 EU 정상회의에서 채권단이 3차 구제금융 협상 개시를 결정할 수 있다. 협상 개시 선언이 나오면 유럽중앙은행(ECB)은 곧바로 그리스에 긴급유동성지원금(ELA)를 지원해 돈줄이 마른 현지 은행들의 파산을 막을 것으로 예상된다. 아울러 채권단이 구제금융과 별도의 브리지론(단기 유동성 대출)을 통해 이달 중순부터 줄줄이 돌아오는 그리스의 추가 만기채무 상환을 도울 것으로 보인다.
채무탕감에 대해서는 아직 온도 차가 있다. 치프라스 총리는 채무를 최대 30%까지 탕감(헤어컷)해달라고 요구하지만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등은 직접적인 채무탕감에 대해 난색을 보이고 있다. 다만 채권단 내에서는 직접적인 부채 원리금 삭감을 뜻하는 탕감 대신 이자 부담을 덜어주거나 만기 등 조건을 개선해 간접적으로 상환 부담을 줄여주는 채무경감(debt relief)에 대한 다소 전향적 분위기도 감지돼 절충의 여지는 있다. 실제로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은 "그리스 채무의 지속가능성은 헤어컷이 없다면 타당하지 않으며 IMF의 채무경감 검토는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다만 문제는 채권국과 채무국 의회다. 관계국 정부 간에 합의가 이뤄졌다고 해도 의회가 이를 승인하지 않는다면 사태는 다시 꼬일 수밖에 없다. 영국 텔레그래프 등은 그리스의 급진좌파성향 집권당인 시리자 내에서도 매우 강경한 좌파 진영이 연금삭감 등에 대해 반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고 전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