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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기기 등의 부속품을 취급하는 중소기업 A사는 몇 해 전 거액의 수출대금을 떼인 후 구제 받기는커녕 떼인 돈의 최고 세 배를 벌금으로 물 뻔했다. 외국환거래법의 구태의연한 규제 때문이다. 이 법은 국내 거주자가 비거주자를 상대로 보유한 50만달러 초과 채권을 1년6개월 이내에 반드시 회수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위반시 최대 세 배 액수의 벌금형이나 1년 이하 징역형에 처해진다. 무역업계의 한 관계자는 "수출대금을 떼인 것도 억울한데 현행법대로라면 피해 기업이 처벌 받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시대에 뒤처진 외환제도가 빚은 부조리의 한 장면이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면 외환정책의 로드맵을 다시 그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무역ㆍ금융계를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다. 특히 중소기업의 손톱 밑에 박힌 가시를 빼려면 불합리한 외화규제를 풀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는 연간 1조달러를 넘어선 무역거래를 하는 통상대국으로 성장했다. 반면 외환제도는 15년 전 제정된 외국환거래법의 틀에 갇혀 있다. 정부는 2002년 10년 플랜을 담은 '외환시장 중장기발전방향', 이른바 외환정책 로드맵을 발표했으나 2008년 10월 전면 시행 보류를 선언했다. 이 로드맵은 외환규제를 2011년까지 3단계에 걸쳐 선진화하는 것이었으나 2단계 초반까지만 실행된 채 5년간 감감무소식이다.
당시의 로드맵은 시장 자유화가 핵심이었다. 하지만 시대 상황에 맞게 시장 안정화와 실물거래 지원에 초점을 두고 로드맵을 다시 그려야 할 것으로 보인다. 무역업계는 단기적으로는 무역업계 지원을 위해 경상거래 규제완화와 지원 인프라 확충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수출역군이 억울하게 처벌 받는 일을 없애자는 차원이다.
외환의 경상거래 규제완화 차원에서는 ▦대외채권회수의무 규제 ▦제3자 지급 금지 규제 ▦상계처리 관련 규제 등이 특히 현안으로 꼽힌다.
이 중 제3자 지급 금지란 거래대금을 계약 당사자들끼리만 결제하도록 한 규정이다. 쉽게 말해 국내 업체가 해외 고객에게 상품을 수출했다면 해당 고객으로부터 직접 대금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상계처리란 거래 상대방인 A와 B가 서로에 대해 각각 채권과 채무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면 서로 일정 상당액의 채무를 없는 것으로 합의하고 남은 차액만 결제하는 것이다. 수출업계 관계자는 "일반적으로 제조업체라고 해도 거래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파는 것만 하는 게 아니라 되사오는 경우도 있다"며 "이런 경우 상계처리가 빈번하게 일어나는데 관련 외국환거래 규제가 너무 까다로워 애로가 많다"고 전했다.
외국환거래법을 실수로 위반할 경우 구제절차가 거의 없는 것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서울 논현동 에이원 관세사무소의 오석영 관세사는 "외국환거래 관련 규제는 내용 자체가 매우 복잡한데다 규정이 법으로 공포되기보다 (관계 당국의) 하위 규정으로 빈번하게 변경되고 고시되는 경우가 많아 수출입 기업이 이를 제대로 숙지하기가 쉽지 않고 그래서 실수로 위반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런 경우는 재산도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후신고 등의 구제절차가 매우 제한적이거나 거의 없다"고 분석했다. 앞서 예로 든 A사도 대외채권회수 의무를 폐지하기로 했다던 2008년 정부의 발표만 믿고 있다 뒤늦게 폐지되지 않은 것을 알고 겨우 기한 내 신고해 처벌을 면했던 사례다.
새 로드맵의 중장기 방안에 대해서는 금융계는 자본거래 규제를 점진적으로 풀어 원화의 국제화와 외환시장 안정 효과를 달성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박성욱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당장은 실물경제를 뒷받침하기 위해 경상거래 규제는 풀 여지가 있다"며 "중장기적으로는 원화를 호주달러처럼 국제화하기 위해 자본거래 규제를 풀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를 위해 원화 펀딩 규제를 더 완화하는 등 다양한 방안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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