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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영 기자의 1일1식(識)] <140> 권태에 대한 고찰


오랜 기간을 함께 한 커플, 예전만 못한 애정 정도를 놓고 ‘권태기’라는 표현을 씁니다. 권태(倦怠)의 사전적인 의미는 어떤 일이나 상태에 시들해져서 생기는 게으름이나 싫증을 뜻합니다. 따라서 오래된 연인의 권태기란 서로에게 시들해져서 생기는 게으름이나 싫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서로 알고 지낸 시간이 길다는 건 결국 그만큼 ‘새로움’을 발견할 가능성이 없다는 말이니 ‘익숙함’만이 가득한 습관성 관계로 정의할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익숙함이란 자연스러움 입니다.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시간이 알아서 만들어주는 것이니 말입니다. 습관이 다 그렇듯 습관성 관계 역시 특별한 노력이 요구되지 않습니다. 주말에 만나서 영화를 보고 함께 밥을 먹고 하는 일들이 몇 주 전부터 시간을 내서 약속을 잡지 않더라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처럼요. 당연한 일로 치부된다고 하니 약간은 서글픈 느낌이 들지만 어찌 됐든 가장 경제적인 관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연애 초기에 ‘이런 영화를 좋아할까?’ ‘내가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반응할까?’ 라는 답을 알 수 없는 고민들로 밤을 지새울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메뉴를 좋아하는지 성격은 어떤지 이미 알고 있으니 반응 역시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서 이뤄질 테니까요.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는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진실을 찾는, 즉 생각하게 되는 사람은 ‘애인의 거짓말에 고통받는 질투에 빠진 남자’라고 말했습니다. 물 흐르듯 흐르는 일, 특별한 생각을 필요로 하지 않는 습관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쯤에는 이렇게 할 것이다 라는 대전제가 틀어지는 예측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게 되면 어떨까요? 사람은 통제되지 않는 것에 대해 불안감을 가지기 마련입니다. 통제 불능은 위험으로 지각되기 때문이죠. 사실 아무리 오래된 연인이라 할지라도 상대방을 통제한다는 건 비현실적인 생각이지만 우리는 상대방을 잘 안다는 착각에 깊이 빠질수록 그를 통제 가능한 범위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엔 당황하고 맙니다. 상대를 다시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면서요.

가만 생각해보면 권태란 자연스러운, 조류에 몸을 맡기고 둥둥 떠가는 것만 같은 모양새를 취하고 있지만 게으르기 때문에 생기는 게으름인 것은 아닐까요. 몇몇 커플은 결혼 후에도 연애하는 기분으로 살기 위해 상대방의 사생활을 최대한 존중하려는 노력을 한다고 합니다. 아무리 가족이라 해도 말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알고 있더라도 모른척하고 넘어가는 정도의 센스를 발휘하기도 하고요. ‘가족끼리 왜 이래’라며 꼬치꼬치 캐묻거나 일일이 간섭하려는 행동은 백년해로를 약속한 부부에게는 너무 가혹한 일인 듯 싶습니다. 설령 사소한 것 하나까지 모두 다 알고 있다 한들 그 사람의 100%를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상대방의 정보를 100% 가진 것과 상대방을 100% 이해하는 건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본인도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싶은 순간이 종종 찾아오니 내가 저 사람을 완전히 알고 있다는 전제는 애초에 성립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권태는 익숙해졌지만 더 열심히 서로를 탐구하지 않은 게으름이라 보는 게 더 정확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권태에 빠진 모든 연인들께 오늘만큼은 색다른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려 노력하시라 제안하겠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곁을 지킬 만큼 소중한 사람이라면 그의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려 노력하는 것 역시 일상의 행복일 테니까요. 마치 보물을 찾는 마음으로 그렇게, 꽁꽁 숨겨놓은 나만의 보물을 또 하나 찾는 그런 하루가 되기를 바라면서.

/iluvny23@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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