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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앞 연세빌딩 뒷골목 쪽방촌에 살고 있는 홍모(55)씨. 대우건설 작업반장 출신으로 남부럽지 않았던 그는 8년 전 사업 실패로 가족과 헤어진 뒤 우여곡절 끝에 1년 전 쪽방촌으로 오게 됐다. 지금은 한쪽 폐를 제거해야 할 정도로 건강도 좋지 않다. 홍씨는 "이혼한 아내에게 안겨준 빚을 조금이라도 갚아야 한다"며 재기를 꿈꾸고 있다. 하지만 매월 기초생활수급비로 받는 43만원에서 쪽방 월세 22만원을 내고 나면 한 달 버티기도 힘겹다. 그나마 내년부터 받을 수 있는 연금(대우건설 재직 당시 가입)에 기대를 걸고 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기 마련. 은퇴 이후 황금연못에서 행복한 노후를 보내는 베이비부머(1955~1963년생)도 있지만 '9만시간(퇴직 이후 주어지는 여유시간)'을 미리 대비하지 못해 외로움과 고통에 시달리는 은퇴자들도 주위에서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베이비부머 이전 세대인 60~70대 노인들은 대부분 노후설계에 대한 개념조차 모른 채 노년을 맞이한 경우가 많다. 자식 뒷바라지에 모든 것을 걸었지만 핵가족 문화에 익숙한 자녀들로부터 외면당하거나 버림받기도 한다. 실제로 지난 4월 부양비 소송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64세 노모가 의사인 아들을 상대로 생활비를 달라며 낸 소송에서 법원은 아들(40)에게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매달 부양료 5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서울가정법원에 따르면 2000년부터 2003년까지 24건에 불과했던 부양비 청구소송은 2004년부터 2009년까지 연간 39건에서 58건으로 늘었다. 또 지난해 전국에서 접수된 소송은 100건을 웃돌았다. 소송을 제기한 노인들은 본의 아니게 노후 준비를 소홀히 한 대가로 경제적 고통과 정신적 외로움을 겪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아무런 계획이나 준비 없이 마주친 은퇴 이후의 삶은 혹독하기만 했다. 더구나 최근에는 남편이나 아내 없이 자식과 떨어져 사는 독거노인은 개인적인 문제를 넘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만 65세 이상 독거노인은 104만3,989가구로 100만명을 넘어섰다. 전체 노인 535만명에서 5명 중 1명은 혼자 사는 셈이다. 독거노인은 2006년 83만3,000가구에서 불과 4년 만에 25% 이상 급증했다. 통계청은 2020년에는 독거노인이 150만명을 웃돌 것으로 내다봤다. 물론 이들 중에는 경제력을 갖추고 자신만의 삶을 추구하는 노인도 있지만 대다수는 생활고를 겪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실시한 2008년 노인실태조사에서 독거노인의 월평균 소득은 56만원에 불과했다. 더욱이 조사대상의 64.3%는 1인가구 최저생계비(50만4,000원)에도 못 미치는 50만원 미만이었다. 노인 우울증 환자도 급증하고 있는 추세다. 건강보험정책연구원이 2004년부터 2009년까지 건강보험 진료비를 분석한 결과 2009년 65세 이상 노인 우울증 환자는 14만7,721명으로 5년 전의 8만9,040명보다 1.7배 증가했다. 매년 30%가량 늘어난 셈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노인 자살도 심각한 수준이다. 경찰대 치안정책연구소에 따르면 61세 이상 노인 자살자 수는 1989년 788명에서 2008년 4,029명으로 20년 만에 5배 이상 늘어났다. 2009년에는 4,614명으로 전년 대비 15%가량 급증하기도 했다. 서병수 한국빈곤문제연구소장은 최근 한 토론회에서 "노인들이 가족이나 사회적 관계에서 소외되면서 노인 우울증과 자살, 범죄 발생이 급증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강조했다. 노인들이 이처럼 우울증을 앓거나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유는 뭘까. 2009년 통계청 조사에서 독거노인이 겪고 있는 가장 큰 문제로 '경제적인 어려움(43.6%)'이 꼽혔다. 또 독거노인 4명 중 3명은 노후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은 것으로 조사돼 자녀나 친지에게 의지하는 것 외에 대책이 없는 상태였다. 민주영 삼성생명 은퇴연구소 연구원은 "수많은 베이비부머가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다가 정작 은퇴한 뒤에는 가족들로부터 소외되는 경향이 있다"며 "행복한 노후를 위해서는 우선 가족관계를 중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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