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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가 쓰는 법이야기] <10> 재판과 속도

충실한 심리·신속 진행으로… 신뢰감·효율성 조화 이뤄야



모든 일이 그렇듯이 재판도 시간의 제약을 받게 된다. 그렇다고 당사자의 주장을 충분히 듣지도 않고 재판을 할 수는 없다. 사건 당사자에게 무한정 진술할 기회를 부여하다 보면 사건의 처리가 지연돼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재판이라는 원망을 살 수가 있다. 한편, 효율성을 중시해 사건의 결론에 영향이 없는 당사자의 진술을 제지하다 보면 졸속 재판이라는 비난을 듣게 된다. 두 가지 비난을 모두 피해가며 이상적인 속도로 재판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다 마찬가지다. 필자가 미국에서 우체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우편물을 들고 우체국으로 들어서자 출입문 바로 앞까지 긴 줄이 이어져 있었다. 모두 5개의 창구가 마련돼 있었으나 단 2개의 창구에서만 일이 처리되고 있었다. 우체국 직원은 긴 줄을 보고도 서두르는 기색이 전혀 없었고 민원인들과 웃으며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했다. 그곳 사람들은 줄을 서서 한참을 기다린 만큼 자신의 순서가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참고 기다려 줄 것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서로 조금씩 서두르면 모두가 만족할 텐데.’ 우리나라의 ‘빨리빨리’ 정신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 후 우리나라에 돌아와 대형할인매장을 방문하게 됐다. 그곳 식당가에서 먹을 것을 사려고 줄을 섰다. 줄을 선 사람들은 정말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우리나라 국민의 신속한 일 처리에 뿌듯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필자의 차례가 돼 주문을 마치고 거스름돈을 받아드는 순간, 점원은 필자의 뒤에 서 있는 사람에게 “다음 분 뭐 드시겠어요?”라고 물었다. 필자가 거스름돈을 지갑에 넣기도 전에 볼 일을 다 봤으니 빨리 비키라는 식이다. 더욱 당황스러웠던 것은 뒷사람의 반응이었다. 필자의 뒤에 서 있던 사람은 지갑에 돈을 넣고 있는 필자의 옆으로 나서면서 주문을 시작했다. 필자는 확보된 기회를 빼앗기고 무시당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속도감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필자로부터 재판을 받았던 당사자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하다. 신속한 재판과 귀담아 듣는 재판은 동시에 잡을 수 없는 두 마리 토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둘 중의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버려야 할까? 신속한 재판이 어설픈 재판, 대충하는 재판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식당 점원으로부터 푸대접을 받고 나서 다시 그 식당을 이용하고 싶은 생각이 들 리가 없다. 비록 한참을 기다리더라도 나의 업무가 정확하게 처리된다면 적어도 신뢰감만은 가질 수 있다. 신속성은 제대로 된 재판이 겸비해야 할 모습의 하나에 불과하다. 신속성을 위해 ‘재판의 재판다움’이 희생된다면 이는 본말이 전도된 것이나 다름없다. 중요한 결정을 하기 전에 상담을 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우체국 직원과 식당 점원 중 누구를 찾아갈 것인지 알기는 어렵지 않다. 재판을 받으러 오는 당사자의 심정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하지만 심리의 충실함에 소홀함이 없었다는 것만으로 박수를 받을 수 없는 것이 재판이다. 국민은 귀담아 듣는 재판이 신속하게 진행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판사가 끊임없이 고민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체국 직원과 식당 점원, 어느 하나도 버릴 수 없다. ▦ 이글은 본지 홈페이지(hankooki.com)뿐만 아니라 서울중앙지방법원 홈페이지(seoul.scourt.go.kr) ‘법원칼럼’을통해서도 언제든지 볼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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