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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보릿고개와 대리인 비용


"1960년대 초중반까지도 보릿고개가 있었지. 쑥은 고급이었고 풀잎가루로 죽 끓여서 먹고, 소나무 껍질을 끓여 먹기도 하고."

팔순이 다 되신 어머니는 과거 보리가 미처 여물지 않은 춘궁기(음력 4월이 가장 심함)를 일컫는 보릿고개 시절을 회상하며 이같이 말씀하셨다. 물론 보릿고개가 아닌 때도 늘 배가 고프기는 마찬가지였는데 지금 세대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때가 아니었나 싶다. 지금도 농사를 짓고 계시는 어머니는 십수 년 전 추수를 앞둔 논으로 같이 가자고 하시더니 황금물결 속을 거닐면서 "이 황금벌판이 너무 멋있지 않느냐. 세상에서 가장 멋있다"며 흐뭇해하셨다. 절로 가슴이 뭉클했다.

보릿고개를 넘긴 1970년대에도 어머니는 새벽4시께 일어나 아침밥을 하신 뒤 들에 나가셨고 자정께 주무실 때까지 쉼 없이 일을 하셨다. 그만큼 하루하루가 힘든 시절이었다. 기자도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로 시작하는 새마을 노래를 듣고 눈을 뜬 뒤 아버지를 따라 퇴비(풀에다 사람과 동물의 똥·오줌을 섞어 만든 자연비료) 증산운동에 참여하곤 했다. 당시는 봄에 쌀 한 가마를 부잣집에서 빌리면 가을에 30% 이상 더해 상환하던 때였다. 연리로 치면 70% 가까운 고금리였다. 그만큼 쌀이 귀해 값싼 밀가루로 수제비를 해 먹거나 쌀을 조금 넣은 고구마밥이나 보리밥을 먹곤 했다. 어머니는 고구마순에다 보릿가루를 넣고 죽을 쒀 드시기도 했다. 학교에서도 늘 혼식 검사를 했고 식량을 축내는 쥐의 꼬리를 잘라서 제출하라고 했다.

학생서 노인까지 정신적 보릿고개

땅 한 뙈기 제대로 없는 집에 시집오신 어머니는 그야말로 초인과 같이 버티며 하나하나 살림을 일구셨다. 시부모님 모시고 5남매 키우시며 그 힘든 농사일을 다 해내셨다. 어머니는 논밭 농사 외에 돼지·염소·토끼도 키우고 뽕나무도 길러 양잠도 하시고 무명옷의 원료인 목화도 재배하셨다. 한 번은 겨울 칼바람이 몰아칠 때 돼지가 새끼를 낳아 "얼어 죽을 수도 있다"며 10여마리의 새끼 돼지와 같이 안방에서 밤을 같이 지샌 적도 있다. 뽕나무 잎을 먹는 누에들에게도 봄·여름·가을 각각 한 달씩 안방을 내주곤 했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받침대를 아파트처럼 켜켜이 쌓고 뽕잎을 쫙 갈아주면 누에가 그것을 먹고 실을 토해내며 타원형 고치(명주옷의 원료)를 만드는데 참 신기했다. 어머니는 "농사의 원리가 봄에 씨앗을 뿌리면 여름을 거쳐 무럭무럭 자라고 가을에 결실을 본 뒤 겨울에 다시 거름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 인생을 닮았다"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희생으로 일관한 부모님 세대의 공으로 대한민국은 산업화 시대에 이어 민주화운동 시대를 거쳐 정보화·글로벌화 세상을 달리게 됐다. 이제는 세계 10대 경제강국을 노릴 정도까지 커졌다. 모두가 땀 흘려 노력한 대가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경제적 풍요를 구가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주변에서는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학생들은 입시 교육에 치여 해맑은 웃음이 사라졌고 젊은층은 극심한 취업난으로 오포세대(연애, 결혼, 출산, 인간관계, 내집마련 포기)라고 자조하고 있다. 30~50대는 고용불안과 격무, 폭등하는 전월셋값에 시름하고 있다. 자영업자들도 최저임금조차 못 받다가 폐업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노인층 역시 고단한 노년을 보내는 분들이 많다. 일종의 정신적 보릿고개 시대다.

이를 탈피하기 위해서는 주인(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대리인(정치권과 정부 등)에게 수반되는 대리인 비용(agency costs)을 최소화하는 게 중요하다. 정치권과 정부가 주인을 위해 최적의 의사결정을 하기 보다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앞세우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국민이 원하는 공무원연금 개혁이나 공기업 개혁, 경제민주화와 경제활성화를 정치권이 당리당략에 따라 처리하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되는 것이 한 예가 될 수 있다. 복지와 증세의 조화 문제도 좀 더 책임감 있게 다루도록 감시할 필요가 있다.

정치권 책임 있는 대리인 거듭날 때

이제는 정치권이 여야를 떠나 대한민국호를 이끄는 대리인으로서 좀 더 확고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깊은 터널 속을 헤매는 남북 경제협력을 활성화시켜 저성장의 돌파구를 마련하고 빨간불이 켜진 전통산업에 정보통신기술(ICT·Information and Communications Technologies) 융복합화의 속도를 높여야 한다. 무엇보다 사물인터넷(IoT)·3D프린팅·빅데이터·웨어러블기기·핀테크·무인자동차·헬스케어·인공지능·로봇·의료·우주산업·미래농업 등 신산업에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확보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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