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진 가상을 현실로 믿고 충실히 순간을 사는 것, 그게 바로 진짜 배우죠. 비록 여러 삶을 사는 게 고통이지만 참 짜릿한 맛이 있습니다."
배우 박중훈(47ㆍ사진)이 말하는 배우의 본질이다. 1985년 11월11일, 그는 자신의 첫 출연 작품 크랭크 인(촬영 시작)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영화 '깜보'로 첫발을 내디딘 그는 지난 28년간 40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생애 절반 가까이를 배우로 살았다. 21세, 아직 앳된 모습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미 인기배우가 됐고 이후 20여년을 '톱스타'로 지내왔다. 정상, 혹은 정상 언저리에서 영화판을 꿋꿋이 지켜온 그가 '초짜 감독'으로 새로운 항해를 시작했다. "메시지 전달자가 아닌 메시지 생산자"가 돼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풀어내고 싶다고 했다. 지난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팔판동 한 카페에서 약간은 긴장한 듯 들뜬 마음으로 새 도전 앞에 선 그를 만났다.
아쉬움은 있지만 후회는 없다
"마치 일련의 순서처럼 배우 하다가 자연스레 감독 옷을 입은 건 아닙니다. 연이은 대중의 외면으로 힘들기도 했고 연기도 전혀 새롭지 않았습니다. 이전 것을 답습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보면서 관객과 점점 멀어지는 느낌도 들었죠."
베테랑 연기자가 메가폰을 잡은 이유는 분명했다. 대중의 뜨거운 관심이 다시금 그리웠다. 여기에 또렷한 이유 하나를 더 얹었다. 풀어내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마흔이 넘고부터 늘 가슴이 답답했죠. 뭔가 해야 할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성공하기 위해 무작정 달려왔던 제 지난날에 대한 회한이 있었던 것 같아요."
먹고 먹히는 치열한 연예계 이야기, 30년 가까이 몸소 체험하며 겪은 스타의 단맛과 쓴맛은 그렇게 박중훈의 손을 빌려 한 편의 영화가 됐다. 투자·캐스팅 난항은 여느 신임 감독들이 겪는 것과 같았다. "1년 넘게 시나리오를 붙들고 있을 때는 마치 시커먼 절벽에 오르는 기분도 들었다"고 한다.
영화는 으레 겪는 산고를 겪으며 그렇게 대중 앞에 무사히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 "아쉬움은 있지만 후회는 없다"는 게 신인 감독 박중훈의 변(辯)이다.
"원치 않은 결과가 나와도 겸허히 받아들일 준비는 돼 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인생을 덤으로 살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지금 제가 누리는 행운이 끝나도 '나는 그동안 축복 받은 영화인이었다'고 스스로 달래며 또 앞으로 나아가겠죠."
'손익분기점' '흥행'이라는 현실적 고민 앞에 '신인 감독' 박중훈은 애써 태연하려 노력하는 듯 보였다. 첫 작품을 토대로 연출자에 대한 그의 꿈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번 영화가 흥행 면에서 '상식적인 결과'로 이어져 두 번째 영화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된다면 자신의 경험과 시각을 모두 녹인 '박중훈의 얘기'가 아니라'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다뤄보고 싶다고 했다.
이제야 '사람ㆍ관계'가 보이더군요
"흔히 '욕심이 없으면 성공할 수 있겠어'라고 말합니다. 물론 목표한 바를 이루고 성취하기에는 과욕을 부리고 오롯이 자기 생각만 하는 게 지름길이죠. 그러나 분명한 건 어디까지나 빨리 목적지에 다다르는 방법이지 절대 유일한 길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자기 욕망의 깊이는 안으로 가져가되 다른 이와의 관계도 끊임없이 다듬으며 나아가는 게 결코 쉽지는 않지만 또 불가능하지도 않더군요. 사람 사이 관계와 소통에서 진짜 행복을 느낀다는 걸 이제야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한때 그도 나밖에 모르던 시절이 있었다. '유명세가 사람을 괴물로 만들더라'는 영화 속 대사처럼 박중훈의 20·30대 모든 가치의 초점은 자신이었다.
"20대 초반부터 주연배우를 했는데 그때는 인기 얻고, 돈 벌고, 성공하는 게 내 생각의 전부였죠. 하지만 내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며 연예계에서 여러 부침을 겪으며 여러 감정 변화가 있었고 '부끄러움'을 알게 되더군요. 다행이죠. 아직은 이 부끄러움을 그저 회환으로 남기지 않고 얼마든지 회복할 수 있는 '젊은 40대'이니까요."
곧 지천명(知天命)을 앞둔 박중훈은 "나이가 들어가는 걸 하늘에서 인간에게 준 몇 가지 축복 중 하나"라고 말한다. 보이지 않았던 삶의 소중한 가치가 하나둘 눈에 띄기 시작한 지금의 순간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 세간의 화제를 몰고 다닌 '톱스타' 시절의 그때보다 한층 편안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나이가 든다고 자연히 너그러워지고 유해지는 건 아닌 것 같더군요. 자기 성찰 없이 그냥 그렇게 시간을 흘려 보내면 추한 모습 그대로 제자리걸음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 제게 주어지는 훗날의 시간은 사욕을 다스리고 주변의 이들과 관계 맺고 호흡하는 데 쓰고 싶습니다."
박중훈은 "엔터테이너 박중훈으로서 상업적으로 가장 영향력을 발휘했던 정점을 꼽으라면 1990년대 중·후반을 들 수 있지만 그건 크게 의미가 없는 공허(空虛)했던 순간"이라고 말한다. 바꿔 말해 인간 박중훈의 인생 그래프 정점은 여전히 진행형이라는 말이다.
"명작 '취화선'은 임권택 감독이 예순이 훌쩍 넘어 세상에 내놓은 영화입니다. 이전에도 무수히 많은 명작을 쏟아냈는데 임 감독이 만약 그때 그 시절 중 하나를 인생의 정점으로 꼽았다면 예순 여섯에 '취화선'이라는 명작은 탄생할 수 없었을 겁니다. 늘 '지금'을 최고의 순간이라 여기며 살아야죠."
'충실히 순간을 사는 것'. 그가 배우의 본질을 언급하며 내뱉은 구절이 다시금 맴돌았다.'초짜 감독'으로 새로운 출발선에 서 있는 지금의 그에게 꼭 맞는 말이다.
● '톱스타'는 어떤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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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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