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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이 그린 ‘네컷 만화 세상’

■ 혁명과 웃음 (천정환 외 지음, 앨피 펴냄)<br>60년 9월1일 본지에 시사만화 첫 게재 시작<br>총 134개 만화에 격변기 풍자·서민 삶 담아




1960년 9월. 4ㆍ19 혁명의 기운이 조금씩 사그러들기 시작하는 가을. 도서관이 아닌 신문사 책상 앞에서, 그리고 두꺼운 원서 대신 흐느적거리는 일간 신문을 들추며 네컷짜리 시사만화를 그리느라 진땀을 빼는 한 대학생이 있었다. 만 열아홉살 청년 김승옥(金承鈺, 1941~ ). 스스로를 시사 만화가 ‘김이구(金二究)’라 했다. ‘이구’는 수인(囚人)번호를 따다 이름을 만들었던 이육사처럼 자신의 순천 고향집 주소를 따서 만들어낸 이름. 그로부터 4년 뒤 ‘무진기행’이란 불세출의 문학작품으로 전후 국내 문학사에 이른바 ‘감수성 혁명’이라는 충격파를 불러 온 인물이 바로 김승옥, 아니 김이구였다. ‘무진기행’이란 제목만으로도 우리 숨을 턱 막히게 하는 작가 김승옥의 세상과 첫 조우는 이렇게 시작됐다. 1960년 9월 1일. 그러니까 그날은 서울경제이란 국내 첫 경제일간지가 창간을 알리는 날이었고, 서울대 불문과 1학년생 김승옥이 서울경제에 ‘파고다 영감’이라는 네컷짜리 시사만화 첫 테이프를 끊는 날이었다. ‘전방위 예술가’, ‘르네상스인’ 김승옥이 서울경제에 시사만화를 그리게 된 사연은 이렇다. 1960년 여름. 순천 고향집에서 방학을 보낸 그는 9월 서울경제가 창간된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평소 만화를 즐겨 그리던 김승옥은 “연재 만화가 결정되지 않았으면 본인에게 그리도록 해 주시오. 본인은 직업 만화가는 아니지만…”이란 말로 시작되는 편지를 몇편의 만화 견본과 함께 문화부장 앞으로 보냈다. 놀랍게도 그에게 당장 시사만화를 맡으라는 답장이 날라왔다. 김성환의 ‘고바우 영감’(동아일보), 안의섭의 ‘두꺼비’(경향신문)에서 보듯 당시 네 컷 시사 만화는 독자 인기를 독차지하는, 말하자면 일간신문 최고인기 상품이었다. 과연 서울경제의 문화부장은 이 풋내기 만화가의 어떤 점을 높이 산 것일까. 소설 ‘무진기행’(64년)과 ‘서울 1964년 겨울’(65년)을 토해낼 천재 청년 작가의 가능성을 한발 앞서 간파했단 말인가. 아니면 시나리오 ‘안개’(67년), ‘영자의 전성시대’(75년)를 비롯해 자신이 직접 감독한 영화 ‘감자(68년)에서 터져 나올 ‘모던 보이(Modern Boy)’의 번뜩이는 감수성이 이미 이 때부터 빛을 발했던 것일까. ‘혁명과 웃음’이란 책엔 아직 세상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청년 김승옥의 5개월 남짓 시사만화가 인생이 담겨있다. 이 책은 단단하기가 철갑 족쇄 같고 치사하기가 능구렁이 같던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뒤 군사정권이 들어서기 직전, 한국사의 기억 속에서 상실된 한 페이지를 추적하는 시간여행이자, 소설가 김승옥의 천재성의 뿌리를 들춰보는 인물 탐구서라 할 수 있다. 책 안에 실려 있는 60년 9월 1일부터 61년 2월 14일까지의 134개 만화에는 “혁명 주체이자 김승옥과 같은 대학생들의 사고 방식, 반혁명 세력의 움직임, 민주당 정권의 실책과 머뭇거림,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ㆍ일본의 힘, 그리고 이런 거대한 현실 속에서도 간단없이 이어지는 보통 사람들의 살림살이가 모두 녹아 있다.” 그에게 문학은 소중한 것이었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샘물처럼 무한히 솟아오르는 영감과 재능은 그를 만화가, 소설가를 거쳐, 대중적인 시나리오 작가, 영화 감독의 길로 이끌었다. 그래서 문화 평론가들은 그를 ‘르네상스인’이라 부른다. 순수문학을 버리고 왜 통속적인 길을 갔느냐는 질문에 그는 “(인세를 제대로 받지 못해) 먹고 살기가 어려워서”라고 답했다. 마치 그가 좋아했던 미국 작가 피츠제랄드가 “모든 소설가는 다 돈을 벌기 위해서 글을 쓴다. 그렇지 않다면 거짓이다”라고 했던 것처럼. 종합 예술인으로서 그의 면모를 들여다보려면 ‘르네상스인 김승옥‘(앨피 펴냄)을 보시라. 두 책을 모두 읽고 나면 명작 ‘무진기행’의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다. 격변기의 허름한 선술집에서,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스크루 드라이버’ 한잔의 짜릿하면서도 달콤한 그 유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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