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R&D 예산은 부족함 없어
불평만 하면 과학 진보 어려워 뛰어난 제조업 경쟁력 바탕으로
핵융합 등 거대과학서 미래 찾아야 "과학자는 명예와 가치를 추구합니다. 돈은 그 다음입니다. 순서가 바뀌면 안 되죠." 눈이 내린 대덕연구단지 국가핵융합연구소(NFRI)의 12월은 고요했다. '세계 7대 핵융합 강국'이라는 성과를 거둔 연구소라고 하기에는 기대만큼 거창하지 않았다. 거대과학이란 이름에 걸맞게 뭔가 거대한 장치를 기대한 기자의 무지(無智)일까. 핵융합연구소의 첫 인상에 이경수 소장의 뼈 있는 말이 돌아왔다. "그게 우리 과학의 현실입니다. 뭔가 큰 걸, 뭔가 대단한 성과를 미리 기대하는 조급증이랄까요." 인터뷰의 첫 대답에 결론을 내린 듯한 느낌이다. 이 소장은 "언제부턴가 우리 과학은 과정보다 결과에 대한 평가에 목을 매는 이상한 구조가 됐다"고 지적했다. 관료제에 얽매인 성과평가제도가 과학자들을 일용직 근로자로 만들고 있다는 과학계의 불만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과학, 특히 기초과학은 연구자들이 하고 싶어야 한다"며 "페이스북이 구글을 제치고 미국 최고의 직장에 꼽혔다. 왜일까. 구글조차도 시간이 지나며 조직이 단단해진 게 싫은 거다. 과학자들은 자율 속에 창의성을 발휘한다"고 설명했다. 연구지원이 부족하다는 과학계 일부의 지적에 대해 이 소장은 "15조원에 달하는 연구개발(R&D) 예산이면 부족한 것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과거와 비교해보자. 연구기회는 훨씬 많아졌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15조원의 예산이면 세계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수준"이라고 전했다. 이 소장은 과학계에서 말하는 연구비와 지원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좀 더 냉정하게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연구비를 지원하면 장비가 없다고 하고 그 다음은 사람, 그리고서는 건물이 없다고 한다. 결국 다시 돈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는 구조가 됐다"며 "효율성과 효용성보다는 불만이 불평으로 변하는 구조로는 과학의 진보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이 소장은 늘어난 돈에도 성과가 보이지 않는 이유를 '쌓임'이라고 지적했다. "바닥이 다져지지 않았기 때문에 가시적인 성과가 보이지 않는 것일 뿐"이라며 "지금은 여기저기 뿌려놓은 씨앗들이 분산돼 올라오는 단계"라고 말했다. 그는 더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라고 강조했다. 이 소장은 "다양한 기초연구의 바탕에서 포트폴리오를 구성해야 한다"며 "과학은 경제와 달리 선택하면 10년, 20년이 아닌 100년을 넘게 내다봐야 하는 만큼 선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최근 과학계의 최대 이슈인 국가과학위원회에 대한 질문에 이 소장은 명쾌한 의견을 내놓았다. 그는 "융합되고 있는 R&D의 조율자로 국과위는 필요하다. 문제는 국과위가 얼마나 힘을 가지느냐이고 국과위원장의 정치적 독립성도 중요하다"고 답했다. 이 소장은 한국 과학의 미래를 거대과학에서 찾는다. 강력한 제조업 경쟁력을 바탕으로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 중 하나라는 것이다. 한국형 '인공태양'으로 불리는 핵융합연구소의 'KSTAR'가 대표적인 성공사례이기도 하다. 왜 거대과학이냐는 질문에 이 소장은 "핵융합ㆍ항공우주 등 거대과학은 장치산업이 뒷받침된 기초과학"이라며 "지금까지 설계는 많이 했지만 장치로 만들어내고 시운전에 성공한 것은 KSTAR가 처음"이라고 말했다. 2008년 6월 KSTAR가 한번에 시운전에 성공하며 한국은 핵융합 강국으로 퀀텀점프를 했다. 영하 270도까지 온도를 내려야 가동되는 첫 번째 초전도 핵융합 장치였다. 8,600곳의 용접부위 곳곳에 도사린 위험들을 기적처럼 극복했다. 이후 2년이 지난 지난해 연구소는 중수소 핵융합으로 고속중성자를 생성하는 실험에 성공하며 핵융합을 이용한 에너지원의 상용화에 한 발 더 다가갔다. 이 소장은 "KSTAR의 성공은 포스코ㆍ두산ㆍ삼성전자 등 대기업부터 중소기업까지 69개 국내 기업의 경쟁력이 바탕이 됐다"며 "우리가 거대과학에 성공할 수 있는 것은 누구보다 뛰어난 제조업의 경쟁력이 바탕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4,200억원이 투자된 KSTAR가 시운전에 성공하기까지 이 소장은 피를 말리는 시간을 보냈다. "시운전이 끝난 후 어떤 느낌이 드느냐 하면 이제부터 잘될 확률보다는 안 될 확률이 더 높아지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일해본 사람만이 아는 기분"이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이 소장은 실제 시운전에 성공한 뒤 얼마 지나 졸도해 응급실에 실려갔다. 핵융합연구소의 2011년은 미래 에너지원 확보에 한 발 더 다가선다. 이 소장은 "핵융합을 이용해 2030년께 전기에너지를 만든다면 화석연료에 따른 탄소배출 문제를 해결하고 원자로의 위험성에서도 벗어날 수 있는 미래 에너지원을 확보하게 된다"고 전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핵융합로인 KSTAR의 구조를 설명하며 이 소장은 착공식 사진을 가장 간직하고 싶은 과거라고 설명했다. 그는 "KSTAR를 설명할 때 이 사진을 꼭 보여준다"며 "착공했던 1998년은 우리 경제가 가장 어렵다는 IMF 외환위기 때였다"고 말했다. ■이경수 소장은 지난 1956년 대구 출생으로 경북고와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했한 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 텍사스 오스틴대에서 플라스마 물리학박사 학위를 받고 매사추세츠공대(MIT) 플라스마퓨전센터에서 플라스마와 핵융합을 연구하다 1991년 국내에 돌아왔다. 이후 줄곧 한국핵융합실험로 KSTAR의 연구개발사업을 이끌어왔다. 2007년 KSTAR 시설 완공, 2008년 시운전과 플라스마 생성을 이뤄냈으며 2010년에는 중수소 핵융합으로 고속중성자를 생성하는 실험에 성공했다. 지금은 더 안정적인 핵융합 반응조건을 찾기 위해 온도를 1억도까지 올리고 플라스마를 정밀제어하는 실험을 진행 중이다. ▦국가핵융합연구소 소장 ▦국제핵융합실험로 경영자문위원회 의장 ▦국제핵융합연구평의회 의장 ▦미국 핵융합협의회 리더십 어워드 수상(2009년)
올 초고온 1억도에 도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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