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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정주영회장 10주기]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은 86년의 삶

"실패는 한순간의 시련일뿐"… 맨주먹 하나로 '현대신화' 창조<br>전후복구·고속도 건설 등 통해 현대건설로 재계 전면에 부상<br>車·조선업 등 도전·해외도 개척<br>황혼엔 대북사업으로 불태워 한국경제 발전의 영원한 전설로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이 1977년 사우디 주베일 산업항 공사현장을 둘러보며 직원들의 설명을 듣고 있다. /서울경제 DB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이 1985년 국내 최초의 고유 모델인 포니 엑셀 신차 발표회에 참석해 차를 살펴보고 있다. /서울경제 DB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이 1998년 소떼 500마리를 이끌고 판문점을 통해 방북하고 있다. /서울경제DB

"나는 생명이 있는 한 실패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살아 있고 건강한 한 나한테 시련은 있을지언정 실패는 없다. 낙관하자. 긍정적으로 생각하자."(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그가 맨주먹 하나로 세계 굴지의 기업을 일궈낼 수 있었던 비결은 '실패는 한순간의 시련뿐'이라는 강인한 의지였다. 그 의지 앞에 불가능은 없었다. 특히 그는 한 사람의 기업인으로만 머물 수 없었다. 그의 도전은 곧 대한민국 경제의 도전이었고, 그의 성공이 바로 대한민국 경제의 도약이었기 때문이다. 오늘(21일)은 정 명예회장이 타개한 지 10년이 되는 날이다.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기업인은 막중한 사회적 책임을 느끼고 기업 발전에 혼신의 힘을 쏟아야 한다"는 그의 기업가 정신은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현대건설로 재계 전면에=1915년 강원도 통천군 아산리에서 아버지 정복식과 어머니 한성실의 6남2녀 중 장남으로 출생한 정 명예회장은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16세 때 소판 돈 70원을 갖고 상경한다. 첫 가출에는 '실패'했지만 결국 18세 되던 해 집을 나와 막노동꾼 생활을 시작했다. 이어 종업원으로 일하던 쌀가게를 인수해 경일상회를 개업하면서 자수성가의 꿈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곧 좌절을 맛본다. 1939년 일제의 쌀배급제 실시로 경일상회는 문을 닫았다. 자동차 수리공장이었던 '아도서비스'는 화재로 사라졌고 이어 지은 무허가 공장은 일제에 의해 강제 폐쇄당했다. 청년 정주영은 다시 일어섰다.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하고 이듬해 '현대토건사'를 세운다. 이것이 바로 현대건설의 전신이다. 현대토건사는 전후 복구사업을 수행하며 한국 경제계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당시 한겨울 부산 유엔군 묘지를 새파란 잔디로 덮어 달라는 제의에 낙동강가의 보리를 옮겨 심어 미군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는 일화는 아직도 유명하다. 1962년 국내 도급순위에 1위에 오른 현대건설은 1965년 태국 파티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 수주로 해외에 진출했다. 1968년에는 2년5개월이라는 세계 최단시간 완공의 기록을 남긴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면서 현대건설이라는 이름을 만인에게 각인시켰다. ◇신사업과 해외시장 개척=정주영은 국내와 한 분야에서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았다. 건설에 이어 자동차ㆍ조선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사업계획서 한 장과 울산 미포만의 백사장 사진 한 장만 달랑 들고 1971년 9월 런던으로 날아갔다. 그는 여기서 조선소도 없이 선박왕 오나시스의 처남인 리바노스로부터 26만톤짜리 2척을 수주하는 거짓말 같은 일화를 만들어냈다. 또 1976년에는 20세기 최대의 역사로 불리는 9억3,000만달러 규모의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수주하며 중동 진출의 꽃을 피운다. 1966년 진출한 자동차 산업은 1974년에 순수 국산자동차 1호인 포니를 만들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시작했다. 1억달러를 넘는 돈을 과감히 투자해 연산 5만6,000대 규모의 국산차 공장을 지었다. 1986년에는 국내 처음으로 엑셀이 자동차의 본고장인 미국시장에 진출, 불과 4개월 만에 5만2,400대를 판매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 여세를 몰아 정 명예회장은 첨단전자 분야에 눈을 돌리고 1983년 현대전자를 설립해 세계적인 반도체업체로 성장시켰다. 기업인 정주영은 체육인으로도 눈부신 활약을 했다. 1981년 서울올림픽 유치위원장을 맡아 불가능하다는 예상을 뒤엎고 불과 5개월 만에 서울을 올림픽 개최도시로 만들었다. ◇대북사업으로 황혼 불태워=한국경제의 살아 있는 신화로 떠오른 그는 대권도전으로 다시 한번 좌절을 경험한다. 1992년 통일국민당이 창당 3개월 만에 원내 31석을 차지하며 기대감을 높였지만 같은 해 치러진 대선에서는 참패를 맛봐야 했다. 그 후유증은 심각했다. 현대그룹은 문민정부 5년 동안 '괘씸죄'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절치부심한 정 명예회장은 김대중 정부가 들어 대북사업으로 도약을 모색한다. 1998년 6월17일 83세 고령의 몸으로 소떼 500마리를 끌고 군사분계선을 넘은 것이 시작이었다. 같은 해 10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금강산 관광사업을 실현시켰고 이후 서해안 공단사업 등 남북경협사업을 펼쳤다. 그러나 수익성 없는 대북사업은 오히려 현대그룹의 부실을 키웠다. 급기야 1999년 말 그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면서부터는 그룹 경영의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형제 간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2000년 일어난 이른바 '왕자의 난'으로 불린 충돌은 그룹의 모태인 현대건설의 유동성 위기로 이어졌다. 가신그룹의 이기주의까지 가세한 형제들의 경영권 다툼은 점입가경으로 치달았고 그러는 사이 건설을 포함해 전자ㆍ상선ㆍ투신ㆍ증권 등 그룹의 전계열사가 도미노식으로 부실화됐다. 정 명예회장의 기력은 현대사태가 최고조를 이루던 2000년 6월 말 방북을 계기로 급속도로 쇠약해지기 시작했고 결국 2001년 3월21일 86세로 생을 마감했다. 파란만장했던 개인의 삶을 넘어 대한민국 경제사의 첫 막이 내려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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